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 소설가가 2019년 마산문협 사화집(제6집) <마산사랑, 꿈을 키우다>에
산문 <동강칼국수집과 여산서당廬山書堂>을 발표했다.
산문
마산 중리 맛집
동강칼국수집과
여산서당 廬山書堂
김현우
몇 년 전 석전동에서 살다가 내서읍 중리로 이사를 했다.
낯선 동리에 이사를 오니 이 마을에 사는 아동문학가 최 선생이 그의 승용차로 내서읍내 구경을 시켜주었다.
내서읍의 진산이라 할 광려산, 그 아래에 올망졸망 작은 동리들이 광려천 냇가 계곡과 들판을 따라 함안 땅까지 내려가면서 형성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인가가 드물었을 촌락이 이제는 도시화 되어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섰다. 가장 안쪽 남서쪽에 있는 신감리 골짜기를 오르니 광려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고찰 광산사가 있었다. 거기엔 예전에 숯을 굽었다는 가마- 숯굴이 있었다는 터도 구경했다. 바람재 그 남쪽 이제 진동으로 통하는 터널이 뚫려 마음대로 통행하게 된 쌀재, 그 동쪽에는 무학산이 높이 솟았고 그 아래 골짜기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는 감천계곡이었다. 그러고는 광려천이 흐르는 아래 골짜기로 이제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삼계리 계곡과 그 맞은 편 시루봉을 거쳐 무학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원계리 계곡, 아래 광려천을 건너 맞은편에는 화개산 등산로가 있는 상곡리 계곡, 더 아래 내려와서 중리 상동 골짜기 까지…….
중리 본동은 오래되고 맨 먼저 터를 잡은 동리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리 초입에 삼, 사백년 된 회화나무가 있어 예전 그곳에 성황당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회화나무 고목을 지나 골목을 들어가면 동리 한가운데 마산 중리의 맛집이라 소문이 널리 난 맛좋은 칼국수집이 있다고 최 선생이 안내를 했다.
식당 이름이 <동강손칼국수>란다. ‘동강’은 낙동강의 줄임일 듯하니 함안이거나 강변 마을이 주인의 고향이거니 생각을 하며 칼국수집에 들어섰다. 거기서 소문대로 3천 원 하는 너무나 큰 그릇 가득 양은 많고 가격이 싼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칼국수집을 나오니 바로 옆에 재실로 보이는 기와집이 있었다.
대문간에 붙은 현판은 <역락문亦樂門>이라 걸렸고 마당에 들어서니 건물 기둥마다 주련이 걸렸고 처마 끝에 큰 현판이 걸렸다.
“려산서당廬山書堂”
대청마루에는 불온헌不溫軒과 극기실克己室이란 현판도 걸려 있으니 이 재실 주인의 선비다운 기개와 무예를 닦아 불온과 극기를 추구했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마루를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 올라 마루높이 걸린 <려산서당기>를 읽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던 광서 박진영匡西 朴震英선생의 재실임을 알게 되었다.
최근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 중에 400여 년 전 낙동강 중류의 나루터인 함안 도흥진나루에서 40여명의 선비들이 모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인 기강진(지금의 남지읍 용산리에 있던 의령으로 통하는 나루, 요즘 이곳은 남지개비리길로 유명하다)에서 이십 리 쯤 동쪽으로 떨어진 하류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살던 창암 망우정(도천면 우강리)까지 큰 돛대가 두 개 달린 고배(큰 화물선으로 조세곡이나 소금을 실어 날랐다)와 편주片舟(;조각배)를 띄우고 가진 뱃놀이 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1592년(선조 25) 시작된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1598년 끝난 지 9년 후인 1607년(선조 40)에 함안, 창녕, 영산의 선비들이 낙동강 중류에서 배를 타고 용화산(지금 합강정이 있다) 아래 절경을 감상하며 선유船遊하는 큰 행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모인 사람들은 그 당시 영남의 큰 선비였던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문인門人들과 임란 때 천강홍의장군으로 널러 알려진 망우당 곽재우와 친밀하게 교유交遊했던 의병장들이었다.
그때 그 뱃놀이를 정한강이 참석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게하고 이름 짓기를 <용화산하동범록>이라 하였다. 동범록 35명중에 려산서당의 주인 광서 박진영 선생도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려산서당기> 기문을 읽으니 바로 이곳이 선생의 구거(舊居)임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선생은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필마匹馬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사齋舍(여산재)를 짓고 이곳에서 10여년을 강학講學하며 지냈다고 기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박진영朴震英(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선생은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요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함안의 선비이며 한강 정구선생의 문인이자 의병장 출신으로 광서란 호는 광려산 아래 감천골짝에 살면서 가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는 64세 때 광서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용화산하동범록> 기록에 의하면 그날 동범록에 녹명錄名된 참석자가 35명이었고 회합을 돕기 위해 나온 함안향교 교생들까지 합하면 무려 4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의 아름다운 정경이 훗날까지 전해진 것은 함안의 큰선비 간송 조임도의 <용화산하동범록 후기>를 참고하며 펴낸 박상절(朴尙節)의 <기락편방沂洛編芳>에 의해서였다. 박상절은 39세때 동범에 참석했던 박진영의 증손이었다.
함안 검암리에서 태어난 실재 박진영은 남명 조식선생의 문인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소학을 배운 함안의 선비 황곡 이칭, 논어를 배운 수우당 최영경, 19세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은 한강 정구 모두 남명 선생의 문인들이었다.
