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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남지읍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by 남전 南田 2020. 12. 15.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시남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

6.25때 인민군의 기습 도하로 최초로 창녕군이 전화에 휘말리게 한 낙동강 나루로

이름난 이이목 나루터. 인민군은 강 건너 의령 땅에서 기습 도하했다.

 

 

10. 시남리(詩南里)

 

 

시남리(詩南里)는 남지읍의 최북단에 위치한 법정리로 유어면에서 남으로 도도하게 흐르던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산에 부딪치며 서쪽으로 꺾어드는 곳인데 시남리의 북쪽을 흐른다.

『호구총수』에 남곡면 청단촌(靑丹村)과 오항촌(烏項村), 신남촌(新南村) 등 3개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구한 말 동리 폐합 때인 1910년에 하나로 합하여 지면서 시남리가 되었다.

시남리

 

 

시남은 본래 지명이 신남(新南)이었으므로 곧 옛 동명이 ‘새남’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曙, 東)는 「새·시·신」으로 변하였는데 「새」차자로는「東·斯·徐·西·生·新·金·始·沙·辛·詩·思·訶」등등이었다. 그러므로 「新南」이나「詩南」이나 다 같이「새남」의 차자인 것으로 그 뜻은 흔히 ‘새’는 골짜기 사이의 마을이름에도 사용되었으니 골짜기 마을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골짜기 안을 골안[內谷]이라 부르듯 골짜기 앞이니 신남으로 써 골짜기 앞 동리 곧 남곡[南谷], 골앞[前谷]의 뜻이라 하겠다. 「南」은 앞을 말하기도 하고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니 낙동강과 고곡에서 시남을 거쳐 유어로 넘어가는 ‘진실골’이라 불리는 긴 골짜기 사이(새)의 마을, 골(谷) 그런 뜻이라 하겠다.

오항촌(烏項村)의 오항은 지금도 이이목이라 불리고 있는데 시남 마을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서야 강가에 이르는데 이 고개가 까마귀의 목이라 한다.

흔히 목[項]이라 불리는 곳은 그곳이 아니면 통과하기에 어려운 길목인 요해지(要害地)를 말하는데 그 요해처로서 종요로움이 6·25전쟁 때 실증(實證)되었다.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당시 유엔군은 공산군의 도하지점(渡河地點)으로 유어면의 마수원나루와 월하리 박진나루 쪽으로 예상을 하였는데 공산군은 뜻밖에도 이 이이목나루로 도하하여 영산 방향으로 나아가려했던 것이다. 불의의 도하 기습공격으로 유엔군은 이후 많은 희생을 당하는 격전을 치러야했다. 이곳만 잘 지켰더라면 남지읍을 위시하여 장마·영산·계성 등이 공산군에게 점령되는 크나 큰 참화는 없었을 것이다.

청단촌은 시남리의 동편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장마면 신구리 미구와 남지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시남리 전경

시남리 전경

 

◉ 10-1 시남(詩南)

 

『호구총수』에 신남(新南)이라 촌명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오래된 지명은 신남인데 ‘새남’, 새벽이 열리는 마을이란 뜻이기도 하다. 마을이 동향으로 있으니 어느 골짜기보다 먼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새빛, 새벽 마을인 것이다. 또 ‘새’가 흔히 골짜기 사이 마을을 말하기도 하니 골짜기 마을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진실골이라는 긴 골짜기 사이의 마을이니 그를 뒷받침해 준다.

수개리의 북쪽으로 마을 동남쪽에는 유어를 경유하여 창녕현으로 가는 옛 한길이 있다.

전에는 75호였던 것이 지금은 41호이며, 처음에 경주 최씨가 살았다 하며, 지금은 성주 이씨, 김해 김씨, 김녕 김씨, 경주 최씨, 진양 강씨 등이 살고 있다. 경의재(景義齋 :성주이씨 봉선소)가 있다.

