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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소개

김현우 장편소설 /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출간

by 남전 南田 2023. 6. 20.

 

 

김현우 장편소설 /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출간

 

<창녕신문>에 연재 중인 김현우 작가의 장편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가 도서출판 경남신문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1판 1쇄 발행일 2023년 5월 31일,   신국판 414쪽이며

펴낸곳은 도서출판 경남신문이고  값은 20,000원이다.

 

 

* 뒤표지의 글 /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를 읽고

/ 고려말 신돈의 새 역사교과사를 만난 듯 했다.

- 신용태:사)신돈역사연구회 회장의 <추천사>에서

 

* 작가의 말 (일부) :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가

"편조왕사 신돈의 변론"이 되어 진실을 알게 되길

작가의 말

 

 

편조왕사 신돈은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세운 세력들의 정치적 희생양이요 산물이다.

흔히 신돈을 요승, 사승詐僧이라 조롱하며 역적으로 부정축재 도덕적 타락자로 몰아붙이고 비하하며 온갖 허물을 덧씌워 고려 왕조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처럼 꾸며서 고려사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과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과연 그러한가?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는 그런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 최근 사학자들의 연구발표 결과를 토대로 작가적 추리와 상상, 논리적 분석을 통해 뒤집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뒤집기가 성공할지 말지 걱정이지만.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 세력이 내세운 최초의 핑계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이다.

누가 가짜고 누가 진짜인가? 가짜는 우왕이고 창왕이며 진짜는 공양왕인가? 아니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도 밀어내고 새 왕조를 세우고 임금이 된 이성계가 진짜인가?

가짜는 왕손이 아닌 왕씨 곧 우왕을 지칭했는데 과연 그 아비는 고려사고려사절요두 사서史書의 기록처럼 공민왕이 아니고 옥천사 출신 승려 신돈이란 말인가?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신돈은 과연 요승이고 반역자이며 우왕을 낳은 반야가 그의 비첩이었을까?

먼저 신돈의 당파(무리)가 사면되었다는 두 사서의 기록에서 진실의 한 조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절요<공민왕조> 제일 끄트머리와 고려사<우왕조> 첫머리에 우왕 등극 축하의 관례 따라 특사인 대사면을 단행하였는데 신돈과 그 당여黨與(:당파)의 죄를 사유赦宥(:사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공민왕이 죽고 장례도 치르기 전 우왕이 등극하자마자 신돈의 죄를 뒤늦게나마 사면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그 사면 사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도록 두 곳 모두 <宥辛旽黨> 단 넉 자뿐이다. *

宥辛旽黨 - 신돈 당여를 사유했다.

* <고려사> 우왕 즉위년 갑인년 10월, <고려사절요> 공민왕 (1374) 갑인

그런데 고려사132, 열전45“,에는 끝까지 사유한 기록은 빼버리고 역당 신돈이 개를 무서워하고 활쏘기와 사냥을 싫어했다는 둥 개인적인 취향을 조롱조의 폄하와 비방만을 했다. 그 맨 끝줄 기록은 음담패설이나 다름없는데 늙은이가 여색을 밝혀 양기를 돋우려고 오골계와 흰 말고기를 늘 먹어 늙은 여우의 화신 노호정老狐精이라 사람들이 말했다는 결말은 이달충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널리 회자膾炙되도록 해 철저하게 조작된 <신돈전>은 끝을 맺는다.

- 신돈 및 역적 일당의 ……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늙은 여우의 화신이라고들 수군댔다. 旽及逆黨妻妾, 皆沒爲官婢. ……旽性畏畋犬, 惡射獵. 且縱淫, 常殺烏雞白馬, 以助陽道, 時人謂旽爲老狐精. 고려사132, 열전45.

<신돈전>에는 전적으로 그 초점을 신돈이 부패하고 황음荒淫에 빠진 늙은 중이란 인식을 후대에 갖도록, 또 우왕의 출생에 대해서도 그 당시 떠돌던 세인世人들 소문을 진실인 양 곳곳에 인용하였다. 고려사의 신돈에 관한 기록은 누구누구가 이러 저러 말하더라.“ 식의 간접화법으로 아주 인격 모독적인 모함만 늘어놓은 궤변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위의 두 사서의 기록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만한가?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사사건건 트집 잡고 조롱하며 조그만 흠을 침소봉대하고 그의 개혁 정책을 왜곡, 평가 절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왕을 낳은 반야의 신분도 세인의 소문을 빌어서 왜곡하고 있다.

