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그리고 용화산
김 현 우
내 고향은 창녕 남지다. 누구나 잘 알겠지만 남지는 강마을이다.
그곳은 낙동강 칠백리 그 중간쯤에 있는 영남들, 동갯들이란 들판을 배경으로 강가 모래톱에 오순도순 초가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정겹게 사는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는 장강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 건너편 함안 땅에는 십리나 길게 뻗은 용화산이 있었는데 강마을 아이들은 그 산을 바라보며 자랐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칠백리 앞 강물은 언제나 푸러
용화산 구구봉에 흰 구름 뜨고`````”
하고 교가를 배우고 불렀는데 용화산은 그렇게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정답게 살아있었다.
아이들은 평소 용화산 구구봉 어쩌고 하는 노래만 부른 게 아니었고 자주 달려가 구르고 뛰던 놀이터가 흔히 철교산이라 부르기도 했던 용화산 기슭이었다. 특히 명절 때면 아이들은 강을 가로 질러 걸쳐져 있는 남지철교를 걸어 건너 용화산으로 놀러갔다.
아이들만 간 게 아니라 봄이나 가을이면 처녀 총각들도 떼 지어 희희낙락 강 건너로 놀러 갔다. 어른들도 장구나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춤을 추면서 화창한 봄을, 기암절벽에 핀 단풍을 즐겼다. 어느 해인가 합강정 하류 동호(도흥) 나루터로 뱃놀이 간 처녀들이 나룻배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몰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 올 만큼 용화산 기슭은 기암절벽이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남지철교 동쪽까지 이어져 있어 뱃놀이가 예전부터 성했던 곳이기도 했다.
용화산은 낙동강이 저 멀리 북쪽에서부터 흘러오다 남강을 만나 더욱 강폭을 넓히면서 그 주류를 동쪽으로 구비 치게 하는 산이다. 아마 용화산이 없었다면 강물은 거침없이 남으로 똑바르게 흘러갔으리라. 그러나 용화산에 부딪쳐 강물이 동쪽으로 향하게 되니 이 지점이 거룬강이요, 비로소 낙강(洛江)이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지명유래가 있다.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전승지로 알려져 있고, 낙동강의 풍치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그래서 도흥나루와 인연이 깊은 한강 정구 선생을 비롯하여 여현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선생 등 35인의 선비들이 용화산 아래 강줄기를 선유한 기록이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용화산하동범록 (龍華山下同泛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8년이 지난, 1607년 3월 28일, 영산현 창암(지금의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변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던 망우당 곽재우 선생을 비롯하여 향리의 선비 간송 조임도 등등 35인의 선비들이 모여 간송 선생의 부친 입암 조식선생의 재실 합강정에서 곽재우 선생의 우거인 망우정까지 선유(船遊)한 일을 가장 나이가 어렸던 간송 선생이 정리해 놓은 기록물이다. 이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절실한 형편이다. 그 당시 선비들이 이 일대의 경치를 크게 즐기며 교유(交遊)했으니 이곳이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땅임을 지금도 알 수 있게 한다.
간송 선생은 이 일원 절경을 8폭 병풍에 남겼다고 하나 전해 오지 않는데, 그 팔경을 꼽아보면 (1) 용화암 (2) 청송사 (3) 도흥보 (4) 내내촌 (5) 경양대 (6) 시우포 (7) 평사면 (8) 창암사 등인데 용화암은 용화산의 주봉이거나 지금 절이 있는 철교산의 절벽, 동흥보는 용화산 북쪽 나루터로 마산과 창녕→서울을 통하던 옛 과거 길이었던 지금의 도흥나루, 내내촌은 지금의 칠서면 계내리 마을, 창암사는 망우정이 사셨던 강변 바위와 절벽인 우강리 창암임을 알겠으나 나머지는 알 수가 없다.
(본 원고 제출후 확인결과 5) 경양대는 남지에서 제왕담이라 불리는 웃개나루 건너편에 있는 덤이다)
용화산의 강 건너 북쪽 창녕 땅에 있는 용산과 어울려 어느 쪽은 암룡이요 어느 쪽은 숫용이라는 얘기가 전해 온다. 북쪽 용산은 동에서 서쪽으로 그 몸을 비틀며 힘차게 강을 거슬러 오르며 그 머리를 강물에 박으니 곧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인 거룬강(기강, 岐江)에 이른다고 한다. 거룬강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고지명으로 기음강이 곧 <가야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용산 마을 앞에는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라는 동산도 있어 큰 인물이 날 명지라고 전해오고 있다.