 

◎ 장승백이

시남 마을 입구로 전에 장승이 서 있었던 곳이라 장승백이라 부른다. 전에 방앗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1호만이 살고 있다.

이이목(오항) 고개

◎ 이이목[烏項]

귀이목, 이목, 오목으로도 불리는데 시남 북쪽 낙동강가에 있는 나루터 마을로 북향으로 인가가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에는 상당히 컸던 마을이라 『호구총수』에 오항촌(烏項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루터와 옹기굴로 번창하며 10여호 이상이 살았던 마을은 지금은 2, 3호 뿐으로 마을 터는 휑하게 비어버리고 집터만 있을 뿐이다. 오여정(吾與亭)이 동편에 있다.

이이목의 ‘이이’는 까마귀의 축약 변형 또는 와음으로 보인다. 곧 귀[耳]가 한자로 ‘이’이기 때문에 혼동한 듯하다. 까마귀가 이곳에서 목을 잃은 형국이라 하여 이이목, 오항이라 하였다고 한다.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준다고 하여 예전부터 까마귀를 반포조(反哺鳥), 효조(孝鳥), 자조(慈鳥)라 칭송하여 불리었던 새이다. 또 달에는 옥토끼가 있다하고 태양에는 세발가진 까마귀 즉 금오(金烏)가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래서 까마귀 오(烏)짜가 든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 것이다.

목[項]이라 불리는 곳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도 좁은 통로로서 길목, 물목, 섬목, 건널목 등으로 쓰이고 있다.

 

◆ 애양골[愛羊谷]

시남 마을 동편 입구로 성주 이씨 효열비각과 열녀비가 있는 일대를 지칭할 때 흔히 비각걸이라 한다. 어린 양의 형국이라서 애양곡(愛羊谷)이라 하였다.

 

◆ 이이목 나루

이이목 북쪽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이다. 이 나루를 건너면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이다. 6·25전쟁 때 공산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으려 최초에 이 나루로 도하하였다.

 

◆ 오여정(吾與亭)

이이목 동쪽에 있는 정자로 이 일대가 경치 좋기로 이름 난 곳으로 절벽에 피는 백일홍과 낙동강 푸른 강물, 그 위에 떠 있는 배의 선유(船遊) 등 한때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놀러 오곤 하였다.

오여정은 시남리 산 68번지에 있는데, 양훤(楊暄)의 유게소(遊憩所)였다.

 

◆ 시남골

시남 마을이 있는 서편 골짜기로 고운봉 북쪽 아래 계곡이다. 마을 북쪽으로 이이목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대리골이라 하는데 다락논들이 있다.

 

◆ 시남미[詩南山]

시남 마을 서편의 산을 시남의 동산이라 하여, 시남미, 시남산이라 부른다.

마등에 있는 덤벅굴

◆ 말등어리[馬嶝]

진골 북쪽 산등성이로 말의 등과 같은 형국이므로 말등어리, 말등거리라 한다. 서편에 이이목이 있다. 북쪽에 강을 따라 유어면으로 가는 벼리길이 있어 비리길이라 불리는데 아주 길이 험하다.

산 중턱에 선사시대의 흔적이 있는 덤벅굴이 있다.

← 덤벅굴

 

◆ 비리길

낙동강변 낭떠러지 절벽의 연속인데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월평, 동으로는 유어면 진창 큰소재미로 가는 길이 있어 이것을 비리길이라 한다. 비리는 벼리의 변화로 벼랑의 이곳 지방말이다.

 

◆ 대리골

시남 북쪽 골짜기로 이이목으로 통하는데 다락논들이 있는 들이기도 하다.

 

◆ 험치골

시남미 북쪽 기슭의 골짜기로 대리골 서편이다. 골짜기가 험하다 하여 험치골(險峙-)이다.

