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지명사/남지읍

[스크랩] 0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남전 南田 2019. 2. 6. 16:18

0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해제 장달수

 

1607年(宣祖 40) 경남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수(洛水:낙동강)에서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제우 등 35인이 벌였던 뱃놀이 사실을 1758년(英祖 34) 무렵 박진영(朴震英)의 증손 박상절(朴尙節)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편집·간행하였다. 1757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쓴 기락편방서(沂洛編芳序)가 첫머리에 있고‚ 이어서 함께 뱃놀이를 했던 정구(鄭逑)· 곽재우(郭再祐)· 박충후(朴忠後)· 장현광(張顯光) 등 35인의 명단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에 기재된 34인의 사적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행장(行狀) 등에서 발췌한 용화제현행적(龍華諸賢行蹟)이 실려 있다. 그 뒤에 1620년(光海君 12) 조임도(趙任道)가 쓴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와 1728年(英祖 4)에 박상절이 쓴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용화산 주변 풍경을 여덟 폭 그림에 담고 그림마다 박상절이 지은 5언 절구 1수씩을 붙인 용화산하동범도(龍華山下同泛之圖)와 도설(圖說) (1744년)을 덧붙였다. 특히 조임도(趙任道)의 추서(追序)에는 당시 성대했던 모임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한강, 여헌, 망우당 세 선생을 한자리에서 만났던 감격이 잘 드러나 있다.

 

0 龍華諸賢行蹟

 

1607년(宣祖 40)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가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할 때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이 종유(從遊)하였고‚ 그후 28년이 지난 1634년(仁祖 12)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에서 유회(遊會)할 때 완석당(浣石堂) 박형룡(朴亨龍)이 종유(從遊)하였는데‚ 박진영과 박형룡의 현손(玄孫)인 박상절(朴尙節)이 이에 “용화산하동범록”과 “풍영대제명석각도”를 묶어기락편방(沂洛編芳)이라 제목을 붙혀 1758년(英祖 34)경에 刊印한 것이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 정구(鄭逑)를 비롯한 배를 같이 탄 35人의 명단인데‚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등 4명은 이름. 자. 호. 시호. 관작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첫머리에 적고‚ 이하는 이름·자·생년·본·호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적고 있다. 끝에 집회의 시기가 1607년(宣祖 40) 3월 28일임을 밝였다.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 : 여헌의 문인인 조임도(趙任道)의 추가서문(追序)으로 1621년(光海君 13)에 쓰여지며 내용의 대개는 집회때 이명호(李明怘)가 좌객(坐客)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을 정구가 “용화산동범록“이라 칭하였다.

그후 안정우(安挺偶)에게서 그 초고(草蒿)를 얻어 중수하였다.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 1728년(英祖 4)에 박상절(朴尙節)이

조임도(趙任道)의 현손(玄孫)인 조홍엽(趙弘燁)에게서 동범록(同泛錄)을 얻어 추선경현(追先景賢)의 성의을 다하고자 펴낸다는 내용이다.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 : 1.용화악(龍華嶽)‚ 2. 청송사(靑松寺)‚ 3. 도흥보(道興步)‚ 4. 내내촌(柰內村)‚ 5. 경양대(景釀臺)‚ 6. 시우포(是藕浦)‚ 8. 평사면(平沙面)‚ 8. 창암사(滄巖舍) 등의 그림이 있고‚ 이어서 1744년에 쓰여진 박상절의 도설(圖說)이 있다

 

鄭寒岡 諱逑 字道可 號寒岡 諡文穆公 65세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郭右尹 諱再祐 字季綏 號忘憂堂 諡忠翼公 56세

1552(명종 7)∼1617(광해군 9)

 

朴咸安 諱忠後 字景 당시 함안군수 56세

1552년(명종7)~1611년(광해3)

 

張旅軒 諱顯光 字德晦 號旅軒 諡文康公 54세

1554(명종 9)∼1637(인조 15)

 

李佶 汝閒 戊戌 咸安 獨村 1538(중종33) 70세

成景琛 仲珍 癸卯 咸安 鵲溪 1543(중종38) 65세

辛礎 支叟 己酉 靈山 聞嚴 1549(명종4) 59세

趙埴 克成 己酉 咸安 立嵒 1549(명종4) 59세 조임도의 아버지

李潚 汝澄 庚戌 咸安 葛村 1550(명종5) 58세

盧克弘 毅甫 癸丑 昌寧 沃村 1553(명종8) 55세 한강 생질

辛邦楫 汝濟 丙辰 靈山 永慕堂 1556(명종11) 52세

趙垹 克精 丁巳 咸安 伴鷗亭 1557(명종12) 51세 조임도의 숙부

李厚慶 汝懋 戊午 靈山 畏齋 1558(명종13) 50세

羅翼南 天紀 戊午 咸安敎授 1558(명종13) 50세

李道孜 至之 己未 靈山 復齋 1559(명종14) 49세

兪諧 欽哉 乙丑 靈山進士 1565(명종20) 43세

李明怘 養初 乙丑 咸安 梅竹軒 1565(명종20) 43세

李道由 明之 丙寅 靈山 滄浪叟 1566(명종21) 42세

朴震英 實哉 己巳 咸安 匡西 1569(선조2) 39세

李明憼 一初 己巳 咸安 菊庵 1569(선조2) 39세 여헌 문인

李明念 而聖 辛未 咸安 永慕齋 1571(선조4) 37세

辛膺 伯禧 壬申 靈山 奉事 1572(선조5) 36세

李明愨 子純 壬申 咸安 1572(선조5) 36세

李明悆 慶初 癸酉 咸安 1573(선조6) 35세

安侹 子長 甲戌 咸安 道谷 1574(선조7) 34세

李時馠 聞遠 乙亥 高靈 1575(선조8) 33세

郭瀅 淸叔 戊寅 玄風 1578(선조11) 30세

李道一 貫之 辛巳 靈山 消憂軒 1581(선조14) 27세

李蘭貴 夢與 甲申 星山 瑟谷 1584(선조17) 24세

柳武龍 景溧 甲申 星山 1584(선조17) 24세

趙任道 致遠 乙酉 咸安 澗松堂 1585(선조18) 23세 여헌문인

李道輔 益之 丁亥 靈山 益庵 1587(선조20) 21세

李瀣 而浩 丁亥 靈山 1587(선조20) 21세

李忠民 汝直 戊子 漆谷 1588(선조21) 20세 여헌문인

崔門柱

林眞怤(부) 樂翁 병술 林谷 1586(선조 19) 22

(원문에는 빠짐)

 

皇明萬曆丁未孟春二十八日 1607년(선조40)

 

0 第一 寒岡 鄭先生 당시 65 세

0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퇴계 이황(李滉)·남명 조식(曺植). 대곡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73년(선조 6)에 동강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퇴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그의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先生諱逑字道可號寒岡淸州人祖應祥學於寒暄寒暄愛其志行歸以女生子曰思中卽先生之考也娶星州李氏生先生于嘉靖癸卯生有異質英睿秀發見者稱以神童七八歲受大學論語通大義稍長執贄於吳德溪健受易乾坤二卦以類而通無異夙慣嘗選鄕解不赴會試遂棄科業以古聖賢自期慨然有復古之志博考經傳抄定四儀且稽深衣欄杉籩豆篚爵古制用之於家鄕閭從化焉往尋退陶南冥大谷三先生問業

俱心許之萬曆癸酉薦拜禮賓參奉不就戊寅銓曹請敍六品連授司圃主簿三嘉義興知禮縣監皆辭庚辰拜昌寧始赴召宣廟親見問曰爾師李滉曺植乎且問二人氣象學問對曰李滉德器宏厚踐履篤實曺植器局峻整才氣豪邁因論大學工程曰三綱八條無非修己治人之方而天德王道在謹獨嘉納之下車以正業興學倣家塾之制設書齋置訓長日課敎讀坐明倫堂引諸生討論春秋釋奠以至社稷城隍厲祭無不躬莅行鄕飮鄕社養老禮一邑風勵吏畏民懷辛巳以持平徵昌人立生祠祀之壬午拜軍資判官稱疾去癸未卜築於檜淵蒔梅竹號百梅園聚鄕友門徒月朔講會激勸奬進成就者多拜忠淸江原兩道都事刑工戶三曹郞皆辭甲申特授同福縣敦論遣之其所施設如昌丙戌拜咸安凡遇水旱必躬禱靡不驗應昌寧有父子疑訟方伯使先生治之訟者首服父子乃定戊子卽閑于百梅園辛卯拜通川壬辰大駕西狩先生仗義討賊傳檄列郡宣廟母兄河陵君繼死於窮山中先生聞而痛之設機捕賊尋屍手自殮之聞于行在所上深加傷感命陞通政拜江陵府使甲午入爲同副承旨上方講易問晦庵遇遯焚稿曰此疏若入宋其庶幾而反遇遯封占筮之道不可謂天下之至神而朱子之心決於卜筮何也對曰若使宋寧一見封事便黜侂胄則其筮必不遇遯此占筮之所以至神也上復問程傳本義何先對曰易之道明乎消息盈虛之理進退語默之機不失乎時中也占候易之末也程傳宜先丙申拜江原監司築鴒原山城爲關東堡障丁酉拜成川秋倭寇再逞諮宮嬪王子咸聚于成川先生致敬禮供接有道特陞嘉善庚子瓜歸懿仁王后薨先生奔赴上疏論山陵事歷刑參觀象提調拜寧越郡守未赴留校正廳官俄拜忠州牧又被召於校正先生仲氏西川公病谻先生不離側親劑藥餌及卒自初終至卒哭庶事必自經紀不使虧憾癸卯退還故里除海光洪三州工曹參判皆辭丙午拜安東引法辭之不許至府有一寺奴托權相家撗[주:橫]恣先生鞠治不撓一境稱賀戊申宣祖昇遐先生拜大司憲三司請置臨海于法先生連章救之略曰殿下同氣之中與之同胎者秪有臨海殿下至懷有所不忍獄不必盡究人不必盡問罪不必盡核法不必盡施乞免者四乃遞夏拜刑參會哭國葬時人目以爲護逆累辭乞罷癸丑獄起辭連永昌大君上延慈殿先生封疏極陳擧周景王時佞夫事據春秋三傳證之曰父子大恩與天無極母子至情所當自盡深思古聖人烝烝之義謂天下無不是底而無變於前日之所以事之者言甚切直疏將上先生之子樟在都下恐先生得罪止之先生聞之更爲封事竝進前疏戊午廢母之議已決先生復草疏會聞光海有鄭某首倡全恩掠取美名之言不果進庚申寢疾而終年七十八前歲伽倻山崩卒之朝泗上木稼人謂之徵贈吏曹判書諡文䅣州之士子立書院以祀之先生少喪所怙事母夫人養志爲孝伯氏早卒仲氏出繼權攝宗事虔誠不怠奉寡嫂于家以事親之禮事之內外姪甥無間己出當其盛年抱負甚大宇宙間事無不以爲己責旁通曲暢淹貫殆遍算數兵陣醫藥風水俱曉源委爲文章亦宗晦庵蘊蓄旣宏充養又深戊申以後晦塞極矣免於辜幸矣先生所著有心經發揮冠儀婚儀葬儀禊儀五先生禮說羹墻錄聖賢風範古今忠謨洙泗言仁錄五服沿革圖深衣制度武夷志谷山洞庵志臥龍志歷代紀年古文會粹景賢續錄藏于家[주:海東名臣錄]

 

0 第二 忘憂堂 郭先生 당시 56 세 거주지 함안

0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동강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 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졸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사후 그의 사우(祠宇)에‘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公諱再祐字季綏玄風人監司越之子越有五子公居第三病革以章服遺公曰世吾業者心汝也公天性孝友器宇宏遠豪俠好義識周庶務少從南冥先生學南冥妻以外孫女越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女色人服其操後越奉使朝京公從之相者異之曰必爲大人名滿天下公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參庭試第二名下帷明經人莫之先丁外憂喪祭盡禮有愛妾病重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服闋遂棄擧子業箬笠芒鞋漁釣自娛爲終老計年四十餘布衣窮居隣有美女其父母愛之常言不以與凡子必以爲宰相妾公曰若欲爲宰相妾與我其人奇其言而許之壬辰之亂杖劍首起以報國討賊告家廟屛妻孥

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宜寧之倉粟取草溪之軍器逋將潰卒俱收幷用設施號令雷厲風飛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湖南直抵鼎津公乃置壘伏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挺身先之賊砲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巡察使金晬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大怒以叛逆論啓令軍官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晬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彝之良心可也辭嚴義正人皆傳誦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問於學諭朴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乃是忠孝底人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其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故有此擧也誠一色變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

命遂反覆馳啓曰郭某性質朴而無文鄕曲以孝行稱之變生之初散家財以募士其妻諫曰奈何爲此浪死計再祐大怒拔劍欲斬之妻子衣服亦給戰士之妻自是一向擊賊不問賊之衆寡必先登馳突戰士勇氣百倍無不一當百馳馬掠陣往來倏忽或於馬上擊鼓徐行以爲行軍節度或令人吹笛鳴笳或山藪中吹角鼓譟或處處設伏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或逐倭船臨岸追射無日不戰戰必獲勝斬馘之多最於諸將射殪者不知其數賊亦謂之紅衣天降將軍不敢登岸作賊宜寧三嘉兩邑人民皆安業力農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城至今保存上嘉之命賞齎疏人特賜溫諭李公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須似郭汾陽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賊望風而走江右湖南賴以得完時金將軍德齡在湖南貽書曰將軍壯猷聞之已熟將軍氣槪仰之亦久身作長城控扼喉吭使江淮以西終始保障重恢盛業想必第一於凌煙德齡以耕鑿餘生半世篷蒿春宮召見駐次賜印給馬大朝又遣近侍加號撫軍無功被遇誰與我比夙夜憂懼身在春氷將軍挺不群之才智抱經世之韜略前後交鋒有勝而無敗德齡之倚以濟事者非將

軍而誰歟古人有言曰附驥尾則涉千里攀鴻翮則翔四海正謂鄙人之於將軍也公答書曰將軍以戡定之才奮爲國之忠擧事於板蕩之餘而戴髮含齒者莫不聞風抃躍以爲賊可掃淸國可中興則天心之悔禍而默佑者亶其然乎再祐自聞將軍之威聲喜不能寐曾是不意遠承辱書奉讀再三感懼交極將軍有神出鬼沒之智旋乾轉坤之力三箭天山不足定也一擧興邦分內事也而不鄙夷庸人至於專致盛示好問之誠出於尋常不敢當不敢當再祐旣乏智慮可以仰裨於妙計之筌蹄又無技勇可以追隨於電擊之後塵則其於厚望安敢有補於萬一乎所祝愛惜時日命促鵬程一掃兇醜再造王室而使吾東君民更躋於壽域則如再祐無用之身亦得以退老於昔日之所釣遊而一生之志願畢矣金將軍又以書報之◑公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守昌寧火旺山城公弟再祉之奴犯門禁斬之孼族尹生之弟望不入城公使尹生及其季甲督還之不肯竝斬之積薪於舍館以示死守一軍服慄賊旣薄城公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

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列鎭皆潰體察使完平李公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會公繼母許氏病卒於城中公以喪去入蔚珍持服杜門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欲繕島山城爲必守地朝廷不許公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巖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穀拜善山安東仁同慶州尙州皆不就戊申拜本道左兵使己酉拜右兵使統制使皆不就庚申上京爲副摠管就職爲左尹咸鏡監司癸丑拜全羅兵使皆不就從仕京中惟食松葉而已後辭連逆獄得釋而歸就鷲山滄巖爲棲息地扁以忘憂永謝煙火作詩曰朋友憐吾絶火煙共成衡宇洛江邊無飢只在啗松葉不渴猶憑飮玉泉守靜彈琴心澹澹杜牕調息意淵淵百年盡過亡羊後笑我還應稱我僊善山人朴承旨守弘光海時未第嘗往訪之公曰將欲何往曰赴擧而歸耳公曰此時何用赴擧因設酌飮四五杯俄而曰爲酒所惱氣甚不平命取器來傾耳而瀉之酒從耳孔盡出亦異矣哉公患脹旣久子弟始覺之問曰何不早言使施鍼劑也公曰痼疾難醫死生有命余症非藥餌所治徒重汝輩憂故不言耳卒年六十六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贈諡忠翼立祠賜額[주:海東名臣錄]

 

0 第三 副摠管 朴公 당시 56 세 당시 함안군수.

