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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㉑ /임진왜란 최초 전투와 다대포첨사 윤흥신의 대절大節

by 남전 南田 2026. 3. 19.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
 
임진왜란 최초 전투와 다대포첨사 윤흥신의 대절大節

 

 
<창녕군지>(1984년간)에
― 또 윤흥신은 부산 다대포첨사로서 부산성 싸움에 전사하여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과 같이 동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제3장 전란사와 독립운동, 一 임진왜란, p125)
라 기록되어 있다.
 
윤흥신尹興信(1540~1592년)은 영산현 관노 출신으로 왜란 1592년 4월 14일에 부산의 초입지 바닷가 다대포성 싸움에 분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다대포진 첨절제사이다.
윤흥신은 형부상서, 찬성을 지낸 윤임尹任의 다섯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으니 명문 세도 가문의 자제였다. 그러나 대윤 윤임과 소윤 윤형원의 외척 다툼인 을사사화(명종 즉위년:1545) 때 대윤이 패하여 윤임 일가가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신분이 관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적으로 몰린 윤임과 아들 세 명은 처형당하고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몰살을 면했으나 관노비로 천리 밖으로 쫓겨났다.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때 윤흥신은 겨우 5세에 불과했는데 기생이었던 서모 매향과 이복형 흥제興悌(1540~1592)와 함께 영산현의 관노비로 전락되면서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흥신은 자라면서 몸집도 굵고 힘도 세어 군사들의 수발을 들며 군노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영산의 큰 문중의 자제이며 무주군수, 청하현감을 지낸 신학辛鶴이 찾아왔다, 신학은 무과 출신으로 그 시절 신궁이라 소문이 났는데 흥신에게 궁술과 무예를 가르쳤다.
“앞으로 사면령이 내리면 무과를 볼 수 있는 양반으로 회복되니 무과 준비를 하거라.”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키도 크고 힘도 세어 웬만한 장정들과 씨름이나 창술, 검술을 겨루어 이겼다. 장대처럼 키가 크고 건장하며  얼굴이 씨꺼멓고도 꺼매 놀리기를 굴때장군※ 이라 불렀다. ※굴때장군 : 농으로 몸이 굵고 키가 크며 살빛이 검은 사람의 별명
 
1567년(명종 22년) 윤임의 자손들이 사면赦免되자 27세가 된 흥신도 관노에서 풀려났다. 선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와 형이 복권되었다. 몰수되었던 재산도 도로 찾게 되었다.
관노에서 풀려난 얼마 후에 별시 무과에 급제하고 1582년(선조 15) 충청도 진천현감, 서산 지곡현감 등을 지냈다.
궁술과 용병술이 출중한 무장임을 높이 산 영의정 서애 류승룡이 임금께 윤흥신을 수군의 장으로 천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가을이었다. 경상도 우수영 수군의 부산포 전초기지 다대포진 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곧 난리가 날 것을 예견한 윤흥신은 군사들에게 집중적으로 궁술을 가르치며 힘을 길렀다,
 
왜군이 임진년 4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틈에 상륙한 곳이 부산포의 돌출부 해안인 절영도와 다대포진이었다. 왜군 본대는 영도 양편에 상륙해 부산포성으로 달려갔고 서쪽에 상륙한 일부 2천여 명 왜군은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바로 다대포진을 공격하였다.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조총을 쏘며 몰려오는 적을 맞아 반격하였다. 군사 8백여 명으로 성 위에서 활을 쏘게 하였다. 힘껏 싸워 첫날은 겨우 막아냈다.
윤흥신은 다대진에 와 있던 19세의 작은아들 윤서에게 돌아가 가족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별좌 신효성의 딸 평산 신씨와 결혼을 해 윤성尹珹과 윤서尹瑞(1574~1661) 아들 둘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피란해 나중에 장가면 초곡 심심산골로 숨어 들었다.※
※ 가선대부 병조참판 윤서가 “임진왜란 때 부산 다대포에서 영산 초곡으로 이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창녕군인물록> ‘장마면’ p225)

부산에 서 있는 윤흥신 장군 동상

 
4월 14일(음) 새벽에 부하 장졸과 관속, 장정들을 모아 성 위에 지키게 하면서 결연하게 외쳤다.
“오늘은 적의 대군이 몰려올 것이니 우리는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
이윽고 날이 밝자 왜적 2천여 명이 일시에 동문과 남문 보루를 향해 몰려오며 고함을 치고 조총을 쏘았다. 철환이 비 오듯 성 위로 날아드는데 800여 아군은 겁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을 쏘았다. 윤흥신은 장대將臺에 꿋꿋하게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며 힘껏 싸웠다. 구원병이 없었다. 전력은 시간이 지나자 차츰 떨어졌다. 한나절을 죽자사자 활을 쏘며 싸웠으나 점점 전세가 기울어 적이 동문을 깨고 밀려들었다. 연이어 남문으로도 적이 난입했다. 군사들은 창이나 칼을 휘두르며 싸웠으나 북쪽 동헌까지 밀렸고 서문으로 물러났다. 윤 첨사는 계속 활을 쏘며 밀리다가 나중에는 내아 지붕 위로 올라가 활을 당겼다. 화살이 떨어지자 기왓장을 벗겨 비수처럼 던졌다.
적과 싸우던 형 윤흥제가 동생이 위급해지자 달려와 부상 당한 동생을 보호하려고 꼭 껴안았다. 조총 철환에 맞고 칼에 맞아 그들은 지붕에서 떨어져 절명했다.
며칠 후 시신을 수습하니 형제가 꼭 끌어안고 숨을 거두었는데 동생을 얼마나 힘껏 끌어안았던지 흥제의 손깍지를 풀 수 없었다. 결국 형제가 안고 있는 그대로 입관해 매장하였다고 전해온다. 훗날 부모가 묻힌 경기도 고양 향동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윤흥신은 1604년(선조 37) 6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병조참판에 가자 추증되었다. 아버지 윤임은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어머니 현풍곽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고, 아들 윤서에게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했다.
그의 순절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경상감사를 지낸 조엄이 굳은 충절과 장렬한 대절大節을 아뢰며 훈록을 더할 것을 청하여 윤흥신은 150여 년 후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에 이어 추가로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창녕신문> 2026년 3월 10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