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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남지읍29

낙동강과 용화산 낙동강과 용화산 창녕 남지와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 예전에 함안, 영산, 창녕 선비들과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분들이 낙동강의 도흥나루(道興津)에 모여 사우회를 갖고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뱃놀이를 하니 그 아름다운 정경이 남아있다. 그 일을 기려 후손들이 함안 칠서 계내리에 모현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곳도 답사하니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 광서 박진영, 간송당 조임도 등등 참여자 들이 적힌 명판이 보인다. 왼쪽 벼랑은 용화산의 상봉대(흔히 남지철교산이라 부른다)와 멀리 도흥나루(도흥진)에서 낙강선유를 위해 모이다. 남지 용산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장암리 쪽 용화산, 바로 앞은 낙동강이 흐른다. 낙강선유를 했던 35명 참석한 분들의 후손이 지은 모현정(함안 칠서면 계내리) * 모현정에 걸린 35명.. 2023. 3. 21.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6.25때 인민군의 기습 도하로 최초로 창녕군이 전화에 휘말리게 한 낙동강 나루로 이름난 이이목 나루터. 인민군은 강 건너 의령 땅에서 기습 도하했다.  10. 시남리(詩南里)  시남리(詩南里)는 남지읍의 최북단에 위치한 법정리로 유어면에서 남으로 도도하게 흐르던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산에 부딪치며 서쪽으로 꺾어드는 곳인데 시남리의 북쪽을 흐른다.『호구총수』에 남곡면 청단촌(靑丹村)과 오항촌(烏項村), 신남촌(新南村) 등 3개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구한 말 동리 폐합 때인 1910년에 하나로 합하여 지면서 시남리가 되었다.  시남은 본래 지명이 신남(新南)이었으므로 곧 옛 동명이 ‘새남’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새(曙, 東)는 「새·시·신」으로 변하.. 2020. 12. 15.
이이목나루 옛날 사진 남지읍 시남리 이이목 나루 옛날 사진 6.25때 인민군의 기습 도하로 최초로 창녕군이 전화에 휘말리게 한 낙동강 나루로 이름난 이이목 나루터. 인민군은 강 건너 의령 땅에서 이 나루로 강을 건너 1950년 8월 6일 새벽 기습 도하했다. ◎ 이이목[烏項]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에 있는 나루터 귀이목, 이목, 오목으로도 불리는데 시남 북쪽 낙동강가에 있는 나루터 마을로 북향으로 인가가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에는 상당히 컸던 마을이라 『호구총수』에 오항촌(烏項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루터와 옹기굴로 번창하며 10여호 이상이 살았던 마을은 지금은 2, 3호 뿐으로 마을 터는 휑하게 비어버리고 집터만 있을 뿐이다. 오여정(吾與亭)이 동편에 있다. 이이목의 ‘이이’는 까마귀의 축약 변형 또는 와.. 2020. 12. 10.
망우당 묘소 망우당 곽재우 선생은 도천면 우강리 창암 망우정에서 66세에 돌아가시자 낙동강을 통해 운구하여 고향 현풍 솔례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2019. 2. 13.
망우정에 가다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창암에 있는 망우정에 가다. 망우정 건물은 6.25때 불에 타 재건했지만 그 뒤에 선 <곽망우당유허비>가 오래된 기념물로 기억될 비석이다. 이 비의 비문은 해고 이광정(李光庭) 선생이 쓴 것으로 "文, 武, 儒, 仙"으로 칭한 것은 과연 정당한 평이라고 하며 곽망우.. 2019. 2. 12.
[스크랩] 0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0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해제 장달수 1607年(宣祖 40) 경남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수(洛水:낙동강)에서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제우 등 35인이 벌였던 뱃놀이 사실을 1758년(英祖 34) 무렵 박진영(朴震英)의 증손 박상절(朴尙節)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편집·간행하였다. 1757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쓴 기락편방서(沂洛編芳序)가 첫머리에 있고‚ 이어서 함께 뱃놀이를 했던 정구(鄭逑)· 곽재우(郭再祐)· 박충후(朴忠後)· 장현광(張顯光) 등 35인의 명단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에 기재된 34인의 사적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행장(行狀) 등에서 발췌한 용화제현행적(龍華諸賢行蹟)이 실려 있다. 그 뒤에 1620년(光海君 12) 조임도(趙.. 2019.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