0박충후(朴忠後) 1552년(명종7)~1611년(광해3)

본관은 순천, 자는 경술,

소격서 참봉 계창의 아들, 취금헌 박팽년의 5대손.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진왜란때

창의한 공으로 원종공신이 되고 1594년(선조27)무과에 급제

하여 1596년 통정에 오르고, 1605년 함안군수로 나갔다.

함안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가선대부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묘갈을 樂齋 徐思遠이 撰하다. * 장달수 첨록

 

公諱忠後字景述順天人昭格署參奉諱繼昌之子五世祖諱彭年號翠琴軒以刑曹參判節死於端宗朝世所謂大臣之一也南秋江孝溫爲之立傳公生於嘉靖壬子儀容端正才能出天奉先思孝待人以誠始以蔭補繕工監役未幾作宰咸昌吏懷民安中丁辰巳亂倡義募兵遮前截後多所捕獲錄原從勳甲午登武科丙申陞通政二十六年天使徐給事觀瀾陳御史效及諸天將相繼南下公迎勞甚勤館待以禮且輸米豆供饋將士天使嘉歎不已命館伴李好閔題名以贈五峯且留詩偈曰朴氏忠賢後河濱舜所陶從今天下士談勝數江皐用是朝廷特陞嘉善乙巳出守咸安政成郡人立石以頌旣而復入爲五衛都摠府副摠管辛亥卒享年六十[주:徐樂齋思遠撰碣]

 

 

詩○五言律

 

 

萬曆二十六年十二月十七日。欽差東征徐給事觀瀾,陳御史效,梁按察祖齡,丁主事應泰,給事接伴申點,御史接伴李某,布政接伴尹國馨,王事接伴白惟咸,御史接伴從事蘇光震相從過大丘河濱朴忠後莊。朴君迎勞甚勤。相與題名如右。

 

 

朴氏忠賢後。河濱舜所陶。今朝繡衣過。是處里門高。水繞開林館。山回隱節旄。從今天下士。談勝數江皐。(五峯先生集)

 

 

0 第四 旅軒張先生 당시 54 세

0 장현광(張顯光)1554(명종 9)∼1637(인조 15).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 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때〈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선조 9) 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란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하였고 이듬해 2월 또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가다가 바로 방면되었다.

1598년 봄 봉화 도심촌에서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 수암 유진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다음해 선산 월파촌으로 돌아옴)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읍민이 세운 가사비에 이르기를

맑은 것은 얼음 만 한 것이 없고,

깨끗하기로는 옥 만 한 것이 없으니

아! 선생께서는

얼음과 같이 맑으시며, 구슬과 같이 깨끗 하시 도다.

則曰, 莫淸者氷, 莫潔者玉, 於乎先生 氷淸玉潔,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하여 사은하였고 계속하여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졸하였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선생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 있어서는

퇴계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는데,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하여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하였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또 사단(四端)이 칠정(七情)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하여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설(文說)」에서는 글이 육경을 중심으로 한 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노인사업(老人事業)」 등에서는 노인은 기력이 소모되었으므로 시청·언동·동작·좌와(坐臥)에 있어서 조심할 것 등 노인이 평소 가져야 할 점을 설명하였다. 「서원설(書院說)」은 서원의 의의와 연혁 그리고 향제 등 그 소임을 밝힌 것, 「여헌설(旅軒說)」은 자호의 뜻과 풀이,「피대설(皮代 巾說)」은 어릴때 삼재(三才)의 이치와 우주인물 등의 제목을 적은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피대(皮代 巾)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 사실, 「동진설(同塵說)」에서는 은사의 행동거지 따위를 설명하였다.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천하의 도에 반드시 경위와 표리가 있듯이 문무도 그와 같은 것으로 문(文)이 경(經)·리(裏), 무(武)가 위(緯)·표(表)가 되어 일체라고 강조, 그 둘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무를 경시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볼때 주목되는 주장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先生諱 顯光 字 德晦 號 旅軒 玉山 人高麗 三重大匡 金 用 之後 贈 吏曹判書 諱 烈之子 嘉靖甲寅生于 仁同 之仁義坊

南山 奮第是日紫氣滿庭人 皆異之 九歲以 母夫人命就學于

善山 盧上舍守諴上舍 卽先生長姊兄也 一日 鄭新堂 子 愨 至其家見先生歎曰平生未嘗見如此佳器因曰吾何以贈之上舍戲曰苟欲相贈雖 乘馬亦可矣鄭歸卽脫送先生謝還之十二三歲日有 成就之益先生以慈闈無子弟侍側且爲學惟在自力 歸家侍奉不復就師早喜性理大全反覆玩索有所契 悟嘗作十帖子一曰會眞二曰一原三曰俯仰四曰中 立五曰傳統六曰載道七曰景慕入曰旁搜九曰遠取 十曰反躬書其末曰能做天下第一事業方爲天下第一人物名其帖曰宇宙要括蓋渾淪無眹之原太極動 靜二氣五行四時造化鬼神之妙性情道德 三綱 五常 禮樂敎化之毅 堯舜 禹 湯 文 武 周 孔 顏 曾 思 孟 有宋群 哲相傳之統三墳八索九丘 五經 河圖洛書八卦九疇 先天後天之學純臣忠臣義士隱逸人傑文人之類道 家法家佛家僊家陰陽術數 老 莊 楊墨之流天覆地載 山高海深和風時雨秋月寒水嚴霜轟雷生龍活虎松柏金玉之取象謹言敏行日乾夕惕靜存動察博文約禮之要法無不具括幷包於十帖之中于時先生年甫 十八而其體段之宏博已如此癸酉始冠二十三以才行卓異被薦己卯聘 西原 鄭氏寒岡 先生之從女許知 樞潛嘗牧 星州 問 寒岡 以好學之士曰 孔 門三千惟 顏 子 得好學之稱此豈易得哉近有張某志學求道德性 純熟異日爲吾師者未必非此人也甲午除 參奉 不赴 乙未特拜 報恩 縣監 門人 鄭四震 問出處道答曰出處 之義蓋不可以執一論也不仕無義矣而學未優則不可出也學已優而時不可則不可出也時則可而禮未 至則不可出也冒進非義矣而時雖不可禮已至則可以出也學雖未優親已老則可以出也貧無以自存則 可以出也夫冒進者不足道也而不仕有一不可一可恥者徒知潔身之爲高不知君臣之大義一切無意於仕進者是所謂一不可也中無自守之實外假自重之 迹要以耀其名高其價者是所謂一可恥也大抵仕學 非二道隨時應之道在其中要在不失其義而已九月 赴任季冬棄歸邑民遮留不得立石以寓思癸卯拜義 城一以治 報恩 者治之有 日省錄 纔三閱月失文廟位 版自劾而歸士民又立去思碑 光海 朝十餘年尤無當 世之念 鄭先生 爲群小擠陷棲遑洛泗間先生從之遊磨礱道義有充然自得之樂 仁廟改玉轉拜 持平 掌令皆辭甲子有逆适變大駕南遷未幾還都先生作奔問行至郊外受本職詣 闕肅謝卽引見天顏溫粹喜動彩眉曰聞名久矣日望上來與共國事而屢召不至反躬自責今來造朝予心甚喜對曰累恩稽謝負罪如山今遭無前之變不敢自安於家扶病奔赴未及行 在 鑾輿已回纔到近甸新除荐降一味惶隕無地自容 上曰願見之誠 副提學 鄭經世 知之矣仍咨以國 事先生對曰田野老臣何知國家事宜惟先定大機軸 則多少節目自是措置中所爲耳 上曰何謂大機軸 對曰是在 殿下之一心惟奮發振作日新其心則必 有其效 上嘉之歷 吏議 刑參 移授 大憲 因辭疏進建極之要 甲戌除工判 乙亥拜參贊 每有召旨輒上章 懇遞前後陳達無非格言至論 上多優答丁丑卒享 年八十四前夕有雷雨山崩之異訃聞 上震悼爲之 不御朝停市二日及葬遣官 賜祭歲壬午士林請于 朝配享于臨皐從祀于川谷後又竝享于金烏其別廟 則 仁同 之不知巖永川之 立巖 也影幀有三卽門人金 斯文應祖嘗倅 善山 爲倩 畫師 寫眞傳神者也分妥于 二巖及 善山 之元堂 孝宗 乙未特贈 領議政 諡 文康 先生之學不由常師得之妙契根柢乎四子歸宿乎六 經年益高德益邵而猶以耄倦爲戒易古文庸學周子通書太極圖說伊川好學論明道定性書張子東西銘 邵子無名公傳等書中夜默誦循環不輟日必有課又 將書之危微精一易之敬直義方 中庸 之戒愼恐懼大 學之克明顧諟丹書之敬勝怠吉義勝欲從等語書諸 壁間以自循省爲文章汪洋大肆自成一家理達意暢 人皆易曉絶不爲浮藻虛誕文字至於撰述之際亦必 屛人雖一家子弟不知其爲何事業練祥之後始啓篋 笥則乃性理諸說也 趙徵君任道 歎曰出入門墻許多 年矣今日始見先生之海莊也 柳修 巖袗亦嘗語人曰 先生之所不可及者其惟人之所不見乎先生所簒述有易學圖說圖書發揮易卦總說經緯說太極說晩學 要會宇宙說及文集略干卷行于世 [주: 李判書元楨 撰狀 ]

 

0 第五 獨村 李公 당시 70세 거주지 함안

0 이길(李佶)1538년(중종33)

본관은 성산, 자는 여한, 호는 독촌(獨村).

판중추부사 정무공 호성의 현손.

갈천 임훈, 첨모당 임예의 생질. 형제간 우애가 각별했다.

 

公諱佶字汝閑號獨村星山人判中樞諡靖武公好誠之玄孫林葛川薰瞻慕堂芸兩先生乃其伯仲舅也公早學爲詩平淡雅麗累捷鄕解而不中與兄篁谷稱相友愛事之如父公年六十三而篁谷歿衰年失伯悲痛不已鄕里稱之幽居卽事吟曰劍水潺湲日夜鳴前流不息後流生病夫倚杖溪頭立物外襟懷一樣淸[주:金羅傳信錄]

 

 

0 第六 鵲溪 成公 당시 65 세 거주지 함안

0 성경침(成景琛)1543년(중종38)

본관은 창령, 자는 중진, 호는 작계, 자암

정언 수린의 증손, 군수 준의 아들

公諱景琛字仲珍號鵲溪又紫庵昌寧人正言壽璘之曾孫文郡守諱遵之子也公早事翰墨屢中鄕解命與仇謀竟未遂志沒於溝壑爲人醇厚質勝樂易多恕人皆愛慕豈非古之人也[주:金羅傳信錄]

 

0 第七 聞巖 辛公 당시 59 세 거주지 靈山

0 신초(辛礎)1549년(명종4)~1618년(광해10)

본관은 영산, 자는 지수. 호는 문암 용궁현감 희수의 제5자.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의병 부장을 삼았다.

여헌 선생께서 흉중에 촌철을 지닌 절조 인이라 하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위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후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암집》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公諱礎字支叟靈山人高麗平章事鏡之後典工判書斯蕆之八世孫也判書公當勝國末死於節有女幷命事載三綱行實鄕人立廟以祀考諱希壽龍宮縣監縣監公有七男才略俱過人公於序爲第五幼有異質不

凡兒比及長氣宇峻潔人皆敬憚性至孝事親承順無違行父母宜之癸未尼胡之役七弟被選當西赴公曰季也口尙乳臭安能當巨醜遂挺身請代從元師大捷而歸自是從事弓馬穆陵乙酉占武科非其志也辛卯使臣黃允吉還自日本爲言明年倭奴必至朝廷憂難凡列堡諸將特選忠勇者壬辰春除天城萬戶未數月平秀吉大擧入寇衆號四十萬蔽海而至公知兵殘不能支亟入金海城則賊兵四圍城且陷矣時平山守朴震英陝川守李潚同在陣中公顧謂二人曰賊勢如此不若向江左募義討賊或可少酬國恩奮劍潰圍而出賊兵披靡不敢害纔到蔑浦追兵在背江水大漲無船不可渡朴在前高聲曰事急矣奈何公怒叱曰不聞憑河語乎此江吾輩死所也齊聲躍入水迅馬不濟公抽刀斷韉李朴亦效之俄而馬與人俱利涉李朴稱謝不已蔑浦實公先祖典工公殉義處而公又決死蹈水視之如齋閣人皆曰是祖是孫也時郭忘憂公起兵苞山爲嶺左義兵大將拒守鼎津公卽赴陣下與之戮力共事凡所籌畫出人意表郭公大奇之癸巳除玄風縣監縣當賊路要衝官舍盡爲灰燹公旣赴任設牙于王旨論谷之間方便爲政不以干戈搶攘擾民惟一意兵籌乘機勦賊蓋是時國家昇平已久人不知兵猝然遇寇莫不恇怯失措無一人出一氣殪一賊者而殲討之功獨玄風爲最諸陣倚以爲重武人禹治洪鷲城人有膽略善射獲鶴峯金文忠公時爲招諭使聞其名特差義兵副將諭之曰你必輕生勇戰當如辛某有兇孼孔好謙者提兵投倭爲賊向導僞稱慶尙監司屯據靈山縣四出剽掠郭公欲祕捕檻首而無善算公少嘗受業於好謙之父好謙與公舊故不甚猜公以玄風守請謁郭公願募力士數人隨之乘款段弊衣求見好謙盛兵衛拒之公曰吾以故誼來不意待之如刺客好謙聞之趁令導八款遇如平素命酒共傾公曾諳好謙嗜酒佩元酒一大壺密置綿絮於衣衽中仍請無算酌公則引滿暗注於絮好謙先已倒矣促出所齎酒勸飮公知好謙酩酊無所省呼門外力士俘之擔舁而出好謙行到通峴酒已醒遽呼曰爾學吾父而薄於吾何歟公答曰你爲吾師賊子欲得你首歸報吾師於泉下遂直入火旺城斬之翌年戊戌難靖仍又瓜熟而歸癸卯秋守寶城甲辰冬解歸甫一年虐墨屛跡殘赤輸心在官無絲毫犯往往捐俸以周窮餓者及歸行李蕭然不知爲使君行也嘗檢裝見繭絮在橐驚曰吾已蔽齎此何爲卽返之馬卒携一鞭倂令推還邑人以爲異事掛之梅閣壁上歲久而蠹則仍摹畫所掛處傳之爲太守鞭記在本郡輿地誌又有遺碣自此絶意仕宦嘯遊山水間以自娛時從當世之有德學名行者訪問推先於世事泊如也寒岡旅軒兩先生雅重公每遇淑景勝踐輒邀公相款嘗泛舟龍山下顧謂在座曰辛君武中君子也旅軒亦曰此人胸中有一寸鐵其節操人所不及愛聞巖之勝儗結數楹爲終老計未克就遺書付子孫勖以肯搆蓋遇光海時也萬曆戊午卒享年七十[주:鄭橫溪葵陽撰狀]

 

 

0 第八 立巖 趙公 당시 59 세 거주지 함안

0 조 식(趙埴)1549년(명종4)~1607년(선조40)

본관은 함안, 자는 극성, 호는 입암.

