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 신장상(神將像)
선방을 날려라
소야 신천희
옆집에 살던 보미가 이민 갈 때 봄이 따라 가버린 걸까? 봄이다 싶었는데 벌써 여름 날씨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온갖 것들이 타는 갈증에 몸을 비틀고 있다. 그런데도 하늘은 밤에 화장실 가기 무서운 아이처럼 마려운 오줌을 참고 있다. 요실금이라도 걸려 찔끔찔끔 흘려만 주어도 좋으련만 무심하게 참고 있다.
그런 날씨 탓에 유난히 늦게 잎을 드러내는 노나무가 더위를 먹었는지 여태껏 매달고 있던 마른열매를 내던지고 있다. 땋아놓은 댕기머리처럼 치렁치렁한 노나무 열매가 땅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려 싸리비를 들고 나섰다.
내가 자주 다니는 길은 그래도 나은데 잘 다니지 않는 묵은 길에는 노나무 열매가 수북이 쌓여있다. 묵은 길을 쓸려고 비를 들이대는데 다니지도 않는 길을 애써 쓸 필요가 뭐있냐는 생각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렇지! 괜히 헛심 쓸 필요가 없지! 망설임도 없이 싸리비가 일어서고 허리가 펴진다.
자주 다니는 길을 쓰는데 자꾸 뒤통수가 가렵고 묵은 길이 돌아봐진다. 꼭 다니는 길만 쓸어야 하는 걸까? 다녀달라고 쓰는 길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새로운 길이 생기는 거지! 문득 유성이 떨어져내리 듯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묵은 길에 수북이 쌓인 노나무 열매를 갈퀴로 긁어내고 비질을 한다. 비질에 힘이 실려 초등학교 숙제검사 때 참 잘했어요! 동그라미처럼 선명하게 자국이 드러난다. 내가 다니지 않으면 강아지라도 다니겠지. 가시밭도 자주 다니면 길이 되고 아무리 좋은 길도 묵혀두면 없어지는 법이다.
묵은 길도 말끔히 쓸어놓으니 새 길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잠든 손자 바라보듯 흐뭇해서 묵은 길을 보고 있는데 자동차 한대가 스르르 굴러들어왔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씩 들리는 분인데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다. 마침 강아지 사료가 동나 사러가야 하는데 때맞춰 와주었다.
무례를 엿 바꿔 먹고 차를 돌려 얻어 타고 나가는데 마을 어귀 밭에서 임영감이 혼자 비닐을 펴고 있었다. 누구의 말도 안 듣는 옹고집쟁이 영감이다. 마을 길 포장할 때 손바닥만큼 들어가는 자기 땅 사용승낙을 해주지 않고 끝까지 애를 먹였던 분이다. 마지막에 내가 나서자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승낙을 해주었었다.
삼거리 구멍가게에서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차를 돌렸다. 영감님 물 안 갖고 나왔죠? 이거 자시고 하세요. 더위 자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내가 사 드려야하는데 만날 얻어먹어서 어째! 땀으로 범벅이 된 영감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꽃처럼 피어났다. 영감님! 선방 메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그렇다! 묵은 길도 쓸면 새 길이 되듯 마음의 길도 쓸어놓으면 언젠가는 오갈 날이 있다. 내가 이렇게 짬짬이 선방을 날려 온 탓에 꿈쩍도 않던 영감님이 마음을 움직여 길을 포장할 수 있게 허락해준 것이다.
나를 낮추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를 낮추면 상대방은 나보다 더 낮추기 마련이다. 세상살이에 높고 낮음은 없다. 꼭 누가 먼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낡은 이론에 매이지 마라! 선방을 날리는 사람이 이긴다. 선방을 맞은 사람이 더 낮추게 되어있는 법이다. 무조건 선방을 날려라 선방! 그러면 그때부터 그대 삶이 윤택해 질 것이다.
(아동문학가 소야 신천희 선생의 글을 창녕문협 카페에서 복사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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