 

◆ 진실골

시남 앞에 고곡으로 가는 쪽의 골짜기가 길므로 진실골이라 한다. 고곡리에서 북쪽 시작하여 가장 안쪽 시남을 지나 청단의 북쪽 골짜기이다. 북쪽은 낙동강을 낀 말등어리산과 남쪽은 서북봉 사이의 길고 좁은 골인데 계곡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예전에 관찰사가 대구 - 진주를 오가는 길이어서 관찰사길이라 불리었다. 그 당시 넓은 길로 노폭이 「서발들이」라 하는데 요즘 같으면 3~4m라 할 것이다. 인근 동민들이 해마다 부역으로 길을 닦았다 한다.

계곡안에 진골소류지가 있고 창녕쓰레기처리장이 그 옆에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유어면 진창리이다.

이 계곡 북쪽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산협에 oo굴이 있다.

 

◆ 꿀바대

시남 동쪽에 있는 들을 꿀바대라 한다.

청단 마을 전경

청단 마을 전경

 

 

◉ 10-2 청단(靑丹)

 

시남리의 동부지역으로 골짜기가 깊은데 그 안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도 『호구총수』에 청단촌으로 남곡면의 제일 첫머리 촌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오래 된 마을이다. 청단의 「靑」은 동쪽을 나타내는 데 우리나라를 예전에 청구(靑邱)라 하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청구(靑邱)라 할 때 「靑」은 「東」을 나타내고 있다.

청단의 「丹」은 그 훈이 붉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을, 골[谷]의 옛 말인 「담, 단」의 음차이다. 「담, 단」은 「堂·谷」으로 쓰였으나 「실」로도 불리어 「室·絲·士·沙」로 차자되고 호전되어 「堂·吞·旦·丹·頓·屯·····」등으로 음차되었다.

그러므로 청단은 동쪽의 뜸, 담, 동편 마을인 것이다.

이장이 있는 행정 리로 전에는 29호였던 것이 20호로 줄었으며, 초계 변씨, 김해 김씨, 창녕 성씨 등이 많이 살고 있으며, 봉양재(鳳陽齋)가 있다.

 

◆ 누부실[臥牛山]

청단 마을 남쪽 산으로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우산 누부실이라 불린다. 높이는 145m이다.

 

◆ 비봉산(飛鳳山)

청단 북쪽에 있는 산으로 봉새가 날아오르는 듯하므로 비봉산이라 한다. 높이는 130m이다.

 

◆ 달뜬봉

정월 대보름날 인근에서 제일 먼저 달이 떠 절을 할 수 있다하여 달뜬봉이라 한다.

 

◆ 청단골

미실 북쪽 시남리 청단 마을이 있는 골짜기로 마을에서 비봉산을 가운데 두고 동북으로 두 갈래 나누어져 있다. 동복쪽 공짜기는 합장골인데 청단소류지가 있고 동남쪽 골짜기 안은 마을 뒤라 뒷골인데 고개를 넘으면 장마면 미구리에 닿는다. 길이는 2,000m이다.

 

◆ 잔고개

비봉산 북쪽 청단소류지에서 진골소류지로 가는 작은 고개로 이리로 통하여 유어로 간다. 작은 고개의 「작은」이 「잔」으로 변했다.

 

◆ 진골[長谷]

청단의 북쪽 골짜기로 골짜기가 길므로 진골이라 하였다. 남에서 북으로 유어, 창녕으로 가는 옛 길이 있는 골짜기인데 그 안에 진골소류지가 있다. 진골의 ‘진’은 ‘길다’의 이곳 토박이들의 발음이다.

 

◆ 뒷곡

뒷골이라 하기도 하여 청단의 뒤에 있는 골짜기와 고개로 장마면 신구리 미구마을로 통한다. ‘곡’은 고개의 축약(縮約)이다.

 

◆ 못안고개

청단에서 북쪽으로 합장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못안고개라 한다. ‘못안’의 못은 진골못을 가리킨다.

 

◆ 합장골

청단 마을 동북쪽의 골짜기로 골짜기가 합하여 지므로 합장골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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