생육신 증 이조참판 조려(趙旅)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형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정언(庭彦)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만호 (萬戶) 희조(希祖)의 딸이다.

아들이 여헌의 고제인 간송당 임도이다

 

公諱埴字克成號立巖咸安人高麗元尹丹碩之後贈吏曹參判漁溪處士諱旅之玄孫也生而質美容貌異凡眞純和粹之氣達於面目朴實疏雅之風著於色笑中心易直自無矯僞沖澹寡欲沈默少言居家事親深得父母歡心年九歲始就學受中庸小學等書已曉大義比壯專治語孟旁達群書又能作字筆精端妙不幸傷於喪患未克大肆力於此業壬申失賢配庚辰喪英孩大損精神辛巳遭大喪柴毀益甚百日之前只以糜飮潤喉面如槀木而未嘗以羸病廢禮返魂之後結廬墓下與昆季迭守身不釋絰帶足不及私室外除之初餘哀彌切不復寢斷酒肉者久而拘於大夫人不敢踰制終養偏親愛日誠至了不離側丙戌丁憂愼終哀慕之篤一如前喪寒岡先生時爲郡宰亦聞香而嘉歎云自是不復留意世事惟思豐潔享祀以盡餘誠頤養性情以遣餘生築溪莊蒔梅竹爲終老之計嘗自詠懷曰身閑無事臥溪亭笑殺區區世上名好把釣竿臨水早每逢樽酒擧杯輕籬邊疏竹叢叢碧巖下長流曲曲淸無物到心魂自爽剩看新月透牕明觀於詩足想其平生矣辰巳之亂舊業零落流離困苦於十年之間而夷考其心則只是一箇休休與平時無別其有以自守而不受變於窮厄如此內實腴而隱淪不耀則命也金承旨槃泉公送詩曰我愛趙夫子休休長者風別來思表範耿耿此心中萬曆丁未卒享年五十九[주:趙澗松任道撰碣]

 

0 第九 葛村 李公 당시 58세 거주지 함안

0 이숙(李潚) 1550년(명종5)~1615(광해군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징(汝澄), 호는 갈촌(葛村)다.

1576년 (선조 9)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중형(仲兄) 서촌공(叙村公) 정(瀞)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마하고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이 본군(本郡)에 부임하여 생도를 모으므로 선생도 거기에서 배웠다.

1591년(선조 24)에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列郡이 파궤(破潰)됨에 주장인 김해(金海) 부사가 도망하고 없는지라 그 곳에서 죽기보다는 의병을 모아 보국(報國)함이 좋겠다고 여겨 창의(倡義)하였다. 그때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겁을 내어 출전을 기피하였으므로 곽망우(郭忘憂) 장군(將軍)이 그의 죄를 성토하려는데 감사는 망우장군을 토적이라 무고하려는 즈음이었다. 이에 공이 방백과 곽장군에게 강화(講和)를 시키고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峯) 선생(先生)의 막하에 있으면서 방략(方略)을 협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사퇴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합천군수(陜川郡守) 재임시에는 정인홍(鄭仁弘) 가족이 세력을 믿고 세금을 포탈하거늘 공이 조금도 가차없이 옥에 가두고 매질하여 모조리 징수하기도 하였다.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곽망우당(郭忘憂堂) 제현과 함께 교유가 두터웠으며, 졸후(卒後)에 도계사(道溪祠)에 이양졸 복휴(李養拙 休復), 박광서 진영(朴匡西 震英), 조도곡 익도(趙道谷 益道)와 함께 병향(幷享)되었다

 

公諱潚字汝澄載寧人兵曹參知仲賢之曾孫縣監贈參判諱景成之子也自在齠齕志氣俊邁投筆奮起武藝獨步萬曆丙子登謁聖副壯元蓋入城放矢之時所着冠帶團領解脫礙於弓弦初發未中適有一禮官自撫其膺而目之公乃悟收領結解然後發無不中而以初矢失的竟居亞時論惜之歲在龍蛇倭冠猝至公以靈山縣監招在方伯幕府慨然以仗節討賊爲事而主將彷徨公常憤菀時公之仲兄淸州公與鶴峯金先生在晉陽城郭忘憂堂亦倡義駐陣宜寧界矣公欲與仲兄及金鶴峯相議捍禦之策日夜馳突將往晉營歷訪郭將于新反縣公於郭將素善郭將執手而言曰公之主將身爲藩臣無意討賊逗遛轉避使賊如入無人之境不覺寒心吾方馳檄起兵以洩輿憤公適來斯可免此難豈非幸歟公曰噫公之此言實激於忠赤而發也然我之主將乃王命道臣公不過一箇寒士而無王命自相攻擊恐有蓄疑口舌之禍不利於公且兩虎共鬪其勢不俱生則彼長驅賊勢孰能捍禦吾當以此意歸告主將竭誠討賊以贖旣往之罪乃馳去晉陽謁仲兄及金先生卽旋方伯營俱以言告仍與二三褊裨協謀盡忠多斬賊首稍振士氣而斬賊之功全歸主將故爵賞無及後知陝川郡事未幾罷還公性剛直不苟見人之奔走乞憐於形勢之途者則若將浼焉不肯對立旣與時違且忤權貴才抱干城終不大用可勝歎哉[주:家乘]

 

0 第十 沃村 盧公 당시 55 세 거주지 창령

0 노극홍(盧克弘)1553년(명종8)~

본관은 光州, 자는 의보, 호는 옥촌.

대사간 선경의 현손, 한강 정구의 생질.

곽 망우당이 화왕산성을 지킬때 보좌했다.

왜란이 끝 난후 전원에 돌아와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公諱克弘字毅甫號沃村光州人司諫諱善卿之玄孫

寒岡鄭先生之甥姪也出入門墻陪遊杖屨旣是親切而其薰陶見聞之益爲世所推忘憂堂郭公守火旺時公掌簿書之責參贊機宜圖存危□而及郭公遭艱歸後慰撫士衆指層巒誓死作詩[주:詩曰火旺山頭火旺城一般意氣與崢嶸睢陽力戰君知否自古□□有舍生]亂平退守田廬前後徵辟皆不就[주:家乘] 옥촌 선생문집 2권이 있음

 

0 第十一 永慕堂 辛公 당시 52세 거주지 영산

0 신방집(辛邦楫)1556(명종 11)∼1592(선조 2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제(汝濟), 호는 영모당(永慕堂).

첨지중추부사 태(泰)의 아들이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식과 서예가 뛰어났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안의(成安義)·곽찬(郭趲)·조열(曺悅) 등과 함께 창의하고는 영산(靈山)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그해 8월 창녕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 방주(邦柱)와 동생 방로(邦櫓)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 지르고 도망갔다. * 연려실기술에서,

 

公諱邦楫字汝濟號永慕堂靈山人麗朝典工判書斯蕆之六世孫護軍諱泰之子也公能於文鳴以筆早執脩禮於寒岡鄭先生之門所取友幾一代名流一日先生以日用無餘功相看俱努力爲題使諸子分韻賦詩

要觀其志公得餘字其詩曰函丈從容講古書硏精終日儼齋居吾知聖域從茲入問學須勤孝悌餘載李淸暉堂承師友錄中萬曆辛卯司馬明年倭寇猝至公奉親避亂于宜寧闍窟山時招諭使鶴峯金先生辟公爲召募官適以色憂非細力辭不就有上書請獻方略之事而文字失於兵燹不得傳焉惜哉[주:瑣聞]

 

0 第十二 斗巖 趙公 당시 51 세 거주지 함안

0 조방(趙垹) 1557(명종 12)∼1638(인조16)

본관은 함안(咸安). 함안 출생.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 반구정(伴鷗亭).

입암 조식의 동생이며 간송당 임도의 숙부이다.

황곡(篁谷) 이칭(李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 독촌 이길(李佶)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퇴계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깊이 연구하여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월천 조목(趙穆)· 겸암 유운룡(柳雲龍)·우복 정경세(鄭經世)· 대암(大菴) 박성(朴惺) 등과 교유를 맺고 도학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 망우당을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 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사림들이 그의 충의에 감복,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을 청하였다.

그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서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면서 산수의 자연을 자신의 은둔생활에 흡수시켜 회포를 풀었다.

1607년(선조 40) 초봄에 정한강, 장여헌 등 도내의 선비 35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던 일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龍華山下同泛錄〉이 전하고 있다.

충효사상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가훈팔잠 家訓八箴〉과 〈충효실감 忠孝實鑑〉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두암집》 3권이 있다.

 

公諱垹字克精號斗巖又伴鷗亭立巖之弟也公養親以孝執喪以禮壬丁倭亂與郭公再祐守火旺山城倡義却賊鄕黨服其忠孝嘗齊會公門欲陳聞以褒公適知之亟送家督奪其券卽投于火曰臣之爲國子之奉親自是人之常理何褒之有吾死後又或有如此者汝輩一切禁制毋貽地下之羞晩築精舍于洛江之斗巖扁以伴鷗以自樂焉嘗題一絶于壁上曰事親當盡孝爲國亦當忠嗟我俱無及江湖恨不窮郭公見而稱之曰曩時山城固知吾君忠義今又見其詩[주:趙氏言行錄]

○獨村李公題伴鷗亭詩曰白沙蒼壁繞庭除萬象森羅畫不如勝地待人寧久祕翦荊今日趙君居又曰納納乾坤一草亭長江渾浩更淸泠俯看金鯽翻波躍仰見風鳶接漢撗[주:橫]肯向名場遭語穽寧藏林壑避心兵白鷗爲伴忘機事閑對花壇臥月明[주:金羅傳信錄]

◑守火旺山城時愚伏鄭先生經世以詩贈

之曰愛君風度出於類留意斯文積力深挈子依山知孝道投身守堞識忠心公和之曰城外腥塵漲滿地吾人憤氣晝宵深書生豈識兵間事都是愚狂一箇心又當丙亂聞三學士死於燕獄以詩哭之曰三人志節不畏死死亦何恨死於死死而能保千秋節崇禎乾坤死不死[주:家乘]

 

0 第十三 畏齋 李公 당시 50 세 거주지 영산

0 이후경(李厚慶)1558(명종 13)∼1630(인조 8)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이조판서 평정공 약동(約東)의 증손, 부호군 증 참판

엄(儼)의 아들이다.

한강 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벽오(碧梧)이시발(李時發),·동강(東岡)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한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외우라 하고 호를 불렀다.

여헌 선생, 박대암, 곽존재, 서낙재, 곽망우당, 이석담과 도의 지교를 맺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영산의 덕봉서원(德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이 있다.

 

先生諱厚慶字汝懋號畏齋碧珍人吏曹判書平靖公約東之四世孫副護軍贈參判諱儼之子也幼而穎悟九歲丁內艱執喪如成人旣冠聞寒岡鄭先生方講明陶山義理之學與其兄子道孜負笈從之受大學中庸諸性理書講論不怠鄭先生大加稱賞萬曆壬辰奉參判公避兵于江陵時鄭先生知是府擧亂稍定奉遷玄風參判公患苦痢先生嘗糞侍湯竟遭巨創雖流離顚沛之際喪葬祭奠一於禮不苟己亥始返鄕里六月闋制自是遂廢擧子業專心爲己之學李公時發按嶺南薦其行義于朝東岡金公爲天官左侍郞亦以先生爲薦前後除拜節次重沓先生見光海政亂不屑就焉庚申鄭先生易簀心喪三年癸亥仁祖改玉以遺逸首膺薦擢除昌樂郵丞李相國敬輿以繡衣廉上其治績陞調內贍寺直長丁卯扈駕江都十月出知陰城每月朔行望闕禮詣鄕校焚香謁聖引諸生講說經義其於社稷城隍等祀亦必親將不以年老而暫懈恤民隱有若痛瘝在己持身淸苦治事勤劇吏畏民懷闔境晏然適以槐山倅殺人事奉檄按獄忤當路者意罷歸庚午卒享年七十三以嘗有原從勞贈兵曹參議先生天資孝友其事親也溫淸之節甘旨之供克愼克誠岡或少愆日與伯仲兄及諸子姪出入娛侍油油翼翼非有故未嘗去其側死喪之威哀慼備至其祭祀也必七日戒三日齋處同氣間愛敬敦睦出於至誠性復剛直雖師門言行之間微有所疑於心者輒正言不諱鄭先生嘗曰子吾之畏友也仍命以畏字名其齋與旅軒張公大庵朴公存齋郭公樂齋徐公忘憂堂郭公石潭李公竝生一時相許爲道義交其所源源往來情若兄弟者郭朴數公爲最平居必正衣冠端坐凡出入作止動以禮法嘗病世之學者徒事擧業而不顧實行乃曰所以讀古人書者將以措諸行事也若但用之於詞章藻繪之間豈所謂爲己之學耶聖賢垂訓布在方冊若師法而慕效之縱不能皆爲聖賢獨不得爲吉人善士乎乃令子弟先習灑掃應對之節次及格致誠正之學循循有序先生以故家世族資產頗饒自經兵亂蕩析無餘至於簞瓢屢空衣不掩體處之晏如嘗謂其子曰吾少籍先蔭不免有芬華之習及喫此窮苦長得一格豈天故欲玉余于成耶汝等亦宜自勉勿以窮約之故怠於爲學也

[주:李葛庵玄逸撰狀]

 

0 第十四 敎授 羅公 당시 50 세 거주지 함안

0 나익남(羅翼南)1558년(명종13)~

본관은 나주, 자는 천기, 대구부사 맹례의 5대손

창석 이준의 형 월간(月磵). 이전(李㙉)의 문인

만년에 천거로 교수가 되었다.

 

公諱翼南字天紀錦城人大丘府使孟禮之五世孫也年十三受業於處士李㙉之門才藝早成旋廢科自晦晩薦爲儒學敎授而終[주:瑣聞

 

0 第十五 復齋 李公 당시 49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자(李道孜) 1559년(명종14) ~ 1642(인조20)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자는 지지(至之), 호는 복재(復齋)·

양심헌(養心軒), 증 참의 석경의 아들

21세에 숙부 외재(畏齋) 후경(厚慶)과 함께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 향시에 합격한 뒤 정시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589년 학명이 높아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회연당(檜淵堂)에서 심경을 강론하고 이듬해는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1593년 송암(松庵) 김면(金沔)의 진중에 나가서 위장(衛將)으로 활약하였다.

