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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창녕인물비사(5) / 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남전 南田 2025. 5. 17. 09:52

이야기-창녕인물비사(5) / 

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창녕신문> 2025년 5월 2일 연재분

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훤칠하게 잘생긴 나그네가 몹시 지친 표정으로 길가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처녀에게 다가가,

물 좀 다오!” 몹시 목이 말랐던 듯 허겁지겁 부탁했다. 처녀는 힐끗 나그네를 보는 듯하더니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고서 옆에 선 수양버들 잎을 주르륵 훑어 샘물 위에 띄운 다음 내밀었다. 물을 청하는 나그네를 웃으며 바라보는 처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나그네는 말없이 내미는 바가지 물을 받아 마셨다. 급했지만 버들잎 때문에 잎을 후후 불고서야 마실 수 있었다.

고이헌! 목이 말라 급한데 버들잎을 띄우다니!

나그네는 이장곤李長坤((1474~(1538)이란 홍문관 교리 벼슬아치였다. 그는 물을 다 마시고 나서 처녀를 바라보며 무슨 연유인가 물었다.

천천히 마시라꼬 그랬지요. 급하게 마시다가 체할까 싶어서요.”

허어! 그렇구나! 네가 기특하고 생각이 깊구나.”

보아하니 몹시 시장하신 듯하니 저희 집에 가셔서 요기라도 하시지요.”

곱상스런 처녀의 뜻밖 친절한 제안에 이교리는 너무나 고마워 사양하지 않고 따라갔다.

이 교리는 역적으로 몰려서 도망치고 있었는데 신분을 감추고 어디든 숨어야 했다.

함경도로 도망치면서 강원도 접경에서 그는 지쳐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를 잡으려 추격하던 군사들이 길가에 잠든 사내를 보았다. 이 교리는 평소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하고 특히 발이 컸다. 군사들이 자고 있는 사내를 깨워 검문하려다가,

이 교리는 과거 급제한 선비인데 저렇게 발이 클 리가 없어!”

맞아! 농군이거나 도적일 거야. 빨리 가세. 죄인이 멀리 가기 전 잡아야지

군사들은 급하게 도망치고 있을 죄인을 따라잡기 위해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그 바람에 이장곤은 무사했다.

자신의 사정이 급하고 보니 처녀를 따라가 밥을 먹고는 염치 불고하고 그 집에 빌붙었다. 며칠 지내보니 처녀가 마음씨가 곱고 재치가 있는지라 사위가 되겠다고 그 아비를 졸랐다. 양반이 상놈에게 강압조로 청해 성사된 듯.

늙은 아비는 상놈 중에서도 사람대접 못 받는 천민, 백정으로 사냥이나 버들고리나 만들어 사는 무자리(양수척)였다. 늙은 아비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였지만,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이라면서 딸과 혼인을 원하니 얼씨구나!’ 하고 사위로 맞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반 사위라 크게 반기며 온 동네 사람을 불러 혼인 잔치를 거하게 했다.

 

연산조 갑자사화(1504) 빌미는 점필재의 글 때문인데 그 문인 김굉필 선생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면서 선생의 제자들도 연루되자 이장곤도 환훤당의 문인이라 불똥이 떨어져 거제(남해, 진도라고도 한다)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런데 사악한 자가,

이장곤 교리는 활을 잘 쏘며 무인 기질이 있어 도당을 만들어 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모함하자 왕은 잡아 올려 죽이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유배길에서 도망을 쳤다. 무작정 북쪽으로 허겁지겁 달렸는데 함흥부 인근에서 양수척 딸을 만나 그 집 사위가 되어 몸을 숨기게 된 것이었다.

금헌琴軒 이장곤은 성종 때(1492)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추천되기 한 무인 기질이 있고 용모가 뛰어난 젊은이로 세거지 창녕 대합 대동과 인근인 현풍에 살던 환훤당에게 배웠다. 그의 아버지 이승언李承彦은 환훤당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었다. 또 그의 형제들은 모두 배웠는데 동생 장배는 선생의 사위가 되었다.

 

말이 사위라지만 처가의 생업인 버들고리를 만들거나 사냥을 따라가거나 하지를 않고 그저 집안에서 노닥거리며 지냈다. 외출을 했다가 관아에 발고라도 되면 낭패라 대문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조금 세월이 흐르니 장인 장모의 박대가 심해졌다. 밥을 반 그릇만 주며,

사지 멀쩡한 사내가 이 일도 못 하네, 저 일도 못 하네 하다니 식충이제.”
하고 타박하였으나 사위는 눈만 끔벅거리면서 배짱 좋게 지냈다. 아비 어미 모르게 아내는 밥을 가져와 먹게 하며 정성을 다해 보살피니 이 교리는 그저 아내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몇 년이 흘렀다.

새 임금님이 등극했다는 소문이네.”

어느 날 장인 영감의 말에 깜짝 놀란 이 교리는,

이번에 버들고리는 내가 현감에게 갖다 바치겠네.”

하고 생전 하지 않던 일을 자청했다. 버들고리를 관가에 갖다 바치려면 아전들이 갖가지 흠을 잡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장인은 기가 막히면서도 짐짓 가보라고 했다. 짐을 진 이교리가 고을 아문에 들어서면서 고함을 쳤다. 아전이 나와 막았지만 더 크게 소리쳤다.

어어! 홍문관 교리 이장곤이 왔소. 나와 보시오. 현감!”

허어! 미친놈 아니야? 상놈 중에서 씨상놈이!”

문간 소란에 현감이 나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감은 이교리와 같은 해 급제한 사람이었다. 이튿날에는 현감이 직접 처가 동리에 왕림하니 장인 장모는 물론 온동리 사람들이 놀랐다. 이교리는 양씨 아내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한양으로 가서 평생 사랑하며 지내니 요즘 말로 하자면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인간 평등을 실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청구야담에 이 이야기가 실려있다.

 

중종반정으로 이장곤은 다시 벼슬을 하게 되어 대사헌, 형조, 이조판서. , 좌찬성, 판돈녕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지는 않았으나 사림이 몰락한 후인 1520년에 칭병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그는 낙향하여 향리 인근인 성산면 냉천에 은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가 석정마을 운봉천에서 낚시했다는 큰 바위에는 금헌조대琴軒釣臺라 새겨져 있다. 후천리에 아버지 참군 이승언과 이장곤, 성안의를 배향한 연암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없어졌다.

대합 대동(구합산)에 금헌재가 있고 그 뒤쪽 골짜기에 금헌 부자의 묘소(경남유형문화유산 296)와 함께 중화 양씨 부인의 묘가 금헌 묘소 아래에 있으니 그들의 사랑이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