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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

창녕인물비사(26)/ 영산소작인회, 남지정진당 이주목, 왜인 농민 수탈에 항쟁

by 남전 南田 2026. 6. 6.
 

<이야기 - 창녕인물비사>

영산소작인회, 남지정진당 이주목, 왜인 농민 수탈에 항쟁

 

도사면이 1914년 남곡면으로 개칭된 이후 욱개[남마]라 불리던 강마을 남지에는 왜인들이 대거 이주해 옴에 따라 조용했던 마을에 개발 바람이 불어닥쳤으며 곧 농민 수탈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해 왜정 강점기 내내 농민운동을 벌이며 항쟁을 벌인 선각자가 있었으니 남곡 마산정의 이주목李周穆(1887~1950)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녕지국장이었다.

강점기 시절 기록을 보면 왜인들이 1930년~1935년 사이 창녕면에는 186명~228명인데 비해 남곡면에는 203명~283명이었으니 남지 근방이 일인들의 거주 중심지가 된 것이다. (당시 본군 인구는 9만여 명이었고 일인은 741명이었다.)

왜정은 토지측량을 강행 임자 없는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동양척식회사 등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1925년에 남지, 영산 부근의 늪 지대를 개간하여 1,032정보의 논으로 만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의 소유는 거의 없고 대부분 왜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왜인들은 개간한 토지를 점유하고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총 1,032정보인 영남수리의 대지주가 1위 150만평 소유한 천기농장(신호천기의 개성사), 2위 24만평 소유한 관구농장, 3위 15만평 소유한 권연수(남지), 공동 4위는 각각 9만평을 소유한 동양척식(주), 중로, 팔대곡 등이었다.(동아일보 1923. 10. 13 보도)

이외에 남견농장, 송하농장 등등 대형 농업회사와 농천, 남견, 천상, 천기아가 등등 왜인 대지주가 등장하여 조선 사람에게 소작을 주며 수탈을 자행했다. 그 바람에 남지에는 대형 도정공장, 면화공장, 장醬공장과 땅콩공장, 단무지공장 등이 들어섰고 거기서 생산된 농산물은 모두 그들의 본국으로 가져갔다.

(동아일보 1923. 10. 13 보도)

소작농들이 힘들게 벼농사를 지으면 왜인 농장주들은 타작마당까지 와서 지키면서 수확 벼수량의 8~9할에 가까운 소작료를 받아 갔으니 그야말로 약탈이고 수탈이었다. 이런 농민 수탈을 보다못해 앞장서 소작농을 위해 투쟁을 벌인 인물이 마산리에 살던 이주목이었다.

이주목은 한학 공부를 했으면서도 선각자이며 깨어있는 인물로 지역민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192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녕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년에 마산정에 김기우(전 도사면장)와 재실에 사람들을 모아 한문과 한글, 법률, 나중에는 일본어까지 가르치기도 했다. 왜인들과 부딪치며 살아야 하니 상대하려면 일본어도 쓰이기 때문이었다. 야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1932년 경남도 처분으로 폐쇄되고 말았는데 “80여 명 아동이 통곡하는 일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32. 11. 29 보도)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맞서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문화운동이 1923년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주목은 경남의 대표로 선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 1923. 3. 14 보도)

(동아일보 1932. 11. 29 보도)

신문 구독 권유와 기사 취재를 위해 군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각종 동향과 왜인의 수탈행위를 직간접 경험하니 누구보다도 먼저 소작농의 어려움을 잘 알게 되었다. 동아일보 등에 기사를 보내 농민들의 수탈당함을 보도하였다.

영산 3·1운동을 했던 구남회, 장진수, 김추은 등 영산 사람들이 주축이 된 영산소작인회를 1923년에 조직하자 이주목이 위원, 대표가 되어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시절 지역 농민운동은 조선인 지주에 대한 투쟁에서 일제 식민지 수탈제에 대한 투쟁 양상으로 번졌다.

1923년 소작운동을 조사, 조화調和코저 한다는 일인 지주들의 총회에 영산소작인회 대표로 이주목이 참석하여 조선 소작인의 침탈과 소작료 인하 등 요구사항을 연설했다. 연설 도중 창녕경찰서에 체포되어 밀양 검사국으로 호송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동아일보 1923. 11. 14 보도)

그 후에 이주목은 남지에서 1927년 6월에 남지정진단을 조직하여 조선 소작인들을 단결하게 하여 계속 투쟁을 벌였다. 영산소작인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상립, 조정병 등이 합세하였다. 남지정진단에서는 8~9할이던 소작료를 받지 않도록 하는 투쟁을 왜인 지주들을 상대로 전개하였다. 정진단 간부들은 소작인들을 이끌고 대형 왜인 농장주들을 방문하여 항의, 소작료 인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 영산소작인회가……이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이 분화되면서 투쟁의 중심도 영산에서 일인농업침투지역인 낙동강변 남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남지정진단은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 단체로 창녕군 남곡면 마산정에 본부를 두고…….(독립기념관 발행 『월간 독립기념관』(1990년 5월호) 「경남 창녕군 영산의 3·1운동”(이정은)」참조)

 

1927년 시작한 투쟁으로 천기농장과 같은 영남수리조합 대규모 일제 농업침투 · 수탈에 대항해 일어난 소작인들의 단결과 투쟁에 농장 측은 굴복했으니 소작료 8~9할이던 것을 몇 년 사이에 6할로 끌어 내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일보 1934. 10. 20 보도)

이주목은 계속해서 창녕농민조합연맹을 결성해 위원장이 되어 일제식민지 농업 수탈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경남 전역으로 농민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1931년 경남농민조합연맹을 발기했다. 설립 참여 단체는 고성, 언양, 김해, 함안, 창녕, 의령, 진주. 낙동강 농민조합 등 8개였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알고 위원장 이주목에게 농조 해체를 10여 차례 요구, 불응하자 일제 경남도경찰서로부터 창립 금지와 일체 집회 금지까지 당하고 중요 간부 7명을 피검하자 부득이 1934년 강제로 해체되고 말았다.(동아일보 1934. 10. 20 보도, /[당국 간섭으로 창녕농조 해산] <중요간부전부 피검>)

 

곧 이주목을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항쟁한 중요 위치에 있었다고 최근 학계에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

 

<창녕신문> 2026년 5월 25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