1600년 고령향시에 스승의 권유로 나가 장원하였고, 순찰사 이시규(李時揆)가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되었다. (행장 이갈암 찬)

 

 

公諱道孜字至之號復齋碧珍人平靖公約東之五世孫贈參議諱碩慶之子也嘉靖己未生于靈山治東溫井里第幼溫粹美容貌見者奇愛之少從塾師受句讀師冠從季父畏齋公執贄于寒岡鄭先生之門受大學或問及心經近思錄等書得聞君子爲學之要萬曆壬辰倭寇充斥公奉二親避亂江右時鋒鏑擾攘仍之以饑饉僵尸日相屬於道公能勞筋苦骨以供甘旨丁酉再亂公奉入于嶺東之江陵府去家千有餘里乃下從商販之役於沿海魚鰕之鄕以爲養公雖服賈在商舶中書冊不去手咿唔不絶口舟人漁子往往習其句讀己亥亂稍定奉還故土就縣西冷泉亭下結屋數椽列植花卉扁其堂曰養心軒養魚以供滫瀡愛日之誠老而彌篤及遭內外艱皆啜粥盧墓鄭先生易簀亦心喪三年壬午卒壽八十四蓋公質魯而志礭鄭先生嘗比之參也魯仍命以復字名其齋始公以親老故黽勉業程文旣屢擧不中第乃歎曰豈可捨己甜桃巡山覓酸梨爲年甫四十餘卽與之判決鄭先生問有父兄在如之何其專之公謝曰此親意也遂從先生於百梅泗水之間專以講明踐履爲事至今星山人或有以一時文會之盛題名記事被之屛障傳以爲儒林故事者公與畏齋恩則叔姪義實師友答問丈席之餘退而有交修共濟之益畏齋嘗目公爲畏友年老後猶熟讀小學書日有課程且曰吾平日非不從事是書猶未知其切已如此敎子弟必以是爲先每讀書或敎人至古人嘉言善行爲警省人處必爲之反復陳說使人有所觀感而興起焉故鄕塾之間因公開發者衆公於外物泊然無所好自經亂移家來家計益落落而閑田曠土不曾分外營占雖貧困憂戚日至交攻未嘗有憂歎之色事有不如意者輒曰有命存焉每以論語不知命無以爲君子者爲安身立命之所而草屋三間蕭灑絶塵書冊衣衾齊整有常處日晨興盥櫛終日靜坐看書客至則呼童命酌盡醉而後已每遇花辰月夕又使子弟或賦詩或詠歌或以黃冠野服採山釣水要以自適其適性好佳山水每尋幽選勝沿洄上下忻然樂而忘返玉川水石洛江臺亭無非杖屨經履之處襟懷飄灑超然有出塵之想李公時發按節本道聞公以行義著稱每行縣必延禮焉後嘗以孝廉高第薦聞于朝而士大夫東西行過其廬者莫不傾心高仰之及聞其歿皆齎咨涕洟曰善人亡矣山阿寂矣

[주:葛庵李玄逸撰狀]

 

0 第十六 生員 兪公 당시 43 세 거주지 영산

0 유해(兪諧)1565년(명종20)~1612년(광해4)

본관은 탐진, 자는 흠재. 보문각 제학 보의 후손

처사 종백의 아들.

선조(宣祖) 38년 (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公諱諧字欽哉耽津人高麗寶文提學寶之後生員中立之四世孫也考諱宗伯才行卓越風度粹發不幸早世而未顯公生於嘉靖乙丑少孤而自能盡於送終之禮哭泣之哀祭祀之誠見者無不矜賞奉慈夫人極其色養亂離顚沛之間猶無憾於供奉喪葬終始以禮之斯亦人所難也幼被長姊兪氏引物之誨兪氏卽三綱所載節婦孺人也公因心則友愛敬備至兪氏亦性旣端肅學通大義觸事輒誨無不剴切一夕公自外至曰久旱不雨苗則槀矣引水霑之忽有生意水之大於苗如是夫兪氏泫然泣下曰父亡母寡又無親黨零丁一家惟我二人冀汝成立庶幾無忝年旣稍長未志於學已知稼穡之寶似有喜色之動將欲爲田舍翁乎噫吾家自此已矣公卽相對下淚慨然發憤輒辭慈夫人及姊氏前負笈入山不息晝夜自是每歲十二月晦日下山還覲正月初二日卽入山以爲常工程久篤文華大發及入場屋援筆立就傍有請救者則雖於五六人猶滾滾不絶或捷三場或冠一榜聲譽日彰咸期遠到而命舛運奇每失南省萬曆乙巳始入格生員試二等乃歎曰嗟吾平生陞第於大庭之對而終見還降如流於經科之講而一步必躓者非一再今過四十始得小名天意不難知也吾何求分外而徒自勞乎於是遂撤擧業專意頤養而愛人好學乃其素性敎誨猶勤遠近坌集叩其兩端必盡餘蘊故雖在愚懵易於成就飮河充腹橐來囷歸門下之生進入格者甚多登第者至五六往來質問而成名者又不知其幾此亦足爲成美之一事也公鍾德眞淳制行平恕坦率含弘不以事物經心友于內敦信義外著樂道人之美善惡稱人之過失故人無賢不肖皆服其有量而寒岡鄭先生每稱之爲君子人一生安貧簞食屢空而未嘗憂於中不以求於人怡怡休休若自有樂人亦不知其貧之甚也鄭先生之胤子樟以前縣監登科來過因與聯轡而訪友公之馬鞍以繩繫鐙續而復絶者再鄭公曰甚矣君之無資身策也公笑而答曰靑雲多識猶使吾若此吾之若此故人所慙於吾何有哉相與戲謔而罷於是乎可驗其安貧之有素也然客有來訪倒屣延接白酒淸醪隨得隨進微醺上面卽自浩歌誠心善言彰發色辭酒盡客去輒思發蒙倚几閉目口授經史不私於子不外於人各盡所課不錯一字壬辰之亂兪氏死於節公伏於林莽間瞯賊乍過得棺蒿葬然後始遠避公平生未嘗入官門于以私而兪氏夫家新奴爲其黨寸外使孫所奪公訟于官訢[訴]于方伯勞身竭力而還推定爲墓直監護棹楔每値其忌大設於家追慕嗚咽無異所生恩戒子亨吉曰姊氏於吾訓誨如嚴父撫育同慈母且其節義之高國人之所矜式後世之所歎賞豈可例享以班祔負吾誠於爾身哉爾其體之勿替壬子冬忽患髮際而卒享年四十八[주:兪慕谷亨吉撰狀]◑子亨吉字會甫號慕谷崇禎癸酉及第官至縣監親喪廬墓孝著鄕里扈駕南漢名垂勳籍高才懿行卓出一世而但不能與時脂韋沈於下僚惜哉[주:鄕誌]

 

0 第十七 梅竹軒 李公 당시 43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호(李明怘)1565년(명종20)~1624년(인조2)

본관은 성산, 자는 양초, 호는 매죽헌.

현감 황곡 이칭의 아들.

13세 때 진주 도회에서 직녀가 견우와 이별하라는 시제로 장원하다.

그 말구에 悤悤萬事說未了, 更期明年梧葉飄 하여 一時膾炙傳誦하다

 

公諱明怘字養初號梅竹軒星山人靖武公好誠之五世孫以遺逸官至縣監號篁谷諱稱之子也幼而喜讀八九歲有文譽筆法十三赴晉陽都會以代織女別牽牛詩居魁及長博求經旨潛心聖學不屑爲擧子業親歿後尤無榮進之意以仲父獨村公命黽勉暫屈于試仍占一小事而止天啓甲子卒享年六十趙澗松堂文以祭之曰公之性靜矣公之質醇矣生長法家學有淵源葛川遺風公蓋耳聞之矣篁谷彝訓公蓋面承之矣其文華之偉孝悌之懿豈無觀感而興哉才可以拾靑紫而止占司馬小名行可以範末俗而堇充長貳白鹿天之報施良善顧不嗇歟

 

0 第十八 滄浪叟 李公 당시 42 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유(李道由)1566년(명종21)~1650년(효종1)

본관은 벽진, 자는 명지(明之), 호는 창랑수(滄浪叟)

평정공 약동의 5세손 증 참의 석경의 아들, 복재 이도자의 동생. 숙부 외재 이후경과 형 이도자와 같이 한강 문하에 수학.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부인 탐진 안씨는 안음현감 우의 증손녀이다.

 

公諱道由字明之復齋之弟畏齋之姪少從叔伯遊寒岡門多有所觀感焉以大年秩通政雖在耄耋而若遇先忌則必致齋躬行以竭如在之誠己丑冬公寢疾已久先妣諱日奄臨乃曰明年此時老身存沒未可知也鷄鳴潔衣冠手自奉奠疾愈劇越四日而卒享年八十四公之夫人耽津安氏故安陰縣監遇之曾孫女大司諫魚公得江之外外孫也聰明才惠實有灌圃餘脈而星曆音律無不通曉儀容端正言語閑詳事舅姑主中饋宗族咸推一焉子曰涑以文行屢選鄕薦號寒泉[주:家乘]

 

第十九匡西朴公 당시 39세 거주지 함안

0 박진영(朴震英) 1569(선조 2)∼1641(인조 19)

본관은 밀양. 자는 실재(實哉), 호는 애서(厓西). 판서 오(旿)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쳤다.

1599년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된 뒤 10여년간 천거하는 자가 없어 제부(諸府)의 판관에 머무르다가 1613년(광해군 5) 경흥도호부사가 되어 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 1619년 순천군수를 지내면서 우영장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서도방어사로 도원수 장만(張晚)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였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원수부의 여러 장수 중에 오직 남이흥(南以興)·박진영· 유효걸(柳孝傑)뿐이라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신경원(辛景瑗)과 힘을 합하여 동교(東郊)에서 이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못하였다.

뒤에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가 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公諱震英字實哉密陽人縣監榴之曾孫贈判書號桐川諱旿之子也隆慶二年十一月十九日公生才識異等性豪擧有氣槪不肯屑屑爲名壬辰之亂與郡守柳崇仁募鄕兵伐賊義兵將郭再祐召公欲留之公謝曰旣與人約爲死生背之不可郭公心賢之不復言留時當大亂慨然以弓馬發身時二十六其年有父憂以列士起復從元帥幕府雖在戎間私則居處有禮府中賢之己亥爲龍宮縣監自此十五年間無薦引者官不過諸府判官癸丑爲慶興都護府使治行第一而時藩胡數叛我邊邑人口擄獲甚衆公悉以貨贖歸及瓜巡察使權縉召拜中軍仍上其功能陞折衝將軍己未爲順川郡守兼右營將贊畫使李時發巡行至郡閱兵有軍中士欲售其才能立發砲墮飛烏一軍大喜當賞公曰不可軍中聽於將無令發砲有軍法無軍賞贊畫使稱謝不果賞關西御史一人因恥過不快於公旣復命言不法欲黜之諫官金時讓曰臣知此人素以廉直見

嫉功多而官卑人心惜之其人慙無以言以治理仍任者二年爲海西道防禦使明年李适叛時大元帥晩軍平壤公往從之适聞之曰帥府諸將惟南以興朴震英柳孝傑數人而已爲間書言除君側之惡而封外書南以興柳孝傑及公以興方爲帥府中軍元帥知其爲間以公爲別將倚信之加甚元帥曰适所領精兵降倭數萬我兵不滿數千其勢不可當彼諸將士有不從者爲誰公曰李胤緖不死則必欲有爲也公得胤緖蒼頭過者一人諭以大義欲遺書遣之卽許諾以此具告元帥乃爲書言義不從賊旣署顧同列曰諸君何如皆相顧不肯惟以興孝傑二人從署胤緖已決死無他意見書卽與李愼柳舜懋李陰與謀夜三鼓皆應砲各以所領兵潰陣出者三千人胤緖詣軍門見元帥自言在賊中不殺賊無面立於世自刎以死賊間出慈山直趨黃州元帥迺始出兵前騎遇賊潰於薪橋公發憤罵曰敗軍者當斬不可貸也及賊陷京城上已南狩以興忠信副元帥守一不從元帥令促兵已先據鞍嶺公與申景瑗軍東郊适戰敗爲其下所殺及論功賞公陞一資而已不預行封而公口不言功公爲平山都護府使兼黃州防禦使其年罷官還鄕里因不出前時諫官金時讓爲嶺南按使巡行海上訪公於田舍曰何爲不仕公謝曰以無能受恩已厚又何求也時讓爲之歎息而去閑暇無事常鼓琴亦不彈世俗之音樂觀書手不釋卷自丙子之後忼慨不樂日飮醉自遣時撫劍長吁夜則仰觀星文而已仁祖十九年十一月廿九日公卒於匡廬山下年七十三追爵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公有仁孝行生九年母歿事繼母必有至誠至今鄕黨父老稱之平生未嘗言人之過而喜揚人之善居家尙節儉好施與睦宗族嚴嫡庶疾病戒諸子曰謹守禮毋墜家訓無他語

銘曰 忠不見功廉不見容直道在我安且不慍汚濁之戒良善之勸

[주:許眉叟穆撰碣]

◑公守順川時楊鎬新喪師遼左震動及瀋陽陷遼民及督府士馬東渡來附順川者萬數公賙接甚勤竝賴以活天朝鎭江遊擊遣府牌奬勵其文曰鎭江遊擊張爲奬勵郡官題敍事照得本職奉總鎭憲令鈐束各營官兵馬匹牧養看得順川郡守朴震英文武足備撫移饑寒愛蒼赤氷蘖滿腔賢聲載道仁德施民據喂養都司林茂春營馬百總沈仲祥等日每人馬供用豐足馬匹俵壯足堪騎征合行奬勵爲此牌仰順川郡守遵奉文內事理候調馬回日報請鎭主移咨國王加給陞任以樹新猷有助撻伐矣未便須至牌者右給行順川郡守成川鎭管兵馬僉節制使朴震英準此天啓參年正月廿三日給[주:牌文在于家]

 

0 第二十 菊菴 李公 당시 39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경(李明憼)1569년(선조2)~

본관은 성산, 자는 일초(一初) 호는 국암(菊庵)

매죽헌의 3제. 여헌 문인

公諱明憼字一初梅竹軒之第三弟也謹按前輩風流固多爲世羶慕者而不有當時文字之記實後生于何考德而寄仰耶我於公而自不無寂寞之歎焉雖然公以學問行誼如篁谷爺而爲父宿德宗師如寒旅大先生而追遊則家庭詩禮之聞湖山仁智之趣槪可想於曠世之下而亦足爲今日景艶處也

 

 

0 第二十一 求慕齋 李公 당시 37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념(李明念)1571년(선조4)

본관은 성산, 자는 이성(而聖) 호는 영모재(永慕齋)

정무공 호성의 5대손, 임진왜란때 김해진 영군장으로 죽은

령(伶)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죽엄을 슬퍼하여 평생 남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곽 망우당을 화왕산성에서 보좌했다.

公諱明念字而聖星山人靖武公好誠之五世孫壬辰亂以領軍將死義於金海鎭諱伶之子也公天性至孝痛父非命平生終不向南而坐惟以討賊復讎爲心與郭忘憂堂共守火旺城協謀贊績多所效力云[주:瑣聞]

 

 

0 第二十二 奉事 辛公 당시 36 세 거주지 영산

0 신응(辛膺)1572년(선조5)~1609년(광해1)

본관은 영산, 자는 백희(伯禧). 증조부는 예조참의 필주,

조부는 광주목사 윤, 아버지는 선교랑 여성.