종가는 함안 산인 내인리였는데 고개 넘어 광려산 광산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 24세 때였다. 평소 글공부도하면서 무예를 익히던 그는 고향 사람 이령과 함께 분기탱천하여 군인도 아니면서 싸우러 김해성으로 달려갔다. 그때 경상감사가 경상도내 수령 방백들에게 군사를 김해성으로 모아 대적하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4월 13일 왜적이 침입하여 연이어 동래성과 부산성이 무너지고 난 며칠 후인 4월 17일, 그가 김해에 도착해보니 김해부사는 겁을 먹고 도망친 후였다. 그러니 성이 왜적의 공격에 속수무책 변변히 방어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그 혼란 통에 박진영은 김해성 전투 중에 고향 사람 갈촌 이숙葛村李潚(1550~1615)과 영산 사람 문암 신초聞巖辛礎(1568∼1637)를 만났다. 이숙은 정한강 문인으로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선조 24)에 제포만호薺浦萬戶를 제수 받았는데 그와는 동향인에 같은 스승을 모신 인연이 있었다. 또 역시 무과에 급제한 천성만호天城萬戶 신초와는 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바로 그의 누이가 신초의 동생 신갑 辛갑石甲(; **돌 石변에 갑오 甲)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이었다.
주) 신갑(1567~1592); 형 신초과 영산현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움. 1592년 군공으로 사천현감, 진주성 전투에서 25세로 전사, 부인은 동천 박오의 따님, 딸이 셋, 문암 신초의 셋째아들 성유聖㽕로 후사를 이었다. 박진영의 누이는 평생 수절했다.
이숙은 신초와 박진영에게,
“이곳에서 싸우다 죽기보다는 김해성을 벗어나 내일을 기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보국報國함이 좋겠소.”
하고 의병을 모아 창의하여 왜군과 싸울 것을 제안했다.
신초는 동생의 처남이자 제수씨의 오라비인 젊은이 박진영을 살리기 위해 동행할 것을 강권했고 셋은 결의를 굳게 다짐하며 김해성을 탈출하였다. 말을 달려 진영-창원 대산-함안 봉촌을 지나 겨우 낙동강에 다다랐다. 왜병의 추격이 바짝 뒤따라오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낙동강 멸포나루(지금의 함안 칠북면, 창녕함안보 인근)에 도착하니 며칠 전 비가 온 때문에 강물이 불어 도도히 흐르고 나룻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센 물살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하자 신초가 과감하게 말을 몰아 강물에 뛰어 들며 외쳤다.
“고려 때 우리 선조 신사천 할아버지께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하신 곳이 바로 여기요. 할아버지의 혼령께서 우리를 지켜줄 테니 겁내지 마시오!”
급박한 상황이라 신초를 따라 이숙과 박진영도 말에 채찍질을 해 강물에 뛰어 들었다. 무사히 강을 건너 왜병의 추격을 피했다는 이야기가 문암 신초의 행장에 전해온다.
그 후 이숙과 신초는 창의하여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군과 협력하여 함안과 영산에서 협동작전으로 왜병과 싸웠고 박진영은 고향에 돌아와 의병을 모았으며 그의 부친 동천桐川 박오朴旿를 의병대장으로 모시고 활약하였다. 그는 홍의장군 곽재우와 달리 유숭인柳崇仁 함안군수 휘하에서 함안으로 들어오려는 왜병을 막기에 힘썼다. 곽재우 장군이 함께 하기를 박진영에게 권했으나 함안군수와 이미 함께 하기로 약조했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함안군수 유숭인은 정암진 전투 직전 곽재우를 만나 그의 충고로 의병을 모집하고 관병의 전열을 정비하여 정암진 전투 때 패전하여 후퇴하던 왜군과 쌍워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함안을 지키기 위해 창원성까지 나가 용감하게 싸웠으며 그 후 여러 전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 그러나 임진년 10월 진주성 싸움에서 유숭인은 전사하고 말았다.
박진영은 유숭인을 따라 휘하 장수로 크게 활약했으니 사활이 걸린 진주성 싸움에도 참전했던 것이다. 그는 임란 때의 군공으로 25세(1593년)에 군자감 판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간송 조임도가 쓴 행장에 의하면, ‘(1599년) 용궁현감이 되었을 때 연소하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선치를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또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사람을 속량시키기 위하여 자기 봉급을 털었던 일이 있었고, 순천군수順川郡守가 되어서는 명청明淸 교체기에 우리나라에 래부來附하는 중국인들을 우리나라 사람처럼 도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이괄의 난에서의 활약상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관직에서 은퇴한 후, 함안의 광려산 아래에 살았다고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중리 본동에 있는 <려산서당>인 것이다.
진주박물관에 지금 소장되어 있는 갓끈, 옥로, 관자, 실기 목판, 흉배 등 박진영 유품朴震英 遺品은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에 있는 종가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사후에 갈촌 이숙과 함께 함안 도계사道溪祠에 병향幷享되었으니 그의 인품과 우애, 학문과 교육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주) 유품: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03호,
중리 본동의 맛집으로 소문난 <동강손칼국수>집을 한번 찾아와 칼국수 한 그릇 맛있게 잡숫고 그 옆에 있는 <려산서당>도 한번 들려 광서 선생의 ‘불온“과 ’극기‘로 단련하던 구국정신과 학문에 매진하던 선비다운 자취를 찾아봐 주기를 기대해 본다. *
마산문협 2019년 사화집 제6집 <마산사랑, 꿈을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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