<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하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10. 하리(下里)
하리(下里)는 도야리와 함께 본래 고암면(古巖面) 지역으로 역촌(驛村)이라 불리던 마을로 1914년 군면 폐치분합 때 창녕읍에 편입되면서 하리라 개칭하였다.
화왕산과 목마산의 산자락에 있는 도야리의 상동이 동편 윗쪽 높은 지대임에 비해 역촌의 동편 마을이 낮은 지대의 마을이어서 하동(下洞)이라 불리었는데 따라 하리가 되었다.
하리에는 조선 시대에 내야역(內野驛)이 있었으므로 역촌이라 불리어 졌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역원(驛院)란에 내야역이 (창녕)「현의 북쪽 7리에 있다」 하였는데 창녕현의 유일한 역이었다.
內野驛 在縣北七里(新增 東國與地勝寶 卷27 昌寧縣)
이곳을 내야(內野-內也)로 불리었는데 안들이란 뜻이니 「道也」는 디이블로 뒤에 있는 벌,뒷벌이란 뜻이니 그것과 서로 연결이 되는 지명이다.
행정 리는 하리 1개 리 뿐이다.
◎ 10-1 하리(下里)
하리 일대의 여러 자연 마을의 행정 리 이름인데, 자연 마을은 윗마(상동), 아랫마(하동),새마, 청학 등이 있다. 95호가 산다.
◎ 웃마(上洞)
하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가구수는 47호인데 김해 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
◎ 하동(下洞)
하리의 중앙부로 상동과 연이은 마을이라 아래말, 하동이라 한다. 곧 길 위(동)는 상동, 길 아래(서)는 하동인 것이다. 마을 서쪽에 둘레 두 아름 되는 회화나무 정자나무가 있다. 역이 있었던 뜸인 역땀이 있었다.
28호가 살고 있는데 김해 김씨가 많다.
◎ 내야역(內野驛) 터
하동 서편에 있는 터로 전에는 내야역이 있었던 터이다.
이 역의 이름이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에서 「內野驛」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창녕현읍지』에는 「內也驛」이라 기록되어 있어 들 야(野)와 잇기 야(也)가 구분 없이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野」와 「也」가 서로 상통하였다고 하겠다. 『창녕현 읍지』에 창녕현의 북쪽에 있었던 내야역의 규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內野驛 在縣北七里 東距大丘揄山驛四十里 西距草溪八鎭驛五十里 南距靈山一門驛二十五里 北距玄風雙山驛五十里……」
위 기록을 보면 내야역은 동쪽으로 대구 유산역과 통하는데 40리이고. 서쪽으로는 초계 팔진역과 통하는데 50리이며,남쪽으로는 영산(靈山) 일문역(一門驛)과 통하는데 거리가 25리이며,북쪽으로는 현풍(玄風) 쌍산역(雙山驛)과 통하는데 거리가 50리라 하였다.
이 역에는 대마(大馬)가 2필, 중마(中馬)가 2필, 복마(卜馬)가 10필이 있었으며,리(吏)가 20명, 노(奴)가 45명 비(婢)가 56명이 있었다.
하동 서편의 내야역터를 도개마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이 터에 술도가가 있었다고 전해 진다.
◎ 청학동(淸鶴洞)
하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암면 억만리와 경계로 산 등을 가운데 두고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데 북쪽은 고암 청학, 남쪽 마을은 창녕 청학이라 부른다.
학이 많이 살았다 하여 청학으로 불리니 옛 선비들은 은일적(隱逸的) 이상향으로 청학동을 동경하였다.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는데 최치원이 신라 말에 그곳에 들어가 은거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창녕 조씨의 세거지로 가구수 18호이다.
◎ 새마(新村)
청학의 동편 마을인데 예전에 성주 배씨와 진양 하씨 등이 100여 호 이상 살았던 마을이었다 한다. 어느 해 도둑떼가 이 동리에 들었는데 외톨박이 성씨로 강가 성을 가진 이가 도둑에게 항거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에는 가져 갈 물건도 식량도 없으니 집에 불을 지른다 해도 아까울 게 없다."
하고 싸우려 들자 도둑들이 불을 질러 버렸다. 이 바람에 온 동리 가옥에 불길이 덮쳐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는 하동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4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2호 뿐인데, 논밭 기슭에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인근 산들이 하씨와 배씨의 선산이라 옛날 일을 말해 주는 듯하다.
◆ 당고개
하동 역땀과 고암면 억만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새마 마을 가운데를 지나서 나 있는 고개인데 옛날 당집이 있었던 고개라 하여 당고개로 불린다. 지금은 당집이 없어졌으나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하리에서 당산제를 올린다.
◆ 연화봉(運花峰)
하리 서남쪽의 산으로 산 봉우리가 마치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이라 한다. 아래에 연화못이 있다.
◆ 어물리들(魚頭野)
하리 아래, 서편에 있는 들로 창녕, 고암, 대지면 일대에 걸쳐 있는 들로 오래 전부터 나락을 심는 논이 많은 곡창지대이다. 어물리는 고기머리라는 뜻의 「魚頭」에서 왔다고 한다.
고기머리라 불릴만한 산은 대지면 맥산의 부리산을 가르키는데 이 산이 잉어형국의 산이며 그 머리가 동쪽을 향하고 있어 토평천의 물을 받으므로 어두(魚頭)라 하였고 이 산의 동편 일대에 들이 있으므로 어두야, 어머리들이라 한 것이 어물리들로 변한 것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洑)가 여러 개 있는데 대지면 왕산, 왕산다리 근처의 배미보, 사말보(沙末洑), 수계(수기)보 등이 있는데 사말보는 억만리에서 시작하여 왕산리 위 들복판을 지나 대지면 효정리에 이르고, 수계(水契)보는 억만리 뒷동산에서 창녕읍 갈전으로 가는 관개수리 시설이라 수계보라 한다.
◆ 어물리 다리(旺山橋)
하리 서북쪽에 창녕읍의 경계가 끝나는 지점은 마구선 국도와 토평천이 만나는 곳의 다리이다. 하동에서 들 가운데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창녕 사람들이 주요한 농로로 이용하고 있다. 어물리들의 교량이므로 어물리 다리라 속칭하는데 왕산리 앞의 교량이므로 왕산교이다.
길이는 약 200m 가량된다.
◆ 청날끝
상동 저수지 위로 이곳에 예전에 손씨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하도 잘 살아서 억만리까지 청(마루)을 놓고 다녔다 한다. 청(廳)을 마루를 가리키나 큰 집을 가리키기도 하니 억만리 멀리까지 마루를 놓을 리도 없으니 아마 큰 집을 지었을 것이니 그 집 경계의 끝 쯤이란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연화못(運花池)
하동 서남쪽에 있는 못을 연화못이라 한다. 당초에는 자그마한 것이었으나 왜정 때 확장하였다. 연꽃이 피어 아름다운 연못이라 연화못이라 하였는데 와전 변화되어 연내못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근의 연화봉, 교리의 연화각씨 사당과 성산면 일대에 똑같은 지명이 있으니 연화각씨 설화 등과 연관이 있는 듯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 하동들
하동 마을 근처의 들을 동네안의 들이라 하여 하동들이라 부른다.
*** 1992년 발간된 <창녕군지명사>를 정리했으므로 지금 상황과 틀린 내용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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