곽망우당의 사위. 군공으로 의영고 봉사가 되었으나

38세로 죽었다. 뒤에 좌랑에 추증되었다.

여헌 선생과 만났을 때 36세.

公諱膺字伯禧靈山人高麗典工判書斯蕆之七世孫禮曹參議諱弼周光州牧使諱崙宣敎郞諱汝誠寔公曾祖祖禰也公以軍功除義盈庫奉事萬曆己酉卒享年纔三十八外舅郭忘憂堂嘗稱與曰風儀動人心純

禮恭有子時望字子重號澤隱以孝行卓異屢被鄕薦明陵丙戌褒贈佐郞[주:家乘]

 

0 第二十三 處士 李公 당시 36세 거주지 함안

0 이명각(李明慤) 1572년(선조5)

본관은 성산, 자는 자순(자순), 독촌 이길의 아들

 

公諱明愨字子純獨村之子也公質醇而性雅學博而行篤事親焉孝敬備至待人焉忠信必勖風度懿範眞一代長者云[주:瑣聞]

 

 

0 第二十四 處士 李公 당시 35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여(李明悆) 1573(선조6)

본관은 성산, 매죽헌의 5 弟

 

公諱明悆字慶初梅竹軒之第五弟也謹按公內而襲賢父兄家庭之訓外而躡諸先生江湖之趣則其懿範風致與第二十處士公眞伯仲而況龍華遊泛何等道義勝集而公之叔若昆從凡六人與焉猗歟盛矣

 

 

0 第二十五 道谷 安公 당시 34세 거주지 함안

0 안정(安侹) 1574년(선조7)

본관은 광릉(廣陵) 자는 자장. 정언 의(義)의 증손

公諱侹字子長廣陵人麗朝侍御史綏之後正言諱義之曾孫也謹按公之事實非無文獻可徵而龍華遊泛寔千古斯文勝集簪盍諸賢摠一代道義交契則同舟促膝一紙編名庸非偶然且當日泛錄之修寒岡先生卽命門人藏諸硯匣而去則寥寥百載之下孰知其有是會有是錄於皇明萬曆間而幸賴公拾得草本於當時席上善藏十四年之久而傳諸趙澗松堂澗翁欣然得之仍作序以播之故世之人始知有此事而如愚之

邈爾晩出者亦獲其撫摩遺馥油然起感則匪公之賜伊誰之力不然南州第一勝迹幾乎泯而無傳矣噫收拾文字士大夫之一行如公之謂歟

 

0 第二十六 處士 李公 당시 33세 거주지 고령

0 이시 (李時馠) 1575년(선조8)

본관은 성산, 자는 문원 .

판서 비(棐)의 8대손 무과 성업의 아들

 

公諱時馠字聞遠星山人隴西公長庚之後判書棐之八世孫武及第諱成業之子也謹按公之事蹟無路凭詳而寒岡先生卒公有挽曰長呼泗上哭之慟夫子云亡人世空禮樂文章與道德遺風千載鎭吾東觀其詞旨出於悃愊而約而盡眞善形容先師者也惜其見逸於當時收刊中何哉

 

0 第二十七 處士 郭公 당시 30세 거주지 현풍

0 곽형(郭瀅) 1578년(선조11)

본관 현풍, 자는 청숙. 망우당의 아들 35세 졸

 

公諱瀅字淸叔忘憂堂之子也 謹按公生長法家文行早著而不幸無位無年僅 享三十五而卒惜哉

 

0 第二十八 消憂軒 李公 당시 27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일(李道一) 1581년(선조14)

본관은 벽진, 자는 관지, 호는 소우헌(消憂軒)

복재 이도자의 3 제

수직으로 부호군. 조간송과 가깝게 지냄

 

公諱道一字貫之復齋之第三弟也謹按江左所傳公有仁孝行且多義氣好施與善交遊一代名勝莫不聞風傾蓋而與趙澗松堂蔣處士丈[주:文益]道契最密有時乘興短棹相邀或泛月君淵落釣景釀優遊自適以終其年階天爵副護軍

 

 

0 第二十九 瑟谷 李公 당시 24세 거주지 성산

0 이란귀(李蘭貴)1584년(선조17)

본관은 광산, 자는 자형(子馨) 호는 슬곡(瑟谷)

六一軒 이홍량(李弘量)의 아들. 61세 졸

 

公諱蘭貴字夢與改子馨光山人高麗版圖判閣順之八世孫也考諱弘量所謂嶺南三容之一蓋其兄弟三人以學行名重南州表德皆有容字故有是稱薦授恭陵參奉不就號六一軒公生于萬曆甲申幼穎悟不煩敎督而能曉解文義壬辰六一公卒公年九歲攀柩叩額流血被面終心喪三年其至誠之見於行者已如此時倭寇充斥西路稍安寒岡鄭先生見任成川先生乃六一公之譚也公奉慈氏往依焉於是公年已十餘一日慨然請先生授學先生感其意卽命師課學不久而進在成川者四年由是師門恩義固已異於人矣及 先生遯荒養閑倻泗十餘年公陪侍杖屨最切見聞益廣所得尤多庚辰丁內艱服闋二年卒壽六十一公性質天全不事修飾六行之篤誠善無僞常以不及致養先府君爲痛每誦匪莪伊蒿之詩欲孝誰爲之語未嘗不三復流涕追遠之禮誠敬極臻色養偏慈五十年左右無違訓子弟必先小學書引擧魯齋神明父母之喩寒暄小學童子之說以勖之居鄕秉心持論不少苟不以利害愛憎有所撓人皆敬憚之少事科業不樂爲世俗粉繪文故屢戰而失之東隅繼以閤州坐李昌祿事解錮於十年之後而公已老矣以親故復事場屋卒不

得志而付諸命廢擧後觀書猶不輟雅好閑趣築室於洛之東涯扁曰瑟谷於此樂志以終身[주:曺承旨挺融撰碣]

 

 

寒岡先生別集卷之二

 

 

偶吟示李蘭貴李壆李長立李東老等。

 

 

六一與玉山。晴暉與公甫。森然猶在目。悲喜盈我腑。

 

0 第三十 處士 柳公 당시 24 세 거주지 성산

0 류무룡(柳武龍)1584년(선조17)

본관은 문화, 자는 경표, 인배의 아들,

公諱武龍字景漂文化人高麗參政公權之後諱仁培之子也公天姿粹美弱冠執禽于星山六一翁之門翁乃寒岡鄭先生之娚而與先生道義相磨者也公早得依歸充養旣厚陪遊杖屨見聞益廣一代士友多推敬焉寒岡卒公有挽曰眞元鍾會降先覺飛鳥群中類鳳凰繼往淵源如北斗開來事業領東方心懸廊廟忠彌篤身在林泉道更光洙泗倒流哀莫及斯文天喪不堪傷此詩亦見逸於收刊中惜哉[주:瑣聞]

 

0 第三十一 澗松堂 趙公 당시 23 세 거주지 함안

0 조임도(趙任道) 1585(선조 18) - 1664 (현종 5)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이다.

立巖 조식의 아들 . 여헌(旅軒) 문인,

그의 학문이 경서를 근본 삼아서 낙건(洛建)의 유서(遺書)를 탐독하여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광해군 때 정이홍(鄭仁弘)이 퇴계선생을 배격하려고 각읍 유생을 시켜 상소하려 했을 때 유공(庾公) 사(斯)의 고사를 인용하여 엄하게 거절한 까닭으로 인홍의 미움을 받아 칠원(漆原)에 피신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여헌이 등용되므로 편지하여 출처를 논하였다. 1634년(인조 12)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傳), 1659년(효종 10)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고 함안의 향사(鄕祠)에 봉향되었다

 

公諱任道字德勇初字致遠澗松其號立巖之子也幼瑩秀不凡六歲告母夫人曰以孝名我未十年値龍蛇亂流寓江左凡一言動視父母所爲十四受學於金槃泉中淸金公月川門人也公習聞退陶音旨尊慕之旣已從旅軒張先生遊四十餘年所以熏灸相長者益親且切公之學以經書爲本而潛心洛建之業自治甚嚴其道行之日用彝倫之間事父母誠敬俱至居喪有過人行歠粥終喪過期猶素食常有閔子切切之哀所□

追慕錄風樹吟孺慕歌等作見者無不下涕光海世仁弘遙執朝權心不快於退陶先生嗾列邑諸生張攻斥疏議莫有違者公引逄蒙庚公之斯距之甚確爲所惡辟地漆原江上躬漁以養親仁廟改紀旅軒首膺拔擢公以書論出處之義且曰自古守正之士孰不欲砥礪名節而及到名場鮮不失步願先生不以人廢言公之微意可知也甲戌除恭陵參奉不就丁亥除大君師傅己亥除工曹佐郞俱以老病辭公恥名凡有徵召未嘗起而應之然其愛君憂國老而愈篤仁孝兩廟喪至卒哭俱食素左右憂其致傷公曰古人云我爲綱常謀有身不得顧雖致損庸計乎壬寅因廉使啓下旨褒諭賜米豆公上疏謝因陳時務十四條上爲之嘉歎甲辰公春秋八十疾堇顧左右曰古人臨終有怡然而笑者左右問爲誰曰陶靖節也遂終方伯訃聞特令戶曹致賻贈司憲府持平公自少私淑於退陶門人尊信其學後拜寒岡先生又從賢師友質問講劘道成德立南方學者翕然尊信而公常退遜未嘗以斯文自任然觀其平生所自樹立可測其造詣者深也絶意外慕居閑養性所居有江湖亭臺之勝有時扁舟從師友學子沿洄吟哢有文集略干卷懿陵辛丑士林陳疏建院

[李訥隱光庭撰碣]

 

0 第三十二 益庵 李公 당시 21 세 거주지 영산

0 이도보(李道輔) 1587년(선조20)~1651(효종2)

자는 익지, 호는 익암(益庵)

외재 이후경의 아들. 아버지 외재를 따라오다.

광해군(光海君) 4년 (1612)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二等) 23위 (사마방목)에 입격하여 반궁의 掌議가 되다.

천거로 재릉 참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조간송당과 특별히 가깝게 지내다.

 

公諱道輔字益之畏齋之子也自爲兒時祥順有節度見者稱大人童子六歲値壬辰之亂隨王父護軍公避兵關東流離顚沛備嘗艱難而不失常度護軍公撫頂曰白玉之質泹而不淄難稍定還于故居年已十二三始就傳受學文理日達流輩莫有能先之者畏齋嘗指公白眉曰汝眞是吾家白眉郞十五隨畏齋拜鄭先生于武屹山齋先生一見奇之戲之曰若見我欲何爲曰欲聞先生敎人之法先生曰若外王母吾從姊妹也吾

於若爲大父何不稱我大父而稱先生也曰小子將請學於先生矣稱先生以道之所存也先生顧門人曰可謂有父有子矣壬寅丁先妣郭夫人憂水漿不入口旣葬猶歠粥大人公勸之飯公曰大人之喪王母也年九歲矣猶執喪如禮兒今十六豈憂不勝喪然大人有命矣以蔬食水飮終三年旣冠治擧子業二十六中壬子司馬諸生推爲掌議太學中極選也後五中東堂五屈禮部又嘗中庭試見拔而不以爲意歎曰吾兒時從家大人後見鄭先生於百梅園備灑掃之役託跡門下且十數年矣若專以科第爲心而不留意此事則豈惟一己之羞實父師之恥也於是內而講問於家庭外而請益於師門取性理諸書刻意加工尤深於庸學畏齋嘗曰知庸學吾不及汝人有來問者必命公開說其見重家庭如此天啓丁卯有狄人之侵大駕入江都時畏齋先生扈從行在公倡起義旅赴君父之急有二卒不用命卽斬以徇衆讋服曰孰謂司馬仁乎是年冬先生有陰城之命公請曰兒嘗遊太學與湖人同處者久湖人狙詐易親易疏宜治之有道因俗而善導之不可以嶺治湖往來省覲嘗自斂勅不使邑人知子弟在官己巳先生因事罷歸俄寢疾日篤公衣不解帶嘗糞以

驗其劇歇翌年春先生竟不起疾公持喪一如前喪自此謝絶外慕專意爲己之學搆小齋扁以益庵與澗松堂趙公任道隔江相從以道義切劘趙公旅軒高弟也癸酉被薦太學乙亥御史又薦聞于朝丁丑始除齊陵參奉辭不赴搆玉山齋講道其中有終焉之志壬午從兄復齋公卒公大慟曰先公與堂兄同遊寒翁之門倫則父子情同兄弟不弔先公下世所恃者吾兄在耳吾將以事先公者事兄以卒先人之敎今又不待矣我之不蘉家學絶矣益孜孜不怠嘗語子弟曰吾家學有淵源汝曹專事科業而不知有此學可乎必使之先讀小學知灑掃應對之節然後授以他書又曰仁之於人若飮食焉飮食不可廢則仁其可去乎仁惡在在於我盡吾性則仁便在是靜處一室對越聖賢拈出嘉言善行切於學者者朝夕諷誦不以年老或懈嘗曰士君子徒以章句誦說而已者陋矣其遇先忌必七日戒三日齋祭需躬自點視祭之日終夕有戚容以先夫人畏於火終身不御爛煮之物德器溫粹未嘗有疾言遽色待人誠信款曲雖卑賤者必以溫顏遜辭相接使之盡其情有善必稱有過未嘗直斥諷使覺悟故人無賢不肖皆歡忻愛慕曰拜益翁自然作好容顏公韻味瀟灑所居之室不蔽風日衣不能節寒暑晏如也以辛卯考終壽六十五

[權正郞萬撰狀]

 

0 第三十三 處士 李公 당시 21 세 거주지 영산

0 이해(李瀣)1587년(선조20)

본관 벽진, 자는 이호 . 복재 이도자의 아들 早卒

公諱瀣字而浩復齋之子也受業於畏齋門行誼風著不幸未娶而卒

 

0 第三十四 處士 李公 당시 20세 거주지 칠곡

0 이충민(李忠民) 1588년(선조21) ~ 1673년(현종1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과거를 단념하고, 받들어 모시기에 낙으로 삼았다. 또 우애가 지극하여 형의 죽음을 슬퍼하기 친상과 같이 하였으며, 조카형제가 재질이 둔했으나 성심껏 교육하고 전토(田土)를 나누어주어 생계를 돕게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0 영천초천일기(榮川椒泉日記)가 있다.

 

公諱忠民字汝直碧珍人山花先生諱堅幹之十二世孫也生於萬曆戊子早遊寒岡鄭先生門先生以純孝稱之公嘗過燕子院吟詩一絶曰燕子樓中佛由來閱幾年停驂無限意惟祝老親年又歌一闋曰祝了祝了

于天主祝了非功名非富貴北堂鶴髮偏親壽千歲祝了於此足見公愛日之誠隨遇而發也享年八十六階天爵副護軍○有子曰榮世早中司馬薦授社稷參奉號日休堂亦壽過八旬而卒[瑣聞]

謹按澗松堂追序同泛錄而有曰其二人不可詳其居住公乃其一也蓋當日舟遊寒岡先生命修是錄正本則先生藏諸硯匣而去一通錄蒿遺在座間幸賴會中人收拾善傳因以流播於世而第錄尾二員只書姓諱其表德年住俱不載焉豈是錄草而非正而偶闕其詳耶肆用覽是錄者莫的其某鄕人某家先而旋竊慨如者久矣歲壬戌春漆州士人李光㻐甫過余而宿偶閱同泛錄至公之名悤油然而作曰此乃吾先祖而何獨無字年居址之備記也余曰子之言妄矣母其同姓名乎對曰先祖純孝人也荷愛先生最深凡有杖屨之戒公必陪從題名記遊處頗多烏斯之獨未信也問其字則某叩其年則果沕於錄中第次矣余卽書塡其名下略記事實之如右

 

0 임진부(林眞怤) (제현록에 없음) 당시 22세

0 임진부(林眞怤)1586(선조 19)∼1658(효종 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낙옹(樂翁),

호는 구곡노부(九曲老夫)·임곡(林谷).

