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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얘기

일본, 내 유년을 만나러 가다 / 오하룡 시인

by 남전 南田 2024. 12. 24.

* 경남문인협회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복사해 올립니다. 

정말 읽을 수록 가슴이 찌르르 합니다.(지당)

태어난 곳 최근 건물앞에서

일본, 내 유년을 만나러 가다
오하룡 시인


나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지금부터 84년 전이다.  1세기가 가까워간다. 해방되기 5년 전이다. 어쩐지 지금 시각에서 그때를 떠올리는 자체가 도저히 낯설고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아예 그곳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깡그리 잊고 지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젖먹이 적의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당연히 별로 회상되는 것도 없으니 가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곳을 떠올리면 그때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우리 민초들이 억지로 살기 위해 방황하다가 일시 정착한 불편함뿐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이 몰려들어 살던 곳, 무엇하나 제대로 갖추어졌으랴. 그런 곳을 찾아볼 생각을 하는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게 아닐까. 거기다 어쩐지 애국심인지 무엇인지 분명치 않지만 한 번씩 어설픈 내 약력을 들먹일 때 출생지를 일본이라고 쓰는 자체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별로 들먹이기 쉽지 않은 곳을 출생지라고 밝히는 자체가 영 거북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이라 쓸 때는 괄호 속에 고향 구미 산’(, 원래는 칠곡인데 구미로 흡수되었다, 그렇다고 구미에서 산 적도 없다.)으로 표시하여 곁들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어떻든 그런 일본을 가게 되었다. 애비의 호적에서 일본 출생임을 알게 된 아들이 그 주소를 조회해 본 모양이다. 구글인가 뭔가 컴퓨터 추적을 통해 그 번지수를 조회해 보니 건물이 보인다며 한번 가보자고 유혹을 하는 것이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요즘 일본은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 것이 현실이다. 건물까지 보여주니 호기심이 발동한다. 어떤 곳인지 가보기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 변두리, 지금도 여기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내 연고지의 건물은 4층이었다. 이 건물이 주변에서는 높은 건물이었다. 당시는 재래 일본식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처럼 변형되었을 것이다. 1층은 상가 같은데 위층은 일종의 빌라 같은 복합용도처럼 보였다. 저녁에 갔을 때는 1층 한군데가 술집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이 건물이 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여기 모여 살던 조선 낭인들의 사연이. 이튿날 낮에 가서 다시 건물을 보았다. 더 이상 무엇을 만날 수 있으랴. 이 두 차례 방문으로 나는 이 건물 이곳과 작별을 고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 대한 유년의 몇 토막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하나는 내 출생 때의 비화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글에서 조금 비친 적이 있다. 그때 일본도 병원보다는 조산원의 협조로 출산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를 잉태한 어머니도 그런 사정이었다. 순조롭게 순산을 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두상이 좀 컸던 모양이다. 출산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자궁에 머리는 보이는데 산모가 아무리 애를 써도 진척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체되자 산모는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었다. 그제야 급히 서둘러 큰 병원으로 옮겨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그 출산은 기계의 압력으로 머리를 당겨내는 신기술이었는데 그로 하여 한동안 내 머리에 그 기계 자국이 아련히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에피소드 하나는, 그때 할아버지가 조선에서 와서 아들 집에 잠시 합류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에게 겨우 기어다니기를 시작하는 손자를 좀 보라고 맡겨놓고 어머니는 부엌 일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 할아버지 손을 벗어 난 손자가 그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지 원망을 담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 하나는 뜨거운 국그릇을 놓고 밥을 먹는 데 어느 사이 아이가 그 국에 손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혼비백산하여 손에 묻은 국물을 엉겁결에 훑었더니 피부가 그냥 훌렁 벗어지더라는 것이다. 이 흔적도 오래 내 오른손에 남아 있었다. 일본을 가게 되니까 상기해 낸 에피소드였으니 억지로라도 일본행을 잘 한 셈인가.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니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지만 어릴 때도 영민하지 못하여 어른들의 걱정거리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여러 일들은 자칫 잘못될 수도 있었던 사건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억세게 나는 재수 좋은 경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살았던 여든 넘게 천수를 다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유년의 이후는, 두 살 때 아버지의 사고로 인한 급사(急死)로 하여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어버려서인지 기억되는 것도 회상되는 것도 없다. 그런 집안 분위기가 하얗게 되어버려서가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젖먹이를 안고 귀국한 어머니의 고난이 시작되고, 나는 어머니의 평생 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덕분에 오사카성에도 가보고 다이센이라는 넓은 공원도 보고 그 안에 꾸며진 일본식 정원도 둘러보는 기회도 되었다. 함께 움직여준 아들가족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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