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㉔>
근대 영남권의 대표적 유학자 심재 조긍섭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영남권의 대표적 유학자로 손꼽히는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1873∼1933)은 창녕 고암면 원촌 출생 대유로 그는 창녕을 중심으로 당시 영남 유학을 주도하여 한말 국내에 크게 알려진 인물이다. 『암서집』 · 『심재집』 · 『조명록』 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니 문필가로도 이름났다.
심재는 11세 때에 『근사록』을 10일 만에 베껴 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고 하는데 아버지 소이재 조병의素履齋 曺柄義(1842~1911)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1911년 부친상을 당하여 두문불출하다가, 1914년(42세)에 원촌에서 달성 가창면 비슬산 기슭의 정대마을에서 은둔하였다.
심재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학자의 자질을 타고난 듯 그 당시 학자들을 만나기를 좋아하여 찾아가 질문하고 토론하며 강론 듣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문인 성순영成純永이 지은 〈가전家傳〉과 이현규가 지은 〈묘표墓表>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심재는 15~6세가 되어서는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의 책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구하거나 빌려서 섭렵했다. 빌린 책을 송독하고 초록을 한 후 돌려주었다고 한다. 배움의 길에 어디든 달려간 것이었으니 17세 때 당시 거유이던 면우 곽종석이 있는 경북 봉화로 찾아가 태극·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1895년(23세) 때 산청 덕산서원에서 남명 조식선생의 문집 《남명선생문집》을 중간할 때 조긍섭은 후손으로서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이후 4년 동안 산청을 오가며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며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898년(26세)에는 사서四書 가운데 의문스러운 점을 가지고 안동 서산 김흥락에게 가서 배움을 청하고 제자가 되었다.
심재는 고암 원천 집안 재실에서 강학을 일삼았다. 그러자 원근의 선비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세도世道가 이미 변해 서양의 이설이 전래하여 확산하는 시기였는데 옛 도의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기울이기도 하였다.
1910년(38세)에 일제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자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에 더욱 매진하니 높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때 사물의 이치를 규정하는 동서의 학설을 비교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결론으로 내세운 《곤언困言》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이후 여러 책을 저술하니 문필가로 당대의 명성을 얻었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도 학문에 대해서는 손을 놓지 않고 책을 저술하였다.
<소이재유고> 3권을 남긴 소이재 조병의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후인 1914년(42세) 2월에 비슬산 북쪽 골짜기의 정산鼎山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중요한 이유는 ‘은둔수지隱遁守志’로 일제 통치 속에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형 위당 조용섭韋堂 曺龍燮(1870~1925)은 유학자로 동생이 비슬산 속에 은거한 이후에도 원촌의 원당서당에서 강학을 계속하였으며 ‘위당유고’ 4권을 남겼다.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찍부터 막역한 교분이 있었던 수봉 문영박과 더욱 빈번하게 왕래하며 교유하였다. 거처에만 은거한 것이 아니라 문영박과 유람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1915년 여름에 서울 개성 평양을 두루 둘러 고구려 땅이었던 만주 안시성까지 여행하였는데 기행시를 여러 편 남겼다. 1918년(46세) 가을에 정산서당이 완성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47세) 1월에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흘 동안 맨밥을 먹고 관을 벗었는데 분하고 슬퍼하며,
“망국 군주의 상복을 입는다는 글이 없으니 내가 무엇에 근거해서 복을 입겠는가.”
라고 하고서 상복 입기를 거부했다. 그 시절 임금이 승하하면 조정 관료는 물론 유림들도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인들이 와서 떠도는 소문을 전했다.
“스승님! 고종황제께서 독살당했다는 소문입니다.”
심재는 제자들의 고종 독살 소식에 마침내 복을 입었다.
3월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총독과 동포 대중에게 보내는 글」의 초안을 잡다가 발각돼 17일간 구속을 당했다.
1919년 3월에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파리장서)를 유림에서 작성하자 심재도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137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는데 창녕 사람으로 청원서에 서명한 유학자는 심재 외에 이방의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과 인재 노도용認齋 盧燾容(1883~1952), 학초 안종달學初 安鍾達(1878~1928), 유어의 이정후李定厚, 등이다.
유림들로부터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고암면의 유학자 간취 김희봉澗翠 金熙琫(1875~1928)으로 대구헌병사령부에 끌려가 3개월 옥고를 치렀다.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28년 별세, 1999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4월에 파리장서 사건이 일경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와 옥고를 겪었다. 이때 심재도 연행돼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 옥고를 당했다.
1922년(50세)에 회봉 하겸진 등 70여 인과 옛날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이 뱃놀이를 했던 용화산 아래에 있는 합강정까지 호미虎尾에서 배를 띄워 낙동강을 유람하였다.
1928년(56세) 겨울에 정산서당이 궁벽하여 찾아오기 어렵다는 문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슬산 서쪽 현풍의 쌍계로 이사하였다. 2년 뒤에 구계서당龜溪書堂이 완성되었다.
1933년(61세) 윤오월 28일에 세상을 떠나니 2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으며 41권의 문집을 남겼다. 사회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심상心喪 3년을 지킨 제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묘소는 대합면 수장리 광덕산에 있으며 고암 원촌 덕암서당에 배향되었다. *
<창녕신문> 2026년 4월 26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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