아버지는 승근(承謹)이며,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은거하여 지냈다.

인조반정 후 독서인(讀書人)으로 이름이 있어, 1635년(인조 13) 대군(大君)의 사부로 천거된 바 있다.

만년에는 합천의 구곡 밑에 살면서 방에 ‘자지헌(自知軒)’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연을 벗삼으며 지냈다.

(林谷先生文集卷之一)

題龍華山下同汎錄後龍華山下道興津

寒岡 旅軒 忘憂堂 同泛

 

道興舟幾大 載得此羣英 已向安流泛 何須問耦耕

 

 

0 龍華山下同泛錄追序

 

皇明萬曆丁未初春寒岡鄭先生來至道興步道興卽龍華山之東麓而咸安郡之北隅也始至之夕率朋徒乘舟浮下宿忘憂之精舍其主人則前右尹郭相公也旣宿之明日又泝流而上歷景釀登柰內以周覽乎上下山川之勝巖壁之奇然後乃復于初到之所而休焉蓋聞先生嘗得石之可碣者不能運留江濱因失其所在者二十年矣或慮其沈埋沙水而人自不知也欲倩海夫搜剔而覓之故有是行云任道於是時方讀書于漆原之長春寺先君到上浦江舍馳書命召曰二賢竝臨盍往拜之任道卽夕來宿江舍江舍卽吾季父別業而與道興通望處也厥明日平朝陪先君季父乘小艇抵于道興則先生已於龍華山下下碇監搜石矣進謁先生退敍左右一視先君導率指敎而爲之坐旣定始轉目而閱之從之遊者旅軒張先生及寒岡之門徒也聞而會者忘憂郭右尹咸倅朴令公也咸安來者十四靈山來者十人昌寧來者一人玄風來者一人星山來者二人高靈來者一人其二人則不可詳其居住矣舟窄不能容蓋先生於咸郡曾有遣愛而道興之津又在咸之境上故會客之中咸之人最多焉是日也先君與季父設壺觴慰群賢繼以行酒者靈山前郡守辛丈礎與咸安之校生也大都杯盤簡潔禮儀和敬無譁笑不戲色肅如也穆如也先生顧謂諸生曰今日之會可謂盛矣其何以不志其令善書者一人列錄坐客以爲他日面目可乎於是咸人進士李生明怘應命而作取紙筆書之鄭先生居首其次郭右尹又其次朴令公又其次張先生自此以後敍以齒不以爵直書其姓名字年行居住曁會集之歲月日凡三十五員目爲龍華山下同泛錄錄之目乃先生所裁定也錄旣成獻于先生先生命門人藏諸硯匣只有草蒿一本遺在坐間坐間傳相輸翫而任道則眇然席末恨不得重覽其錄本而略領其梗槪也是夕石旣不得日又忽暮先生獨登藍輿先就寢所舟中之人稍稍分散郭右尹歸于江亭朴令公入於郡中護先生留宿津頭者門生十餘人及吾鄕之耆老子弟也翌日淸晨兩先生渡江而北鄕之少長各還其家任道亦奉先君返于儉溪惘惘然如有所失曰若鄭先生之英豪才德張夫子之渾厚氣像郭右尹之灑脫胸襟聞諸古昔尙且興感對之卷中亦當起敬而況今不聞諸古昔而竝生乎當世不對之卷中而親見其面目一時咸聚於一舟之中而吾父子二人又得參其會邇其光從容一席之上穩做同舟之款薰襲芝蘭之馨縱觀江湖之大眞一代之勝集而人間之盛事也此日之得不其多乎此日之會不亦樂乎知茲會之不可再續而悼勝迹之泯沒無傳欲爲文志之學未透辭未達搆思而未就矣不幸二月之尾先君奄逝終天之慟尙忍言哉苟保餘生無意昔歡者十餘年矣歲庚申春夏交從妹夫安君侹偶來過於柰內之新居因與逍遙江臺指點道興忽念龍華同泛事慨然歎曰當時二先生答先人手札至今尙存但恨不得復見同泛之錄蒿也安君曰子欲求得是錄乎吾有一本草蒿藏在篋笥中耳蓋安君於丁未亦在會中故拾而得之矣任道聞而驚且喜遂走伻取來長跪奉玩手不能釋得之之初欣然忘食閱之未幾又復不樂歔欷太息以悲同泛之日是正月之廿八而先考之沒在二月廿八纔隔三十日吉凶哀樂若是懸絶人事之不可恃也如此且念郭右尹已於丁巳夏乘化鄭先生又於今年春易簀其餘名在錄中而身歸泉下者亦八人儒林之慘存沒之感顧何如哉今之在世而吾所斗仰可賴以自慰者惟張先生尙無恙斯文一脈未墜於地而畏齋李丈以寒岡門弟爲先師行心喪方裒集寒岡文蒿之爲己任先生歿而衣書之托亦庶乎不患其無人矣嗚呼任道於是錄多所感矣錄之中有可景慕處焉有可想望處焉其所景慕者非二賢之道德文章乎其所想望者非郭僊之風致名節乎朋知故舊多在於此鄕黨長老亦參於斯皆吾父子之所相與交遊者而未數十年已成陳迹寓目興思烏可已乎然而無收拾善藏之人於當日則亦何能至十有四年之久而不失復得爲吾家有乎任道於安君深用嘉焉獨惜其載乎錄者如彼其重而錄之草蒿麤薄短狹甚不與之相稱也編紙作冊移錄其中安君之賜一變新矣任道其間有以私意擅改者二焉其一易張先生諱字以軒號其一不姓名先人曰先大人極知僭妄無所逃罪然先生道之存也先考子所天也而錄之重修出於任道之手錄之守藏在於任道之家在任道職分當然觀者恕之竊嘗觀佔畢齋之修正靑丘風雅目錄也論次諸賢姓氏事蹟於卷首而不書司藝公姓名直稱先大人註于其下曰諱某字某則古人之於父也其不以公義廢私情如此任道之私自尊親亦安敢全無古據而冒犯直遂乎如得工畫善寫之妙旣圖且錄粧成數疊短屛或造一幅小軸掛之堂壁留之心目赫赫若前日事則安君之惠又加遠矣任道旣幸錄之復得而又嘉安君能保勝迹於是乎序是歲庚申秋月日也

 

 

0 謹書龍華山下同泛錄追序後

 

昔澗松堂趙先生撰我曾王考贈判敦寧府君行狀而有曰公與鄭寒岡張旅軒郭忘憂諸先生泛舟遊於龍華山下龍華山卽洛之道興步西嶽而江流削其一面蒼壁往往鐵立蓋嶺之南勝地也尙節每過此見其洋洋焉嶷嶷焉十里明沙帆檣上下輒有羹墻之慕未嘗不歇馬彷徨而因竊念蘭亭之會有逸少之記赤壁之遊有東坡之賦則惟我諸先生道德文章風韻氣節其視王蘇輩淸虛放浪不啻星淵而曾無一言之垂於泛舟之日何也余常訝焉丁未秋偶訪趙大雅弘燁氏於龍山別業弘燁氏澗松堂玄孫也坼戶臨江指點顧余而言曰子知龍華同泛古事乎我有同泛錄一本又有先祖序文一通藏之篋笥久矣尙節驚喜覓出盥手奉翫其錄則鄭寒岡首焉郭右尹次之朴咸安張旅軒又次之第十九吾先祖判敦寧府君第三十一趙澗松先生先生先大人立巖公亦與焉總凡三十五員其序曰皇明萬曆之丁未孟春鄭先生爲覓碑材之遺失江岸者而有是行諸先生及四方多士皆從之遊者也是會也杯盤簡潔禮儀和敬鄭先生曰盛矣可不識乎於是是錄成張先生以上序以爵其下以齒而直書其姓名某字某居址年月日其目爲龍華山下同泛錄者鄭先生所裁定也尙節得此始悉舟遊之顚末而目其錄口其序珍復詠歎之極悵望江際風徐浪穩魚鳥游泳疏篁老檜映帶左右則依然坐一舟中親覩諸先生好氣像來也況我曾王考出處行藏與忘憂郭先生不約而同一倡義旅島夷遁跡再飛尺紙逆臣授首功成事定浩然而歸時與儒賢長老遊泛江湖編名一錄照耀千載則尙節之於是錄愛而敬之敢不自別於他人也耶嗚呼澗松先生陪侍其先大人摳衣丈席獲近淸光斯固榮矣而尙節生晩曠世之下末由攀化徒取紙上陳迹摩挲不已吁其悲矣雖然是錄之顯晦於斯世抑亦有數於其間趙先生後同泛十四載復見是錄於安公侹追感而序之尙節後趙先生百有十年始得是錄於趙先生之祀孫謹書其後且繫一律用寓我追先景賢之誠此豈偶然哉後之覽是錄者不以我僭妄而又以是張大之則錄之傳庶將無窮期也曷不休哉 華山嶷嶷洛江長何日先生此泛檣元禮舟中同載郭晦翁床上共携張群賢一代爭攀化吾祖當時亦邇光特地淸遊誰記述文章欽仰澗松堂

 

 

崇禎紀元後再戊申仲春日後學凝川朴尙節謹書

 

0 (龍華山下同泛之圖)

 

第一 龍華嶽

詩曰

峨峨枕碧流 猗歟師友會 吾祖昔同遊 右龍華勝集

龍華山 合江亭 鵝湖

 

第二 靑松寺

詩曰

鍾聲薄暮廻 收心一妙法 傳得紫陽來 右靑松暮磬 靑松臺

 

 

第三 道興步

詩曰

嘉號待群賢 可惜琬琰石 深藏何處右道興搜石 道興步

 

 

第四 柰內村

詩曰

淸幽多佳賞 維舟翔鳳下 列坐高臺上 右柰內淸賞 翔鳳

 

 

第五 景釀臺

詩曰

天然錦屛開 且可留心看 長年莫謾催 右景釀奇矚

 

 

第六 是藕浦

詩曰

僊舟瞥過津 催帆呼隔手 江上伴鷗人 右藕浦追帆

 

 

第七 平沙面

詩曰

行行雁字斜 伊川看兔理 理會此間過 右平沙落雁

 

 

第八 滄巖舍

詩曰

德星耀此中 蘭舟將欲發 携手主人翁 右滄巖同舟

 

 

右龍華山水圖群賢之遊於斯怳然若昨日事山高水長遺風足想含靑釀綠餘景可掬則信知傳勝寓慕之地非直文字爲貴畫亦不無助也蓋是圖也只是摹寫一帶僊泛而容與十里之間格賞非一物故隨以名言而分之爲八帖其一曰龍華勝集華屹立上游管領一區風物而當時遊集皆一代名勝也其二曰靑松暮磬江上古寺隱隱鍾聲時時到船來也其三曰道興搜石寒岡先生爲發碑材之曾瘞江岸者是步焉停舟或命丁掘地或倩人潛水而求之也其四曰柰內淸賞層崖百丈沿江壁立而左角漸低爲石臺可容數十人坐南

連短麓樹木蔥籠八九漁店點綴隱映於其間望之若僊源繫纜而登眺也其五曰景釀奇矚迤然蒼壁宛如屛障之開而一江光景十分於茲緩櫂中流而顧眄不捨也其六曰藕浦追帆伴鷗趙公聞群賢之遡流已過與仲氏立巖及姪澗松子乘小艇追赴也其七曰平沙落雁泛泛泝洄之際卽景之寓目也其八曰滄巖同舟巖卽忘憂郭先生亭號而寒旅兩先生會宿于此仍與主翁若門徒諸人始乘舟而共泛彼也每帖下各係小絶用寓我追先景賢之誠極知僭猥然後之人有時披玩庶見其江山眞面目而如得摳衣於百世之下者未必不在於是圖耳 甲子季秋上浣後學凝川朴尙節謹識

 

 

