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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 창녕인물비사(2) 신초, 공호겸을 잡다

by 남전 南田 2025. 3. 28.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2) 

천성만호 신초, 경상감사 행세하던 공호겸을 지략으로 잡다

 

낙동강 변 멸포나루터에 말을 세운 영산현 원천(지금의 도천)사람 천성만호 지수 신초支叟辛礎(1548~1637), 함안사람 제포만호 이숙과 그의 생질 박진영 세 사람은 어제 그제 내린 비 때문에 도도하게 넘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초의 아우 신갑辛𥑐이 박진영의 누이동생과 결혼했으니 역시 세 사람의 인연은 끈끈했다. 멸포나루는 창원에서 영산 오호리로 통하는 나루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룻배가 보이지 않았다.

여봐라! 사공!”

만호 신초가 강 건너 오가리의 나룻배 사공이 사는 초막을 향해 고함을 쳤다. 여러 번 고함을 쳐 불러도 사공이나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공을 찾다가 단념한 신초는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어쩔 수 없소. 왜적이 추격해 오는 데 그냥 있다간 안 되겄소. 그냥 강에 뛰어듭시다. 이 나루는 우리 선조 곡강공 할아버지께서 왜구와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라오.”

15924, 임진왜란이 터지자 만호 신초와 이숙은 제승방략에 따라 김해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418일부터 사흘간을 왜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하는 수 없이 후퇴하게 되었다. 군장을 강물에 던지고 말을 탄 채 강에 뛰어들어 건너 신초의 집으로 갔다. 이튿날 세 사람은 의령 돈지에 은거하던 곽재우를 만나 김해성 싸움을 전하니 곧 의령의병군이 창의하게 된다.

왜란이 터지자 경상감사 김수가 영산현까지 와서 대적하려다가 초계로 후퇴하면서 그 당시 영산현감이었던 강효윤을 비롯해 창녕현감 이철용, 현풍현감 유덕신과 고을 군사들까지 따라 가버려 세 고을은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신초는 곽재우와 협력하면서 영산의병군을 조직하는데 자신은 김해성의 패장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문중의 신방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조방장 신방로, 신유경, 동생 별장 신갑과 부사과 신순의, 곽재우의 사위 신응, 진사 배대유, 배대륜, 송경조, 한강 정구의 문인인 부곡의병장 이석경과 아우 이후경과 더불어 영산성을 피하여 길곡, 성담산성, 고곡산성 등에 은거하며 출몰하는 왜적과 대적하여 싸우고 있었다.

왜적의 대군이 김해성에서 창원, 칠원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 영산 창녕 현풍을 지나 북진한 후 영산은 왜적의 중요 보급로로 이용되어 끊임없이 많은 적병이 왕래하였다. 그 때문에 영산의병군의 활동은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근거지를 자주 옮기며 싸워야 했다.

430, 선조가 피란길에 올라 의주로 파천할 즈음 왜적 제9군 왜장 우시수승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이 세 고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며 큰 무덤을 파헤쳐 보물을 찾아 가져갔다.

신 만호는 곽재우 장군과 연계하여 낙동강으로 올라오는 보급선과 군사들을 막으려고 싸웠다. 영산에 주둔한 왜병이 의령이나 합천으로 가려고 하자 고곡 구진산성에서 의병군이 크게 싸워 막아냈다. 또 강으로 올라와 도천 우강나루와 쇠나리(송진)에 배를 대고 영산으로 보급품을 운송하는 왜적을 곽재우군과 함께 공격해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산 큰들에 사는 공호겸孔好謙이란 자가 불량배를 모아 경상감사라 행세하면서 왜적의 앞잡이(嚮導將)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약탈하고 아군의 동향도 일러바치니 의병군의 활동에 큰 방해가 되었다. 곽재우 장군은 6월 하순 우강 성담산성 전투 후에 만호 신초에게 걱정을 했다.(선조수정실록(20, 257)에는 공휘겸孔撝謙으로 기록돼 있다)

공호겸이란 부역자를 잡아 죽여야 하는데 여러 번 실패했소. 의병군의 동향을 왜적에게 제보하다니!”

신초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내가 그자를 잡아 죽이겠소.”

공가 그자가 힘도 세고 무력도 있다니 용맹한 군사 수십 명을 데리고 가시오.”

아닙니다. 곽 장군! 맛있는 술 한 병과 장사 한두 사람이면 족합니다.”

신초는 공호겸의 근거지로 찾아갔으나 쉽게 만나려 하지 않았다. 문을 지키는 사내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허어! 나는 그대들 대장의 부친과 동문수학한 원천사람 신초요!”

대장 부친과 친하구려? 그럼 기다리쇼.”

어렵사리 공호겸을 만난 신초는 가져갔던 술 한 병을 건네고 내일 모래 계성 신당에 있는 정자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신초는 약속한 날 동생 신갑과 장사 한 사람을 뒤꼍에 매복시키고 공호겸을 맞아 큰 술자리를 준비해 술을 많이 마시게 했다. 공효겸이 대취하자 신갑과 장사가 나타나 손쉽게 잡았다.

공효겸을 목 베어 처형했는데 지금 그곳을 공지기고개(계성 계교에서 명리 사이)라 불리고 그가 살았던 집을 불 지르고 못을 파니 새못(新堤)이라 불리며 첩이 부곡에 살았는데 그곳도 못을 파니 그곳을 가적지加敵池(가잿골)라 전한다.

곽재우 장군이 신초의 지략에 탄복하며 김성일 관찰사에 보고하니 7월 초순 천성만호 신초를 현풍가수(임시수령)로 명했다. 또 현감 자리가 비어있던 영산현에도 제포만호 이숙을 현감(가수)으로 명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정식 현감으로 명하는 교첩이 내려왔다.

<창녕신문> 2025년 3월 21일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