자기 아들 우왕을 낳은 반야를 멀리해버려 의혹을 사게 한 공민왕의 이해하지 못할 행적은 가짜 왕씨란 빌미를 제공했음이 분명하지만 과연 반야는 신돈의 비첩이고 자신의 아이를 밴 여자를 상납하여 왕손으로 둔갑시켰을까?

반야는 여종도 아니고 신돈의 첩도 아님이 분명하다. 두 책 우왕 2년조에 판사 강거실의 친족이라는 기록이 나오니 그녀는 성이 뚜렷하게 있는 반가班家의 딸인 강반야이다. (그 당시 노비는 보통 성씨가 없었다) 고려사절요30. 우왕 2:1376, 병진년에 관련 기록이 말해 준다.

竟投般若于臨津 斬其族判事姜巨實

-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에 던져 죽이고 그 친족인 판사 강거실을 베었다.

우왕을 낳았다면서 궁으로 태후를 찾아간 강반야를 강에 수장시켜 죽이고 그녀를 궁에 몰래 들인 친족인 판사 강거실을 목 베어 죽였다는 기록인데 고려조 판사라면 정3품 벼슬아치이고 친족은 8촌 이내의 혈족이다. 노비 집안이 아닌 어엿한 벼슬아치의 집안의 딸인 것이다. 엄격한 불법의 도리를 지키는 화엄종 고승 편조가 인척을 여종이나 첩으로 삼았을 리가 없다.

왕사가 된 이후에도 남의 집에 기숙(하숙 생활)했고 그러다 궁궐 근처 송강에 조촐한 집을 지었으니 그때는 반야가 우왕을 낳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였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행각승이 종이나 첩을 가졌다는 것은 억지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그런 사실들 위에 출발하였다.

 

이 글을 소설이라 하겠지만 본격 역사소설도 아니요 실록이나 전기, 평전도 학술적 연구논술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라 하면 좋을 듯하다. 그래서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라 하였다.

예전 사랑방을 떠돌며 고담 소설 몇 가지를 들고 이야기를 팔던 재담꾼, 이야기꾼의 소리라 하면 딱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창작 틀을 벗어나 일목요연한 구성이나 시차 구분 없이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야기꾼이 재미나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고담 소설 원전에 없는 얘기나 상상을 덧붙이고 추임새로 본 줄거리에서 벗어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나 자신의 주장과 해설을 곁들여 추리해 이리저리 종횡 활보하며 이야기를 자유롭게 전개했던 것처럼. 마치 소리꾼이 북채를 잡고 둥둥 북을 두드리며 사설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서양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제자 플라톤이 쓴 불후의 명저 소크라테스의 변론처럼 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한고대 철학자의 말처럼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가 편조왕사 신돈의 변론이 되어 진실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신돈의 출생지 창녕에는 디비짔다’ ‘디비다란 말이 있다.

혁명을 일으켜 독재정권을 무너트리고 새 정권을 수립하면 세상이 디비짔다라 한다. 젖먹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힘으로 몸을 뒤집어 방바닥에 엎드리는 걸 디비다라고 한다. 도둑이 훔칠 물건을 찾느라 뒤지는 것도 집안을 디비다라고 한다.

쟁기로 땅을 갈아엎는 것도, 법정에서 유죄가 무죄로, 무죄가 유죄로 뒤집히면, 고름 상처가 밖으로 터지거나 숨겨 놓았던 비리가 세상에 알려져 놀라게 뒤집히면 디비짔다한다. 이 이야기가 신돈의 변론이기보다 창녕 사투리 그대로 제대로 디비짔으면 한다.

 

그저 독자들에게 요승, 반역죄인으로 회자되는 신돈이 아니라 득도한 화엄종 고승이며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끝까지 화엄종 비구 승려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불국토의 꿈을 이루어 빈부귀천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바꾸려 한 개혁 정신을 가진 의로운 편조왕사로 디비짔으면 한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로 약자나 노비의 편에 서서 남녀의 평등,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살폈으면 좋겠다.

많은 자료 제공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신돈역사연구회 신용태 회장과 회원, 창녕사람들과 문인,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올립니다. 기꺼이 책을 내주신 도서출판 경남신문 직원 여러분께도 절을 올립니다.

