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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3) / 향리가 저택된 고려문하시중 조민수

by 남전 南田 2025. 4. 15.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3) / 

향리가 저택된 고려문하시중 조민수

<창녕신문> 2025년 4월 7일 연재분

향리가 저택瀦宅된 고려 문하시중 조민수

 

고려 공양왕 2년 창녕현으로 귀양가는 행렬이 현풍을 지날 무렵은 땡볕이 내리쪼이는 한여름 7()이었다. 호송 군관은 고향 창녕으로 유찬流竄[유배]되어 압송당하고 있는 전날의 상관 조민수曺敏修(1324~1390) 시중을 바라보았다. 조민수는 장수답게 우람한 체격에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만감이 교차하는지 말이 없었다.

어찌 대감께서 이 지경이 되셨습니까? 천군만마를 호령하시던 죄군도통사시며 문하시중을 지내셨는데!”

다아! 내 불찰일세. 위화도에서 돌아올 때부터 이성계 무리들의 흉계를 막았어야 했어!”

조민수는 모든 일의 시작은 위화도 회군(우왕 14, 1388)이었음을 깨달았다.

즉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시발점이 그 일이었음이 훗날 확연해 졌지만…….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 명령에 조민수와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떠날 때는 그는 이성계의 야심과 음모를 예상 못 하고 있었다. 최영과 이성계 간의 요동 정벌 의견은 극명하게 달랐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9일간 머뭇거리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회군을 최영에게 요청하다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회군을 강행했다. 왕의 명을 듣지 않고 회군하면 문책이 따를 것이니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죽이기로 작정한 이성계는 조민수에세 동조하기를 강요했다. 바로 요새 말로 하자면 쿠데타였다.

이제 무능한 임금을 물러나게 하고 최영을 잡아 처형합시다.”

개성에 군사를 끌고 쳐들어가 어렵지 않게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귀양보냈다. 이때 이성계는 훗날을 염려하여 왕씨 종실의 사람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우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조민수는 전임 왕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명분론을 주장하며 당시 명망이 높던 목은 이색李穡의 지지를 받아 뜻대로 하였다. 이성계 일파는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이를 계기로 조민수와 간격이 생겼다.

이때까지 역성혁명의 빌미가 되는 우왕,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말이 대두되지 않았다.

창왕이 즉위하고 7,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성계 일파는 정적 조민수를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조민수가 전제 개혁을 어지럽혔다고 대사헌 조준이 탄핵하니 그만 좌시중이 죄인으로 급락하여 1389년 향리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유배였는데 얼마 후 창왕 생일 특사로 풀려났다. 이성계 일파는 또다시 조민수를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렸다.

이때도 신돈의 자식 어쩌고 하는 소리는 없었으나 공양왕 즉위 전후 우왕의 혈통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대두되었다.

우왕 복위 음모가 탄로 나자 이성계는 그것을 기회로 창왕까지 폐위하고서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그때 우와 창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설이 크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 임금을 세운 조민수를 탄핵하는 상소가 불같이 일어났다. 왕의 혈통과 관련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서인으로 강등된 조민수를 죽이라는 상소에 공양왕은,

민수는 대의를 주장하여 회군한 공이 있으므로 거듭 논죄할 수 없다.”

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거듭된 처형 상소에 못 이겨 다시 두 번째 창녕으로 유배된 것이었다.

 

그 후 조민수가 창녕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데 공양왕 2(1390) 정몽주 등 신진사류들 중심으로 형조에서 또다시 논의, 처형을 강요하였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그 당시의 상소가 우와 창이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며 왕으로 세운 조민수를 왕씨의 종사宗祀를 끊게 한 당이라면서강력하게 여러 번 탄핵했다. 결국, 죽이라는 강요에 못 이긴 공양왕은 9월에,

그들의 말이 옳다.”하고 명하기를

조민수, 변안렬은 그 가산을 적몰하라.”고 처형을 명했다.

가산 적몰 왕명이 떨어질 무렵 조민수는 이미 생을 마쳤던(급서急逝) 모양이었으나 그 가산 적몰 형벌이 집행되니 곧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들던 형벌인 저택瀦宅으로 집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집터는 못이 되고 말았다.

이성계의 최대 정적이 사라지자 역성혁명이 본궤도에 올랐다. 고려 500년 왕조가 문을 닫고 조선 건국 1년 전이었다.

 

<창녕군지> <사화>고려의 마지막 장수 조민수라고 기록되었듯 조민수는 고려말 이성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무신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을 퇴치한 공신이었으며 우왕 때는 왜구를 물리쳐 수시중에 창성부원군에 오르기도 했다.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밀직부사, 판문하부사, 요동 정벌군의 좌군도통사, 후에 좌시중, 안사공신, 도통사 등을 지냈다.

대합면 신당리 묘소와 비가 있는 그 북쪽 골짜기를 마사골이라 불린다. 곧 조민수가 유배되었던 마을 터로 구신당이라고 한다. 그곳은 전에 큰 동리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큰 못이 생겨 신당新塘이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곧 저택으로 조씨 집안이 살던 동리가 폐허가 되고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얘기다.

조 시중의 묘소는 오랫동안 실묘되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조 시중 타계 직전 불상사가 일어날 줄 예견해 작은 무덤을 만들라는 유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묘갈이 없었든지 80여 년이 지나고야 증손 사헌감찰 조연이 계사년(1473)에 단갈短碣(무덤 앞 작고 머리가 둥근 빗돌)을 세웠다고 하니 그런 사연을 말해주는 듯하다.

오랜 비바람 세월에 빗돌은 흙에 묻히고 작은 무덤은 무너져 실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3년 문중의 조씨가 묘소를 찾아내자 문중에서는 천우신조라 하며 묘역을 정화하고 새로운 묘비를 세웠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충모재에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