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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군

[스크랩] 창녕의 지명사를 올리면서

by 남전 南田 2012. 5. 13.

 

창녕의 지명사를 올리면서

 

 

 

 

 

序 說

 

 

지명생성의 시작은 인류역사와 그시기가 같을것이며 사람의 발자취가 닿은곳이라면 어디던지 땅이름이 생겨났을것이므로 지명은 곧인류의 역사 그자체라고할수있다 따라서 지명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시작과 같다고 할수있을것이다 지명의 연구야말로 여러분야 학문의 뒷받힘이라 할수있을것이다 그러므로 국어학연구에만 지명의 연구가 기여하는것이아니라 역사학 지정학 행정학 민속학 에 이르기까지 두루미치는 기본학문이라 인식되고있다

 

지명은 구구전승 되어온것이다 무식이나 유식을 불문하고 지명은 어떤 공통성을 그지역에서 가지며 통용되어왔고 나아가 하나의 지명으로인하여 소속감과 일체성을 얻게되었고 여기에서 한가문의 전통이 효도와 연계되고 한동리의 지명은 애향심을 발로케하여 나아가 애국심과 연결되어 충효정신을 갖게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므로 유연성을가진 어느땅 이름하나가 일 개인에있어서는 중요한의미로 부딛쳐오는것으로 고향을 오래떠난 이에게는 부모와 같은이미지로 떠오르며 곧향수로 향토애로 승화 된다고 할것이다 내가태어나고 자라난 마을이름 뛰어놀던 산과강 아침저녁으로 쏘다니던 들과 냇가 골짜기들과 산등성이 등등의 이름들을 잊을수가없다

 

그래서 고향은 아무리멀리 오래 떨어져살아왔다 하더라도 잊을수없고 타의에의해 잃을수도 없는것이다 지명의 유래를 하나하나 조사하여보면 그속에서 피멍처럼 작고 아린 보잘것없는 향토의 역사가 살아있음을 알수있으며 일개면의 지명유래를 종합하여 재구성하면 그것이바로 향토사임을 부인못하게된다 그러므로 희미하여져 잊어버린 향토사를 밝혀내는데는 곧 지명의연구가 가장빠른길이라 할수있을것이다

 

갑오경장이후 근대적인 제도개혁에따라 우리군내의 지명들이 상당수 변화하는 급변기에 접어들었던것이다 그때 순수한우리말로 불리어져왔던 작은마을이나 땅의 이름들도 한자로 표기가되었다 따라서 종래에 불리어져왔던 지명들이 한자식으로 바뀌어 사용함에따라 100여년도 되지않아서 옜지명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있으니 안타까운일이 아닐수없다

 

고로상전 이백년 (古老相傳二百年) 이라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할아버지에게서 손자에게로 전해져 이백년은간다 한말에비하면 100여년전의 지명이나 일을 기억치못한다 하는것은 너무나 변화가 갑작스럽고 역사의단절을 야기하는일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암시하고 있다고본다또 과거일이라면 쓸어내버릴 잔재처럼 생각하는 풍조때문인지도 모르나 내가살고있는 마을의 먼산의 이름은 고사하고 가까운앞산의 이름조차 모르는 젊은이가 늘고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없다 많은지명들이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있는것도 걱정스럽다

 

먼저 우리향토에 널려있는 지명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몇항으로나누어 지명유래의 일반적인 사항들을 기술함으로서 군 현 의 지명과 읍면 동 리 의 지명을 아는데 기본적인 지침이되며 지명에대한 이해를 돕고자 지명과 향토사와의 연관성을 약술하고자한다 향토사를 재구성한다고 하는것은 어려운일이겠으나 창녕군내의 지명을 모두모아놓은 작업은 자료로서는 산만 하겠지만 부전(不傳)과 산실(散失)을 막으면서 향토의 지명을 후대에 전하는 자료집의 구실을하여 내고향 사랑을 지닐수있게 하리라믿는다

 

창녕군 십경(十景)을 해방전후 창녕군수를 지낸 이항녕(李姮寧:홍익대학교 총장역임)은 다음과같이 읊고있다

 

 

              창녕군십경(昌寧郡十景)

 

一景은 어디메뇨 城山面安心洞天(성산면 안심동천)拂衣台(불의태)넓적하고

樂樂亭(낙낙정)아담하다 그윽한 계곡성듣고 시름잊고있노라

 

二景은 어디메뇨 梨房面江畔(이방면강반)이라 栗林(율림)울창한데 아담한

三間草屋(삼간초옥)達人(달인)이 흰모래 집어 江쪽으로 던진다

 

三景은 어디메뇨 遊漁面 赤布橋(유어면 적포교)라 沙場(사장)은 반짝이고

江水(강수)는 잔잔코나 惚然(홀연)히 다리위에서 갈길잊고있노라

 

四景은 어디메뇨 紫蓮瀑布(자련폭포)물맞이라 웃길을 훨훨벗고 머리위로 찬물받네

마음이 날을것같아 神仙(신선)된것 같구나

 

五景은 어디메뇨 昌樂面 觀龍寺(창락면 관룡사)라 뒤에는翠屛(취병)이요 앞에는

線竹(선죽)일세 藥師殿(약사전)石佛(석불)앞에서 俗氣(속기)씻어보련다

 

六景은 어디메뇨 桂城面 靑蓮庵子(계성면 청련암자)요리조리 굽은길 뵐락말락

좁은길 어즈버 閒寂(한적)한곳은 예뿐인가하노라

 

七景은 어디메뇨 靈山面 靈鷲山頂(영산면 영취산정)거룩한 上上峰(상상봉)에

흰구름이 오락가락 淸風(청풍)이 구름을헤쳐 나의愁心(수심)까지도

 

八景은 어디메뇨 觀音堂獨坐(관음당독좌)로다 내罪를 懺悔(참회)하고 눈물을

흘릴적에 松風이 시름을 실어 洛東江에 띠우다

 

九景은 어디메뇨 南旨面鐵橋(남지면철교)로다 千里벌 가이없고 人家는 희미한데

洛東江七百里(낙동강칠백리)물이 한꺼번에 닥친다

 

十景은 어디메뇨 臨海津淸流(임해진청류)로다 奇岩絶壁(기암절벽) 우뚝한데

모래벌 끝이없네 消憂亭(소우정)한가이누워 世上事(세상사)를 잊노라

 

 

 

아울러 당부드릴말씀은 이게시판의 글들은 과거 비사벌신문에서 사진속의 세분의 선생님들이 발간한 창녕군지명사 를 풀꽃향기 선생님이 힘들게 한문을 번역해서 이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내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지않으면 하기어려운 작업입니다. 자료를 퍼가시는것은 허용합니다만, 올릴때 고생하신분의 성의를 생각하셔서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아울러 이 책을 펴내신 세분의 선생님과 당시의 비사벌 신문사에 다시한번 고개숙여 감사인사 올립니다. -후학 성득용 올림-

 

 

 

 

출처 : 비화가야 사람들
글쓴이 : 우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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