 

2022. 5

김현우

* 본문(일부) / 제1장 :

서장序章 진실을 찾아서 

 서장序章 진실을 찾아서

 

* 화엄십찰인 창녕 비슬산 옥천사

 

편조 왕사 신돈辛旽 이야기를 펼쳐 놓으려 하니 생전에 문수文殊의 화신이며 신승神僧이며 성인이라 추앙받았던 그런 특출한 인물을 성장시키고 영향을 주었던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비화가야의 땅 서불, 서벌(;西火)은 영산현으로 고려말의 고승 두 분이 태어난 고을이다. 마을 뒤에 천축(인도)의 축산竺山과 닮은 영축산靈鷲山*이 높이 솟아있고 산기슭에 팔방구암자가 있다는 보림사寶林寺와 대흥사가 있었던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 영축산靈鷲山은 한자로 “수리 취鷲”를 쓰지만 발음은 천축(인도)의 부처님이 설법한 산과 같아 영축산이라 하는데 양산 통도사의 산도 또한 영축산이라 한다.(창녕군지명사)

영축산 그 정기를 받아 같은 시기에 태어난 분 중 한 분은 편조 왕사 신돈이며 한 분은 나옹선사 혜근惠勤 왕사이다. 그들은 어렸을 적 인도승 지공指空 선사가 보림사 반야루에 와서 설법할 때 참석해 큰 감동을 받아 승려의 길을 들어서서 원나라 연경 법원사까지 찾아가 지공에게 배워 득도한 고승들이었다.

 

편조 왕사 신돈이 태어난 곳은 영산 서불, 서벌마을이지만 자라고 커서 비구승으로 구족계具足戒 수계 받고 수행했던 곳은 비슬산琵瑟山 옥천사玉泉寺란 고찰이었다. 옥천사는 신라 때 의상義相 대사가 세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었다.

옥천사는 지금의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었다. 그 골짜기에는 가야 수로왕 때 창건되었다는 화왕산 관룡사와 그 남쪽에 비슬산 옥천사가 나란히 있었으니 가람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어서 지금도 옥천골짜기 명지에는 여러 사찰들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옥천사부터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살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은 고려말 폐사廢寺가 되어 사라지자 세인의 기억에서도 잊히고 버려져 버린 옥천사는 신돈의 어머니가 그 절의 사비寺婢였다고 알려져 있다. 신돈이 성장하고 스님이 되었다는 그 사찰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규모가 큰 가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보면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초조인 의상 대사가 신라 문무왕 10(670)에 세웠다는 화엄십찰중에 비슬산 옥천사가 나온다.

화엄십찰은 대체로 9세기 무렵까지 성립되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북악北岳 부석사浮石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熊州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岬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비슬산琵瑟山 옥천사玉泉寺, 모산母山 국신사國神寺 10개 사찰이다.

 

위의 사찰들 중 지금 현존하는 화엄사나 범어사 부석사 해인사 등의 규모가 크니 당연히 옥천사도 그에 걸맞은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27<창녕현>조에 옥천사가 창녕현의 화왕산 남쪽에 있는 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곳은 곧 화왕산 줄기 남쪽에 비슬산이란 명산名山을 가리킨다.

비슬산이라면 흔히 현풍의 비슬산을 먼저 떠 올릴 것이지만 창녕에도 높이 717m나 되는 비슬산이 있다. 곧 높이 757m(북각봉)의 화왕산 정상 남쪽 주령으로 높이 530m의 관주산과 740m의 성지산이 갈라지며 동쪽 산줄기가 비슬산이다. 비들재鳩峴가 있는 그 남쪽의 350m 높이인 고깔봉으로 이어지는데 이 고산준령이 바로 비슬산이다. 비들재는 지금은 말흘리나 퇴천리에서 옥천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으로 옥천마을 서쪽에 있는 산의 고갯길이다. 오래전부터 길이 넓어 창녕장으로 내왕하는 장길이기도 하였다.

<창녕군지명사>(p207) “창녕읍 옥천리” ‘비들재 일대의 골짜기들항에,

 

비들재는 옥천마을 앞에서 서편으로 창락, 말흘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에서는 비슬산이라 불러 비둘기보다는 닭의 볏(鷄冠)처럼 찌삣찌빗(쭈뼛쭈뼛의 이곳말)하게 생겨 비슬산이라 한다. <>을 이곳에서는 벼슬, 비슬 등으로 말한다.

 

말흘리나 퇴천리에서도 비들재 산등을 비슬산이라 하는데 여러 산봉우리가 톱니처럼 삐죽삐죽하고 닭의 벼슬()과 같이 생긴 산이라 해서 벼슬비슬비들 등으로 변한 것이라 전해온다.