玉溪遊山錄[己丑] 1769년(영조45)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余少多疾病、不善步趨、非代步不能動、數十里而猶有好善之、誠山水之興不相下。蓋嘗得退谷權子剛丈遊淸涼山、得李友甫、遊陶淵、又與李仲則仲休穉春逍遙於龍潭鈷鉧之間。而數載以來、重患脚力雖里閭戶庭之作止、時或至於倚杖而後堪之。過此何敢望耶?周房百里之山也、王溪倍之。不過費數日之春、雲岑白石未嘗不往來於心、而正如籠中之鶴、只得望雲而翹翹也。今年夏病益甚、守株一堂、意思鈍滯、殆無以自振焉。及秋潦初霽、湖上先生約石浦李丈人駕臨、陪侍兩夜之晤、自語以爲坐遂平日之願、未始不爲寂寞之分、旣而梧溪公又有杖屨之枉極論前輩嘉言美論所以警愚魯者。重截一歲之半以下可知其有抽俗之分也。未數日、先生忽自湖上命駕、堂叔丈李公已先在座、從子穉春、及庶弟達靖步隨、卽九月望之甲午也。納寒暄畢、先生微笑曰"間偶令達靖幹事于靑鳧地、乃自躬踏玉溪而至、傳說頗詳。如有雲霞之氣逬出於牙頰之間、不覺動人、居然而出。達靖請先導、疇請隨後乃得至是。"李丈應聲曰:"諾。吾將從之、此中亦有人乎?"卽退而謀之慈氏喜、喜其御李君也。翼日乙未、遂借乘于天成、持十日糧、束裝而出行、裝則退詩一卷而已。行至靑鶴寺下、先生顧余曰:"景蘊弘輔於詩頗解、著手前頭、甚有步趣云。"辭謝訖、知將有詩令矣。俄而命穉春拈出退詩中、川字五言律、約以日暮收韻。由黃鶴洞、逕路盡是泉石丹葉爾。所觸或寓諷詠、或占亭址、上鼎峴日光匿山、馬蹄脫鐵、期與忠彦相晤者左矣。先生顧視峽流之潺湲、歎曰:"發源之處如是微細、下流之大至於浸漫郊野。凡不謹於細末流之弊、有如此矣。"下嶺前至德巷、李丈所騎仰秣而病。偶有隣居趙生頗知黃氏之術。又不怠於急人、無不試其能、向曉乃已。平明而發、李丈休病馬于前、借趙牛而行曰:"苟非趙生今行殆矣。使之宿于彼者、得非幸乎!"先生曰:"天道苟有不奈何處、則已矣、不然則必有會事而發者、不期然而然矣、"有頃、川林漸明、前途不迷。先生曰:"向暮之日、雖不甚昏、稍稍向昏去、將曉雖不甚明、稍稍向明去、宜行者之審也。昨詩未及就、又拈歌字七言律、到玄隱趙上舍相抃家。主人子姪七八、盛服迎候、各持鐵片、而以完馬殺雞以供之。趙上舍且喂騶、戒僮而從余。戲云。料理行理而辦則例也。立談之間、乃能勇斷、誠不易哉!"主人笑曰:"吾顧不能爲公所能耶?"其弟相彦美仲、方持重服未葬、乃曰:"獨讓金君做此遊、最是健羨事也。"旣飯、復整行裝、偶自囊中露見退集、主人大驚曰:"此何物?將令敗人意思耶!"李丈人恢諧而罷、主客步向安德、彊隨高遊、自困脚力。每有步行之令、輒驚懼無異於說卿甫之見詩卷也。歷討數處人事入忠彦所。候其大人公、因而之松鶴書院、上堂無院號之榜、兩傍又無齋號、又無松杉藏修之勝、但有古事一冊尹厓西希正詩集可過眼。穉春掌行中日記、自玄隱分向德峴、約以明日來集。余欲替修其職而疲苶昏憒、無以及焉。薄暮、權上舍伯仲丈追臨問行路將何由曰:"直向巨嶺如何?"曰:"異乎吾所計也、方壺天地、豈可無一會期哉!丁酉、謁尙德祠、先生攝衣趨蹌、肅敬之意著於動止、退而思之、均是人也、百世之下、安能使人慕悅起敬至、此又安能感應興起於百世之上至此哉!松鶴主金上舍長民、方壺主趙措大元變引向方壺、會員數十人。從穉春與厚甫來至、諸長老皆步、獨留余于權君澤嶺秀精舍、使之騎馬而息勞焉。義不可辭之、而後得許、然殆不能堪也。李丈嗟勞之不已、先生亦任之爾、渡石矼坐沙上。昔者只是沙場、今夏江水齧沙而露其骨、巖石如盤如牀、連珠貫玉、可坐可踞、仰見翠壁縈雲。劍角摩天、中有一小樓、朱碧明暎左右。詩扁鱗疊照耀、方怳然若失、不知是爲我耳。諸人喧譁慰余病憊之狀、余止之曰:" 勿屑也、飄然一擧、已在於風臺紺宇之中、顧塵世何如也?"主人網魚而膾炙之、水陸皆具、間以酒醪、江山之趣盡矣。燈下讀前賢詩、軸次風字韻。戊戌、旣盥、候長老已具二冊、一付臺中、一付行史臺者。先生識而宗德筆行者、權上舍丈識而長民筆、姓名年齒居住備焉。酒行相揖而下馬、已敍次溪岸矣。權上舍前、李丈次、先生次、趙上舍及余先後焉。厚甫穉春李君步行。有一翁扶杖而後、卽趙相弼台老甫也。行至巨嶺店、忠彦已治遠遊之具、等候于道。蓋亦稍剩其所齎、以爲主客之禮也。東北由一峽、而勢益高、僕夫納轡于上、探其藤蔓之垂、頻以葡萄唐李之、屬沃之在霜後甘酸甚美云。上吾道山、少憇。台老甫多拾橡實啖之不掇、問之、則此山橡實味如栗子云。下山是涑水村、纔歇馬、日已曭矣。不得前進、解馬休僮于村、距屛巖不遠、不可孤也。步入外屛巖、顧後若以雙屛遞衿相鎖者。然上內屛巖上頭、稜角峭厲、便如列㦸環侍。而下面平連疊開、旅軒先生嘗嘯詠于此、故號曰旅軒臺也。屛內藏得一院、不與洞主相識、將旋筇而歸。趙上舍落後、驅人馬而至曰:"院後一洞。有僧庵可一宿。洞門數里、鋪巖亦自不惡、犯夜入寺、寺僧不之敬禮焉。"余謂說卿曰:"旣陪長老、可無一警乎?"說卿曰:"陪長者、故不能也。"夜深有車馬唱喏之聲"火色煌煌涑水村數十員偕洞主迎候、將有明日雞酒之樂、厚意不可以負、行事轉轉差池、更遲一日、甚恐不濟事耳。力謝之、只成夜裏討話而已。己亥、復出洞巖、不及院而遡澗而東行、至數十里、洞壑平開、郊野寛閒、居民頗豐饒、問村名、曰花場。中有高姓良家子、稍識文字云。村前小溪環抱而流、無甚奇特、及到盡頭處、巖右夾溪而開、高可成臺、低可團坐、阜岸方整、淸泉涵渟、又有落落亂石、排布于溪。抑求諸花山聞韶之界、鮮得其匹也。數畝沃壤、枕溪而臥宅、於是而耕、於是復何求乎?下馬盤旋而歸、不啻桑下之再宿也。又有數

十里長谷循溪而、入蘿薜蒙絡檜枏晻靄中、有平原荒茂白茅黃筆、一望無際。厚甫指余而言曰:"此爲築隄開防之地、患無力耳、若携手結契、刊木墾土、樹之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尙遺此一區、不入於職方氏之所載、則其亦有待者而然歟?窮源有大嶺摩天、曲如羊腸、危如九折、只尋樹草縫罅而進、俗稱曰肝腸峴、恐是羊腸之號謬也。下山而憇于高川金南原之墳庵間於靑盈永慶之分、而四塞如巴山、決非人境者。久矣、於是乎屛巖詩成、各誌其號。權文曰蕉皤、李丈曰湖叟、先生以大山、餘皆名之。先生曰:今行詩令、只得日課而已。不敢過也。朱夫子遊山之令、常以過節爲戒、然弛張之間不覺至百餘篇、風致之發、有不能禁者。"道間買取生魚烹於是、鮮如新得者然、可知其海門之邇也蕉皤丈曰:"自此可向遯世洞去、其各勵之。"問諸庵僧而後行。踰向一曲、前臨大壑瞻望指點、白石齒齒、洞門重重、靈怪奇爽、無非仙靈之所、苟有山隙容流之路、必以氷玉糚緻、窺戶可知其珍寶之府也。不知從何而尋其爲遯世洞也。羅立山顚、憆然自失、將欲直抵溪澗、逐旋踏從矣。偶自後路有一氓、戴笠結索而至曰:"洞名一稱彌勒、一稱遯世、遵壑不能達矣。第從我。"順其軌而從平路渡矼而登岸。稍南松杉翳日、寛平可住。氓曰:"其舍馬、袪上衣、持筇納履、斜由岸側而東數百步、洞門懸如浮空、兩傍石柱作門、而方而齊、整白有光映、滲流涓滴、其下澄涵、勢固爾也。使人不覺然生疑、疑其中必有異也。門不可由、因岸側而進、土盡而石、闊步梯石、身不期高。而自高復如是而下越其壑、然後可以窺其蘊壑中有一石。大如小屋子、當要路、正爲誠意關、且圓無罅級、人皆着足抱手、襯貼腹行、跨其頭、然後始聚足而立、竦身超躍、然必一發而當對立之石、可免躓墜也。如余何以及、顧石不甚高、水不甚深、失圖不過爲霑身而已、不可以辦命論也。余乃居後、挺身而効力一擧、賀言已譁然矣。衆人扶翼蕉皤丈以濟、說卿坐石而言昨年東都士人遊於此、行中一人墜落于水、翻身而出、其錄有曰吾儕之幸、而魚龍之不幸云。所謂善戲謔兮、而其不至傷人可知也。前一隊先在上一層、擧頭向谷、俱作一番驚動之聲、如遇猛獸騰鱗者然、旣而駭視無言。厚甫穉春向前而飛入、先生莞爾、蕉皤茫然而立、余從人後、試一覘之、未遑出一言。言曰:"天下復有此乎?"先生徐曰:"古人文字、何者可以比得?"蕉翁曰:"韓文公南山詩無或近乎!"大抵滿壑皆是石耳、而無片土留着、所容者只是流銀碎玉、錚錚而下爾。地勢轉成層級。深者可以徹厚坤、高者可以摩蒼天、而石色如雪、小如丸杯、大如峯巒、尖如錐鋩、嚴如劍㦸、高如銅柱、方如金印、陷如杵臼、窩如釜鼎、立立矗矗、積蓄瀰漫、而猶各占界分、不相倚比、片片淸潭、隱現石底、左右蒼壁、昂頭聳肩、望之至或魂悸神怔、必俯首收視而後定。驟而臨之、正如睡眼看場、入海觀龍、正所謂仁、者見之謂之仁知。者見之謂之知若欲比之於羅漢講徒、齊島鴻門、趙市秦關畫本蜃樓、粉黛行陣、冀得逼眞而後已、則却淺矣。良久、氓請回策、至石坎有題名月城。李公[憲成]聞韶李公[宜泰]辦戊子之遊、傍有遯世窟三字。噫!天地之機、可謂漏洩盡矣!造物者做此一箇別般伎倆、而不使有着足盤旋之地者何?也抑故絶其窺覬之路、使之不得以知知之、又無以寄焉、不但爲遯乎?世也、並其遯世者、而遯之則斯名也、其亦指山而言乎?使穉春題姓名訖、出洞着衣上馬。前路數十里、皆人世之所未覩也。便如駕鶴鞭龍、沿洄於三淸十洲之界也。方占村定棲、隔溪有一岸陡起、高可數十丈。其上有稻 田三五畝、蓋刳木架空激流而灌之也。四面如削玉作亭、可以養魚流觴、可以種蓮采筍。余曰:"占此屛巖、當在下風、花場當在退聽也。"先生微笑、宿其村。曰:"斗升。"問其岸曰塘皐、俗也、改之曰馬到稱之以淸暎臺可乎?朝起賦詩、過星岑而北。洞壑炯澈、若明炬而行也、遇石皆如豎氷、遇水皆如鋪鏡、遇隙皆懸瀑、遇坎皆澄淵、開闢於柘櫟松杉之中、而骨角崢嶸、欲索秋毛之細:而不可得。只布一匹素練、文之以粉畫也、俗稱有九龍潭、其逬出於石齦者曰漱玉臺、其渟涵於石函者曰洗心臺。先生命名、而書之於其所謂龍淵者。氓曰:"魚之尋源者、至此而止、爲其石層截也。"先生誦存齋陶淵詩、一超縱被漁人得、未達窮源正不休 "之句、命之以達源、使穉春書之。移向八九里、洞門頗有衛護施設之狀、更覺一噴一醒也。無亦玉溪之界乎?道左有僧庵、使厚甫入庵而辦盂鉢而出、直從溪流而下、天機向平、地勢漸曠、日月明朗、風雲澹蕩、左右寬闊、占地穩藉、巖石排布、泉潭窈湸、石上可坐數十人者無數、而且有頭面恢平而成窩貯水、如小塘者、多未知積潦雨之淋漓潤空翠之浸漬、不以風日之曝、而被其所損耶?抑亦洪濤襄陵、川谷平齊、及其水落留其餘流、而不之竭乎?先生曰:"仙境、此眞是也。當中有大石、形如圓甕、占坐十畝、高欲揷雲、左右前後無所倚、所謂君子之彊也。上頭戴小土以托雜叢、石邪?峯邪?尤可異也。其臥立縱橫者、不可勝記。環石峯而下又無有起立者、只令露伏而宛轉、便於循級而覓理焉信步向前、巖勢欲盡、明鏡驚眸、水光逼人、回顧又自八角山下通一流、合襟于此、而兩壑之勝萃焉。据石而臨之石之、布于地者、雜以黑白、有如織文錦具。石之伏于旁者、如龜下水、如鼃回首、容水一方、而不圓不方可一畝、又其上別作一層、正似粉壁 綵牖之室、方而不跛、正而不偏、水色靑藍、石文明洞、其廣倍之。又其上別作一層巖石大開、可容百千之會、中陷爲金櫃玉藏、如以繩墨治之、長可百步、廣可容一舟、窈冥淵靜、深至數丈。此藉八角之、水成之而三層各成岸局、上不知有下、下不知有上、必攀梯回旋而後見之。固知天地之氣間有鍾會磨硏、有若有爲而爲者。夫前有香爐峯、後有八角山、人言其中有天池。大旱不縮、線流由石縫而滲漏、如金壺玉箭點滴于下、人以器承之、則隨大小盈其口、然後雖數日連滴、不復汎溢、名之曰仙漏。又有馬蹄棊文之痕、豈其然乎?詩成、厚甫諸人具餐。二僧負而至、敍坐從便。先生曰:"雖野坐、長幼之禮可但已乎?"起而整之。訖有云洞外有臥龍瀑可見、爲脚力闕之、由亭後而行、又是澗壑耳。石色不如彼之皓白、而奇俊則有之。行己五六日、爾、余之神氣脚力、頗似勝前。說卿之諧笑益甚、一行賴不寂寥。先生曰:"趙公其將以俳優畜邪/恐不如稍自減損之爲愈也。"道彦無憚一二、分步行也。此爲履歷未必非驗也。暮入村舍、水石亦可愛、名曰磨川村。氓辭行糗、分排而供之。說卿戲謂村氓曰:"汝等由玉溪之勝、疲於迎送、欲避之移此區於安德可乎?"氓曰:"雖峽氓愚蠢、不欲以名勝讓與別人。"亦善其應也朝後發自前岸、片片水隴、秋稼頗稔、未見引漑之溝、忽見頭上架筧、如虹浮於半空、高可十丈、長恰百尺。蓋自玉溪以下、着土者只山顚岸側耳。引灌甚艱、必棲筧鑿巖、運流轉水、無異於持盂傳渫、是以或多抱巖墜落之患、生理之艱、尤亦甚矣。若使二邑之宰、仍山水之遊、目擊于此、則發於惻隱之餘者、必有所處矣。由岸而西、出洞若將望見羊腸嶺、向下數里許忽望北天一峯、縹緲如着白帽、兀然於蒼翠之外、湖叟指之曰:"後行見之否?"曰:"諾。"蕉翁曰:"此所謂母子山也。"行幾半日、遡盡泉石、逶迤而登一峴、不甚峻急。蕉翁曰:"此山、昔名官轉、甚無意味、野人傳之云:古有邑宰遊覽至此、彈聲忽至、自此解印、故名或曰到此馬屈官行、不免推轉之患、故名二者、誕矣。設有然者、無護惜嗟悼之意、非美風也。識者病之、前府伯兪公彦基邀余遊于此。大張聲妓管絃、轟戛喟然而歎曰:、從今呼峴爲官遊嶺、`卽召吏民喩之、其亦風流之一事也。"卽到梨海、已向夕、舍奴馬于村、村人妙年玉圈持酒壺而前、向雲水洞、蓋少從蕉皤公學、能勝文墨、晩無成、襲其武功之秩。然從士君子不厭也。入洞左右、鐵壁揷天、間以峯巒、而磊落卓秀、少無媚嫵糚點之態、中有一路、尋流而入、流水之隨遇呈異可知耳。日月之光、非中天則不可見焉、陰翳黝邃、行之者若將遇北海、而後始見天日也。前有岸頭稍高、意者其過此可以覩源頭如是者數、了無涯際、使人欲回旋而出而不可得、只見星宿兩三、耿耿頭上、如得世外筇音。行至十餘里、忽有火光、緇徒二人、又手于前、知其有庵近也。渡獨木橋甚謹、旣濟又開土局、庵掛於斗牛之間、不知平日東登高山而望之、常有一片雲晻靄于天末者是耶?說卿忠彦相和而言曰:`此洞雖極靈異、入此便無。巖石作一土山、不過近峽桑麻之地、誠不滿意思矣。"余曰:"不然、一弛一張、天地之道也。焉有無屈伸操縱而可以爲造化乎?是必古釋林中識天機者占之也。"先生之應、人亦如是。及臥魂夢依俙如將高枕於斗牛河漢之間、而邂逅見江左翁方面黯然帶微醺而笑、無他言、只曰:"君往來於愚山文溪之間、而何以無一訪?噫!於公嘗有並世之幸、而恨無一拜之雅。今者獲奉音旨於名山仙鄕之中、無異於峨眉山房、親見嚴君平之眞也。起而語忠彦、共一喟然也。夜聞隱隱之聲來自樹木之間、如擊木、如扣甕。問諸僧、曰:"舊無之、纔三歲爾。夏無冬有、此何物?余應曰:"無乃是龍蛇之屬乎!"僧曰凡有大雪、熊羆羚駮之物、羅列於樓。此聲安知非山獸之蟄者乎?余曰:"獸類不以冬寒而藏、前言理或然也。壬寅、參禪供上庵後、向北而望禪指其石峯之最高者曰:"此有白雲庵無居者。登此則可以觀日出凌扶桑、其洞有人、村下與周房洞連、計歸期止之。余曰:"向人只說海色船帆而已、見不見誰知之者?"纔訖旋覺此言不誠。殺有爲人要名之意。鄭湖"陰寒雨知非"之句、宜乎作金剛山之警句也。出洞往往坐石、酌酒賦詩穉春題名、先生書雲水洞門四字。壁上有梧溪公名、無異於先後杖屨也。少選、脚下弛高低之勢、衣上爛赤日之光、梨海已入眼矣。馬復改鐵而候于途、騁乎周房無所患。蓋昨日入洞之時、忠彦預有以處也。分送步行于間路、迤由平路抵周房洞下、少憇、促人馬而復路邀步行、之殿後者。旣會騎步如初、而向寺涉溪穿林過寺樓而不入、直由臺前楓林之下、而逗馬于佛祠之後。錦光濃樹、丹葉蔽地、罽茜染人、不知布衫之在身也。蕉翁曰:"是旗巖也。仰見特立之峯、上拔三疊巖、無憑無因駕虛豎空、巖外皆天也。正如炎雨初霽、歸雲突起也呼!僧付奴馬、徑入于洞洞。府雄偉巨麗、衆體俱備、奇怪則與遯世窟甲乙也、明麗則與玉溪伯仲也、深邃則與雲水洞上下也。雄特則無與比也。遊山者以周房爲東郡之最者、良有以也。溪南有巖逼、徹上下截斷中外、凜不可見。中間有一帶黑文自上而下。人言周王設行宮于巖上、垂繩于巖以汲澗水、致有是痕。周王之說、已無徵矣。旣無羽翰、何以設宮殿、御臣吏於此乎但見鶴巢之巖、若有托棲寄育之所、而玄裳皓衣之掠馬而過者、亦未之遇焉。其如無分、何其重足爭捷於船巖者?所謂不知命也、又何足論窮源有龍湫、由亂石罅隙乃能達?忠彦穉春厚甫、解冠釋服、跛傾匍匐而從、固巨靈所以秘而不欲廣也。雖從外而回、然所經歷者、使平地者觀之已多危地矣。自山腰一小逕、戰戰而行、入周房庵。庵僧面壁而坐、問周房窟安在?僧引之、步由雙壁之隙、纔容一人之步、不得比肩而行。凝翠淋漓、瓊珠泠泠、衣舃皆濕、冷氣透骨。雖重裘而不可忍也。行近累百丈、有石層層。上作懸瀑之窟、瀑隨潦暵而增損焉。時則方息矣、立數箇木于下以爲梯、惟身輕而足捷者、可以緣梯而上。厚春能之、忠彦卒至半而不得就。上前樓、敬玩瓢隱翁題名翩然而歸、歸路賦詩、詩成入寺禪室。已有燈燭之光焉。境中長老率子弟來會、以爲餞別之計、或在途而不及、將以明朝入寺、蕉翁曰:"不遠數舍而至、明日之行、其可浼浼乎?恐少遲一日。"翼日會者及午方畢、合殆三十人、復入于旗巖下、坐石臨水、酒數行、各以絶句寓送別之意。有樵僧滿擔皆水、丹叢無亦苦遊人之逐踏殺景以戲之耶?上寂照庵、庵前有霜柿正紅、僧摘取以供之。余袖而出如得丹棗蟠桃、歸而爲北堂之壽也。由白雲庵坐、於大遯山樓出詩、令曰:"今日之留、爲諸老也。明將散歸、老人相別、異於少年、可以古詩沈約韻寫懷、勿復言詩也。"卽就座間有周房雲水優劣之論、崢嶸不相下。蕉翁曰:"詩令雖定、不妨暫違成一律、以解之。"又以鵝湖韻贈先生、意甚珍重感慨。先生酬二詩、他人不與焉。隱侯韻非尋常唱和之比、一人滿堂之語、有足以感人。在末席者、當有慰安之辭。拙句敢及之。蕉翁曰:"嘻厚意不可但已、況又有以請一言乎?"復破令重和其韻、而畀之所以責勉者、尤切長德之賜、何可忘乎?先生又如蕉翁之爲、而寄一篇拜手、又汗顔也。十日之遊、未始不爲無所得也。自始發計將一旬、而無風雨之戲、又得蕉皤公蕭灑風流、以極物外之興、爲一行之幸。不能無遺憾者存、不得跨八角之頂、以手掬仙漏而振天池、目見雷雨之感、如野人之云、又不得上白雲而窮東海、以盡對馬關月之界。周房之外、偶有荷嵇笛而過者、將欲罄行槖、而雇其音其人陡立路左、一顧而不復應、飄然而擧、顧眄之頃、已失形影之處、無或逃世之流、得廣陵之妙、而不屑於見知邪?是可恨也。甲辰主客俱出寺樓將別、主人不之別、請騎馬而先行、到三宜、遙見松壇之上、若有鋪席等候之儀、迫之俱。下馬敍坐、杯盤繼之、良久而罷、然後別至麻坪瓢隱山下分路焉。由靑雲白鶴館而下、宿吉山金百源而還。蓋遊山有尋山水脈絡而遊者、如淸涼八公是也。有窮洞壑源頭而遊者、如伽倻太白是也。頭流取眺望也、主屹取幽敻也。夫日月一枝遵海而東南馳而西、玉溪在其間、而東北流于海西而北者、爲周房。南者爲普現中者、爲吾道雲水與周房源頭相當、末流合一、由靑雲過眞川、而達于陶淵、依吾道而行者。西北流于方壺、脈絡累分、澗壑異法、不可以一貫論也。是以見之者、各隨形勝旋開眼目、如伯夷太公並行而不悖、禹稷顔子隨時而得中。如濯去舊見、以來新意、如飽經辛苦、一朝怳然。有循階而逐等、有先難而後獲、要之至於脚力疲盡、眼目怳惚、至欲回頭而反筇、必低頭而不見前面、着跟而不思後路、惟尺寸向進、然後始到眞源。其所謂眞源者、未必是眞箇源頭、而所以從之者、或者其如是夫。己丑陽月之乙卯記。

