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지명사64 이야기-창녕인물비사(5) / 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이야기-창녕인물비사(5) / 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2025년 5월 2일 연재분양반 이장곤 교리, 천민 무자리 사위가 되다 훤칠하게 잘생긴 나그네가 몹시 지친 표정으로 길가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처녀에게 다가가,“물 좀 다오!” 몹시 목이 말랐던 듯 허겁지겁 부탁했다. 처녀는 힐끗 나그네를 보는 듯하더니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고서 옆에 선 수양버들 잎을 주르륵 훑어 샘물 위에 띄운 다음 내밀었다. 물을 청하는 나그네를 웃으며 바라보는 처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나그네는 말없이 내미는 바가지 물을 받아 마셨다. 급했지만 버들잎 때문에 잎을 후후 불고서야 마실 수 있었다.― 고이헌! 목이 말라 급한데 버들잎을 띄우다니!나그네는 이장곤李長坤((1474~(15.. 2025. 5. 17. 이야기- 창녕인물비사(4) / 마진전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한 합천가장 손인갑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4) / 마진전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한 합천가장 손인갑 창녕 개복면(대합)에 살던 첨절제사 합천가장 손인갑孫仁甲(1544~1592)은 합천의병군의 중군장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아들 급제 손약허孫若許와 함께 마진馬津(유어면 마수원 나루)전에서 순절한 장수이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지당後知堂 손인갑 장군은 밀양 태생으로 부산 가덕진첨절제사를 지내고, 1577년(선조 10년) 관직에서 물러나 1579년(36세)에 창녕 개복리로 의갑, 예갑 동생들과 함께 이거 하였다. 그는 정사 휘악정을 짓고 글을 읽으며 창녕, 현풍 선비들과 교유하며 마을 앞 용호에서 낚시를 하며 지냈지만 28세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첨정, 가덕진첨절제사 등을 지낸 무관이었다.밀양으로 영산으로 왜적을 피해 다니던 경상감.. 2025. 5. 2.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3) / 향리가 저택된 고려문하시중 조민수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3) / 향리가 저택된 고려문하시중 조민수 2025년 4월 7일 연재분향리가 저택瀦宅된 고려 문하시중 조민수 고려 공양왕 2년 창녕현으로 귀양가는 행렬이 현풍을 지날 무렵은 땡볕이 내리쪼이는 한여름 7월(음)이었다. 호송 군관은 고향 창녕으로 유찬流竄[유배]되어 압송당하고 있는 전날의 상관 조민수曺敏修(1324~1390) 시중을 바라보았다. 조민수는 장수답게 우람한 체격에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만감이 교차하는지 말이 없었다.“어찌 대감께서 이 지경이 되셨습니까? 천군만마를 호령하시던 죄군도통사시며 문하시중을 지내셨는데!”“다아! 내 불찰일세. 위화도에서 돌아올 때부터 이성계 무리들의 흉계를 막았어야 했어!”조민수는 모든 일의 시작은 위화도 회군(우왕 14년, 1388)이었음을 깨달.. 2025. 4. 15. 이야기- 창녕인물비사(2) 신초, 공호겸을 잡다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2) 천성만호 신초, 경상감사 행세하던 공호겸을 지략으로 잡다 낙동강 변 멸포나루터에 말을 세운 영산현 원천(지금의 도천)사람 천성만호 지수 신초支叟辛礎(1548~1637), 함안사람 제포만호 이숙과 그의 생질 박진영 세 사람은 어제 그제 내린 비 때문에 도도하게 넘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초의 아우 신갑辛𥑐이 박진영의 누이동생과 결혼했으니 역시 세 사람의 인연은 끈끈했다. 멸포나루는 창원에서 영산 오호리로 통하는 나루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룻배가 보이지 않았다. “여봐라! 사공!”만호 신초가 강 건너 오가리의 나룻배 사공이 사는 초막을 향해 고함을 쳤다. 여러 번 고함을 쳐 불러도 사공이나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공을 찾다가 단념한 신초는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 2025. 3. 28. 이야기 창녕인물비사(1) 명환 한강 정구 창녕현감 이야기 창녕인물비사(1)八서당 건립, 창산지 편찬한 명환 한강 정구 창녕현감 『창녕군지』 창녕현의 환적宦績>을 살펴보면 조선조 때 창녕현감에 금유琴柔, 박한주朴漢柱, 다음에 정구鄭逑 등 세 분의 성명이 올라 있으니 이들이 명환名宦이라 알려졌다. 사실 그 이전에도 여러 현감이 다녀갔겠지만 선조16년(1583. 계미)에 도임한 이효남李孝南 이전의 고을 수령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단종 때(1453년) 창녕현감으로 재직하다 단종 폐위에 사직하고 옥야 내동에 은거한 하척河滌(고려 우왕 1384~세조 1458년)과 성종 25년(1494)에 옥천사 재건을 하려다 신돈의 일로 물의가 일어 중도 포기한 이기담李基聃 현감이 밝혀져 있을 뿐이다. 금유는 동국여지승람에 창녕현의 명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구도호부사, 강.. 2025. 3. 15. 남지 구진산성/ 비화가야시대 산성이다 = 창녕신문 보도 창녕군 남지 고곡리에 있는 구진산성이 비화가야 시대의 산성 -- 창녕신문 보도구진산성은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영산성의 왜군과 싸워 승리한 산성이다. 2024. 11. 30. 이전 1 2 3 4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