그러나 신돈의 일로 인하여 옥천사가 철저하게 흔적도 없이 훼철毁撤되었으니 자연히 사람들이 옥천사나 비슬산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고 멀리하게 되고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슬산이란 산 이름조차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왜소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여러 사실을 근거로 하였을 때,

신라 때 하주下州라 불리었던 지역인 창녕에 고산준령이 이어진 717m의 비슬산이 있었으니 그 동쪽 편 산록에 편조왕사 신돈의 옥천사, 화엄십찰의 하나인 비슬산 옥천사가 존재했음이 가장 유력하며 분명해진다. 또 한 가지는 비슬산 동편이라 입지조건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신돈이 고려 공민왕 때 대역죄로 몰려 처형당할 때 옥천사도 그 운명을 같이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비슬산 옥천사는 대역죄에 몰려 처형당한 신돈의 재산을 몰수하고 처첩을 관비로 내치고 집을 불태우고 그 터에 못을 파도록 하였던 저택瀦宅이란 형벌의 일환으로 화를 당해 흔적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 편조왕사 신돈의 진실을 찾아

 

야사를 모은 책으로 유명한 영, 순조 때 사람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 “고려말 정사의 문란과 왕업의 일어남고사본말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전조 혁명 때의 역사의 기록은 극히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축수편逐睡篇)

고려사의 여탈與奪*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말년의 사적은 더욱 어긋나고 틀렸다…… 마침내 나라를 빼앗았다……. 고려사를 만든 자는 정인지다. 인지가 세종 문종 두 대에 걸쳐……. (상촌집象村集)

㈜* 여탈 – 여기서는 역사의 논쟁에 더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말함.

그런데, 오직 저 정인지의 무리가 그들의 좁은 마음으로 사실을 왜곡한 기록을 만들어 가지고 마침내 그것이 사실처럼 되어졌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청야만집靑野漫輯)

 

위의 기록은 사실로 보아 이씨조선 건국 60여 년 후(1449(세종 31)1451(문종 1)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있다. 특히 편조왕사 신돈의 관련 기록은 그의 행적과 치적을 격하하고 조작하기 위해 철저하게 왜곡하고 부풀리고 깎아내리고 부정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신돈의 개혁을 망친 것은 공민왕의 배신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처음 신돈에게 정권을 맡길 때 뭐라고 맹세했는가? 왕이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써 부처님(천지신명)께 증명하기를,

師求我 我求師 生死以之 無惑人民 佛天證明

사구아 아구사 생사이지 무혹인민 불천증명

‘대사께서는 나를 구하고 나도 대사를 구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신돈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들고일어나 6년간이나 집요하게 모함하고 헐뜯으며 조작된 익명의 투서를 빌미로 반역으로 몰자 왕은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신돈을 하루아침에 잡아 귀양을 보내면서 한마디 변명이나 해명을 못하도록 어전御前에 부르지도 않았고 아예 만나지도 심문도 없이 유배 보낸 다음 곧 바로 참형했다. 그러니 3년 뒤 공민왕 비참한 죽음도 사구아 아구사…….” 그 맹세를 헌 신발짝처럼 버린 배신의 결과이니 왕이 자초한 것이라 할 것이다.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는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공민왕이 자신 소생인 모니노 왕우에 대해 어물어물하는 사이 신돈의 자식이라 둔갑시키는 단초端初를 남겨 가짜 왕씨를 몰아내고 폐가입진廢假立眞 혁명을 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돈의 행적이나 개혁을 폄훼하고 날조하고 깎아내렸다.

<연려실기술>에는 궁중의 은밀한 침실의 일은 외부의 신하들이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곤륜집崑崙集)라는 옛사람의 기록도 있으니 우왕을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으로 몰아버린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은밀했던 궁중 침전의 시침을 지밀상궁이나 내관 몇몇과 공민왕 자신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신돈의 근본에 대해서 두 사서에 가문이나 부모 등 근본을 밝히지 않고 얼버무리며 그 어미가 옥천사 사비였다고만 하면서 어릴 때 승려가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132, 열전45, 반역6“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辛旽, 靈山人, 母桂城縣 玉川寺婢也. 幼爲僧

신돈은 영산 사람으로 그 어미는 계성현 옥천사 여종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한술 더 떠서 신돈도 옥천사의 종이라 기술했다.

편조는 영산현 옥천사의 종이다. (照靈山縣玉泉寺奴也)

왕이 신돈을 진평후로 봉했다. (王封旽爲眞平侯)

 

위의 기록 원문을 보면 처음에는 신돈, 또는 편조라 했지만 그 이하 기록에는 성이나 승명僧名의 앞 자를 뺀 ’ ‘한 자만 있어 편조왕사 신돈의 이름자마저 낮추고 훼손하고 폄훼貶毁한 흔적이 뚜렷하니 그가 시행한 개혁 조치는 말할 것 없고 행적까지도 악랄하게 깔아뭉개고 깎아내려 왜곡 비하해 버린 것이다. (최근 한글 번역본에는 성명이나 승명을 제대로 복원해 놓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돈사상연구회가 펴낸 자료집 영산신씨 가계도”*에 의하면 신돈은 영산신씨 초당공파 후손 초재 신원경辛原慶의 아들로 11세손임을 밝혀 놓았다.