강 건너 남쪽 용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강물이 흐르는 쪽으로 그 몸을 누이고 있는 용화산으로 용두(龍頭)로 알려진 곳은 남지철교 동편 산줄기가 뻗어오다 강가에 닿은 큰 절벽을 이룬 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계내마을의 이 덤은 80여 년 전 남지철교를 건설하면서 신작로를 만들기 위해 산줄기를 잘랐는데 바로 그곳이 용의 목줄기라 붉은 피가 몇 날 며칠을 흘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곳 칠서면 계내 마을은 함흥차사가 아닌 함안차사의 얘기가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또 이 마을은 밀양 손씨 세거지로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가 살았는데 그가 손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곧잘 용화산의 용이 아무 손상 없이 목이 잘리지 않고 성했더라면 이 마을에 더 큰 인물이 태어났을 것이라 한탄을 하곤 했다. 그 친구는 불행하게도 일찍 저 세상으로 갔다. 철교를 지날 때면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었다는 재실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곤 한다.
우리는 자주 남지철교 동쪽에 있는 거목 은행나무가 뿌리박고 있는 절벽에 가서 놀곤 했다. 은행나무는 남지 용산에 살았던 큰 선비 간송 조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 온다. 그 근처에는 홍포서원의 유허비도 있고 ‘용화산하동범록’에 나오는 35인의 선비 후손들이 지은 모현정과 어느 문중인가의 재실도 있었다. 은행나무 고목은 어느 해인가 불이 나서 남지소방서에서 출동해서 불을 껐지만 고목 등걸의 속이 다 타버려 거죽만 남았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수백 년 그 인고의 세월을 고스란히 지니고 아이들에게 늠름한 자세를 여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간송 조임도 선생은 함안 사람이라면 모르는 분이 없으리라. 그 분은 남지 용산에 살았지만 원래 함안 사람이었고 거룬강 하류 용화산 북쪽 기슭의 정자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니 바로 그곳이 합강정이다. 합강정의 앞에도 철교의 은행나무처럼 고목 은행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 나무는 숫나무이고 철교 것은 암나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면 은행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달렸는데 모두 간송 선생 집안에서 수확해 간다고 했다.
용화산 용머리 덤 하류 쪽으로 산줄기가 뻗어나가서 그 끝에 또 커다란 바위 절벽이 올연(兀然)히 솟아올라 강물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제왕담이라 부르는데 현재 마산 상수도취수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제왕담은 예전에 강 속에 사는 용에게, 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오는 절벽이다. 이 절벽 아래는 수백 길 아주 깊은 담소(潭沼)로 그곳에 용이 산다고 했다. 용은 살아 꿈틀거리는데 성이 나면 큰 비에 홍수를 일으키는데 그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 돼지를 산채 강물에 던지고 제사를 지내 용의 심술을 잠재우곤 했다. 아이들은 그 용을 강치기라 불렀다.
제왕담 동쪽은 나루터이다. 웃개나루는 남지의 옛 마을 이름으로 칠원쪽 나루터는 칠원웃개라 불리었고 지금은 진동인데 이 나루터는 칠서, 칠북, 칠원면 마을 주민이나 아이들이 웃개장이나 남지중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종요로운 곳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왕래해 나루터가 크게 번성하기도 했었다. 6.25때는 남지철교가 폭파되어 다닐 수 없게 되자 배들이 승객과 함께 버스나 화물차를 실어 나르는 배가 다니기도 했다.
요즘도 용화산은 남지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철교를 건너 용화산을 오르고 산기슭에 만들어진 체육공원에서 운동을 즐기고 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보면 당연히 낙동강 그 푸른 물길이 서늘하게 가슴을 가로 질러 흐르고 용화산 아흔 아홉 봉우리의 흰 구름이 여유 작작 눈앞에서 또 흘러가니 고향 생각에 낙동강과 용화산이 빠질 수 없다. 오늘도 용산에 있는 선산에 서서 남쪽으로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용화산을 바라본다. ****
(이 글은 함안문인협회에서 2010년 12월에 발간한 사화집 『여항산 그림자 낙동강에 드리우고』에 실렸다.)
남지철교, 낙동강 건너 보이는 산이 용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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