 

晩翠堂重修記[己酉]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廟檜壇杏不可復徵、而闕里顔亭至今宛爾者、何哉? 所得之理旣盡、則物固有變也。廢復之爲賢、則傳脩之無窮也。萬年之松有限、而是堂之依舊者、何異焉蓋松隱公松亭之詩、揭在壁上、而晩翠之堂繼起。抑未知幾修而至此也、己酉秋宗兄語于族人曰:"君等但知游燕于斯、講敦隷業之樂、矢壺琴觴之勝、抑亦知我家經紀之所由乎?是堂之作、始在萬曆壬午、而其成甲申也。壬辰之亂、甫以免蕩燼、其後喪難仍之殆無以葺理補修。先君子夙夜憂遑者、幾年矣、"肅廟、辛卯易其東南數十椽、丁未依舊制立寢息之室三架。今所謂復齋是也。及先君子捐世、不肖我惟先志之墜失是懼、而堂之全體圮落、非一大用力不能。英廟、甲申改棟而易瓦、又修西榮小翼室、庶幾其苟完矣乎!今者西南衝椽合附處、鐵釘挑離、將成大罅隙、承西柱之短拱朽蠧不支、吾已老不能自力矣。將若之何?族人應曰:"是我輩之責也、爾善光敬光性光掌之。"仲弟宗鐸氏應曰:"內室亦先人之遺也、盍並治焉?我自任之。乃分功董事、數十日而訖。楣額俱新、少輩若而人、又躬執榦版、周垣于廟宇、斯莫非宗兄繼守之誠動之也。噫!物無一成而不弊、弊而修之、與

不弊同也。然土木之修易、行誼之修難。先其難而後易隨之矣。因竊感夫地僻山深、碩人韻士之游詠于此幾何?而堂之未成也、溫溪李都憲先生、候松隱公哦詩飮酒而罷、堂之旣成也、西厓柳文忠公先生登臨而勉戒之、旅軒張文康公先生徘徊而感慨。旣歸常問人曰:"萬年松平安否?若李湖隱申懶齋柳拙齋金鶴沙瓢隱芝村諸先生之歌詠、皆出於緬古勖後之意。近古大山李先生坐是而申之以紹述持存之方者數、所謂修其難者、此也!"循是而不懈、我祖裕後之澤、庶幾而堂室之永久修治、已事可考也。何待乎言!

松隱先生金公行狀 눌은 이광정 찬

 

公諱光粹。字國華。姓金氏。本新羅王族。麗時有侍中方慶。事高宗元宗忠烈王。事具史傳。封上洛郡開國公。食采安東。子孫遂大顯。於公爲八世祖。曾大父子瞻。我太宗世。以前朝名臣後。授咸吉道監牧官。不受。挈家入義城之沙村。王父孝溫司直。考諱克諧。中成化謁聖科。以文行名。廉分。嘗評事北道。歸裝有二黃毛。去之。終知禮縣監。實娶司中領延安康載女。以成化戊子生公。幼明爽。甫四歲。與羣兒游。有賈客過而奇之。欲與俱餌以寶珠則却之。九歲。受小學書。聞灑掃應對事親敬長之說。喜曰。如此可以爲人矣。耽讀終日。不輕嬉遊。容辭擧止。與凡兒殊。評事公异之 曰。此兒已有成人儀度矣。一日暮卧憇。蛇墮入懷中。不動。徐解衣紐。俟蛇自出去。聞者異之。評事公早卒。公未及成人。門無功緦之親。而能自經紀庀具。持喪帥履無愆。三年不懈幾毁。旣長。意度恬曠。與人有容。人或有加。反躬自求。不設畛域。平居無惰容。倉卒之際。未嘗疾言遽色。博涉經典。兼通諸子。文詞詩章。蔚爲稱首。性不喜芬華。不屑擧子業。中年。以親命就試。中弘治辛酉司馬。嘗一遊太學。羣居斂容。講說不怠。諸生欲質易學疑義者。咸歸公。時當戊午之後。時象有可虞。不喜久留。一日揖諸生去。同舍以科期挽公。公曰。卜人言命達則年促。豈以浮榮易吾壽哉。遂歸道遇賊。擁公入深谷。迫欲害之。公不爲變。徐曰。汝輩亦天 氓。豈無良心。顧迺爲飢寒所逼。不知攘虔之爲可恥耶。賊中有一人熟視公。遽止其徒曰。此非常人。衛而送之。公旣歸。語家人曰。未幾。士林禍復作。至甲子。如公言。自是謝絶世事。日取古聖賢言。潛心玩賾。夜以繼日。晨興拜家廟。退而與門生學子。孜孜講論。樂而忘倦。常曰。無自欺是吾三字符。素所服膺而未能者也。宅畔有萬年松。枝柯盤屈。蔭可數畝。樂之。常携卷終日偃仰其間。卽自號松隱居士。或稱四休子。又卽南山之麓小潭之上。搆書室數棟。扁曰咏歸之亭。以村名點谷。有取於沂上之意也。每春和物暄。輒携隣朋村秀。風詠而歸曰。不知當日曾氏之樂如何。嘉靖辛酉。公手書老境書懷詩以示內外子孫。越三年癸亥。終 于正寢。享年九十六。臨終。沐浴更衣。隱几屈指自語曰。足矣。有頃倐然而逝。肌膚如生。以是年某月日。奉柩安于縣北大山洞乾坐之原。遠近爭來吊祭。村氓縣吏塡道迎奠。公天性至孝。奉大夫人。親調饋膳。所以順志承顔者。無不用極。大夫人以天年終。公年已衰。而居喪守禮如前喪。弟光復因婦家河隈。每得來期。必倚門西望。日暮不食。待與共床。告歸。輒悒悒終日不樂。家貧。衣食不給。而處之裕如。口不道營産事。平生無纖毫苟且跡。鄕隣稱之以爲無愧顔氏之陋巷云。常以聖狂賢愚之分。在於一心之存否。甚愛西山經。每夜中或淸晨。擁衾誦孟子夜氣章。語學者曰。心本虛明。至百慮不作事物未接之時。本體依舊發見充 養得。此亦一段收放心處。不可昏昧任放去也。嘗作十箴揭坐右。命曰警心。其說本之彛倫。推之行事。修齊之則備具。卽此可知公爲學大槩也。平居。口不道人長短得失。惟古人嘉言善行。喜道之。未嘗虛口。爨婢閭童。亦能習聞而誦之。一日雨霽。杖屨出溪亭。見臧獲服田于路次者。皆擲鉏卧。公不遽前。俟睡起把鋤。迺過去。其德量如此。精力老而不倦。或時値興。肩輿過親故家。詩酒唱酬終日。乃歸。見者稱爲地上仙云。公前後娶。前夫人英陽南氏。士人畤之女。生一男一女。男溏參奉。女適士人金洵。後夫人順天張氏。僉正日新之女。生五女。士人申澤,忠順衛金處善,士人金溫,觀察使柳仲郢,府使李苓爲其壻。參奉有一子世佑。 通禮院引儀。引儀生三子。長士元遊陶山門下。以善行聞。次士亨,士貞。壬辰。從郭將軍再祐。討賊有功。子孫蕃衍。今至百餘人。柳觀察二子。雲龍牧使。成龍領議政。諡文忠公。文忠公德器深厚。蓋有所從來者。

亦樂齋金公致寬亦公外裔。嘗拜旅軒張先生。旅軒問沙村萬年松平安否。因誦公萬年松詩而曰。此老胷中灑落。無一點塵累云。肅廟乙丑。一鄕多士。以公潛德懿行不可終泯。享公藏待院祠。嗚呼。公以厚重之資。精詣之學。施之於時。無有不宜。而當昏朝壞亂之世。知其不可有爲。先幾預避。中經三巨禍網。一時名賢。芟夷殆盡。而能超然高蹈。甘眠無何。鴻飛冥冥。弋人何慕焉。可謂又賢矣。公旣肥跡林泉。享有遐年。其平 生事業。必有表表可傳者。而兵燹之餘。文字散佚。百不存一。公七世孫前騎省郞五應。以公內外諸孫遺事記,輿地所載。裒輯爲一編。屬光庭序次而爲之狀。光庭自惟賤陋。老而無聞。今距公數百載。間雖有風聲之逖聽者。固不敢懸想妄揣。以取秉筆者之深誅。而顧平日高山景行之思。又不能固拒於至誠之來也。乃就本錄。略加竄定如此。而不敢置一喙焉。世之君子亦或垂恕於此云。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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