* 주) 이정란/ “신돈의 영산신씨 가계와 가족들” 발표자료집 p29(2017년) * 영산신씨 세계도 : 자료집 p15(2019년)

 

그러나 영산 신씨 족보에는 신돈의 이름이 등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자는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리지 않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산의 세가 신원경의 처는 임씨林氏였다. 어려서부터 신돈이 옥천사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임씨가 아닌 절의 여종이라는 여인이 키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돈을 낳은 어머니는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아이를 키운 여인은 신돈의 유모라 추정된다. 흔히 예전에는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죽는 일이 허다하였고 부잣집에서는 유모를 데려서 아기를 키우는 일이 흔했으므로 신원경의 전처나 소실이 해산하다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신돈이 역적으로 몰려 참형되었을 때 신돈의 형제 신순과 신귀가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고 또 이부異父 동생 강성을姜成乙도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신돈이 장성하여 강성을을 만났을 때는 여전히 부친 초재 신원경이 살아 있었다. 그러니 멀쩡하게 살아있는 양반 대갓집 남자의 첩인지 후실인지 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혼인하였다는 것은 그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성을을 낳은 여인은 신돈의 유모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신돈이 옥천사 여종의 아들이라는 기술은 좀 의문스럽다.

계성현감(?)인 신원경과 옥천사 비녀婢女 박씨 사이에서 난…… *

* 김영일, 신돈의 위민정책…… 자료집 p25(2019년)

위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옥천사의 여종 박씨라고 하고 서자라고도 했는데 고려 시대 이전부터 조선조 말 노비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노비는 보통 성이 없고 이름만 불리었다. 그러니 편조를 어릴 때부터 돌보고 키웠을 여인의 성이 박씨라 했으니 그 신분이 절의 여종이 아니라 농민의 아내나 상인常人으로 절에 의탁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던 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신돈을 어릴 적부터 돌보게 된 여인 박씨가 신분이 양민일 것이고 젖을 먹여 키운 유모일시 분명하다면 절의 여종이었고 또 그 아들도 종이라는 것은 악의에 찬 모함이라 할 것이다.

곧 두 사서의 옥천사 노비…….‘ 운운한 것은 신돈의 신분이 서자고 노비인 천민賤民이라 깎아내리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자가 당치도 않은 공민왕의 왕사로 정권을 잡았음을 조롱하고 비난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심한 왜곡이라 하겠다.

두 사서의 기록을 보면 기가 막힌다.,

 돈은 눈으로 보아도 서를 알지 못했다(目不知書)

 글을 한 자도 알지 못하는데 중이 되어……(目不知書爲僧)

과연 불학 무식한 스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있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이 구절만 봐도 두 사서의 왜곡이 과도하고 철저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절에서 스님이 예불을 올리려면 온통 한문이나 범어로 쓴 불경을 암송하거나 읽어야 하는데 글을 한 자도 모르는 자가 행세를 할 수 있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김창현 고려대 교수는 신돈의 삶과 역사적 위상“(학술대회 발표자료집 10~11)에서,

……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었기에 글자와 문장을 배워 불경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이 누차 신돈과 담공談空(;에 대한 담론)했다고 하는데 신돈이 아무리 총혜聰慧하고…… 들은 풍월로만 불교에 해박한 공민왕과 반야심경의 을 담론해 설득시킬 수 있었을까하면서 승려 편조가 불경 이해 수준이 높고 참선 수행을 해서 득도했다는 사실을 속임수라 단정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각설하고,

국회 청문회에서 흔히 진실을 묻는 질의응답에서 ! 소설 쓰네!” 하는 소리를 종종 듣고 보았다. 사실 소설가로써 그 말을 들을 때 조금은 섭섭했다. 소설가는 정말 거짓말만 하는가? 아니다. 사실을 그 이면까지 통찰해 상상력을 통하여 분석하고 파헤치고 있음 직한 진실이나 사실史實에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 피나는 작업을 한다. 곧 작가는 진정한 견자見者로 사실의 진수를 바로 보기 위해 애쓴다.

이상 여러 가지 정황을 전제로 해 이야기를 펼치려고 한다.

이제 편조왕사 신돈의 사실이 철저하게 왜곡되고 부풀리거나 깎아내리고 숨겨져 버린 진실을 찾아서 장막을 열고 떠나보자.

 

* 저자 소개 / 소설가 김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