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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스크랩] 단편소설 / 벌초(伐草) / 김현우

by 남전 南田 2011. 12. 28.

 

 

단편소설

벌초(伐草)

김현우

 

해마다 속을 썩이며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은 풀 베는 기계였다. 풀 베는 기계를 예취기(刈取機), 예초기(刈草機)란 어려운 한자를 쓰는데 왜 그런지 겨우 초등학교만 나온 박덕만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풀 베는 기계’하고 풀어쓰는 말이 길면 손톱깎이처럼 ‘풀 깎기’라든지 아니면 유식한 학자, 기술자들이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이면 될 터인데 기계를 팔아먹는 상인은 예초기라 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은 예취기나 제초기라 하고·····.

“허어! 풀 베는 기계니까 예초기가 맞지. 예취기는 뭘 베어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니 나락 벨 때 쓰는 콤바인 그거겠지. 벌초란 무덤에 그늘을 만드는 풀을 베어 낸다는 말이니 차라리 벌초기라 하면 되겠네. 이거 주로 벌초하는 데만 쓰니까.”

유식한 부산 형이 알은 체 한마디 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 만 척 대꾸를 않았다.

기계 이름은 그렇다 치고 왜 이놈의 기계가 지난해 벌초 때 사용하고 넣어뒀다 이듬해 다시 꺼내보면 시동이 쉽게 걸리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실력 있고 똑똑하고 무엇이든 잘 만드는 기술자들이 대한민국에 천지인데 기계 하나 똑바로 만들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 박덕만은 지난해 쓰고서 처박아 두었다가 꺼내면 꼭 속을 썩이는 예초기처럼 벌초할 때가 돌아오면 그만 가슴이 벌렁벌렁해지거나 아니면 먹먹해지고 ‘불효막심한 놈!’ 하고 자책감에 휩싸이고 했다. 예초기가 말썽을 부릴 때는 더욱 그의 속도 내려앉곤 했다.

박덕만은 구시렁거리며 예초기를 주물럭거리다가,

“그만 서비스센타 가져 가봐라. 진작 손을 봐라 했더이만 께을만 직이고 인자 우짤끼고?”

하고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아, 아부지가 시간이 안 많습니까? 마산 부림시장 근처 수리점에 가져가서 사전에 점검을 받았으면 될 것을······ 이걸 들고 서촌까지 나가서 고친단 말입니까?”

“서촌 안 가고 어디 가서 고쳐? 이 욕지도 바닥에서 수리센타는 거기가야 있어.”

“내 한 번 더 해 보고요······이거 플러그 탈일 겁니다. 청소를 했는데······.”

아들은 아들대로 구시렁거리며 기계의 시동을 걸려고 이것저것 주무르고 시동 줄을 잡아당기고 또 당겼다. 부산에 사는 형 박덕수와 그 아들이 가져온 기계는 시동을 걸자마자 “왕!” 굉음을 내며 돌아가자 벌초를 시작했다. 무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 칡넝쿨을 낫으로 걷어내며 여전히 기계와 씨름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 박덕만은 서비스센터에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매년 벌초할 때가 되면 박덕만은 속이 뒤집혔다. 그렇다고 제 속내를 주위에 털어 내놓고 하소연하거나 분풀이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저 제 혼자 부글부글 속을 끓이다가 제 풀에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벌초를 하러 가야할 곳이 집에서 완전히 방향이 틀리게 3곳이어서 사흘이 꼭 걸리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벌초를 하러 갈 곳은 서쪽으로 해마다 제일 먼저 벌초를 가는 고성 하일면에 있는 종조부 산소, 남쪽으로 고향 욕지도에 있는 아버지 산소. 물론 고향 욕지도에는 아버지 산소 외에 조부모, 숙부, 고모, 고모부, 사촌 형 등등 일가친척들의 산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김해 공원묘지에 있는 어머니 산소였다. 어머니 산소를 찾을 때마다 박덕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이 된 심정으로 미적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따라갔다. 낫 한 자루만 달랑 들고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것은 벌초하려고 해마다 고향을 찾아가면서였다.

고향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곳이라 그곳을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 데 아들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통영 산양 삼덕욕지여객선터미널에 가 서면 부모, 형제, 가족들과 얽힌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동시에 원망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고향에는 벌초할 곳이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산소 외에 자손이 없거나 육지에 나가 소식이 없이 버려둔 친척들의 묘가 공동묘지에 여러 기 있어 그것들까지 그들의 몫이었다. 부산에 사는 형 박덕수와 조카들과 함께 벌초를 하곤 하지만 형을 만나는 박덕만의 속은 항상 더부룩하고 불편했다. 제 멋대로 웃자라 더부룩한 묏등처럼······.

마지막으로 들르는 김해 공원묘지의 어머니 산소는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되었다. 낫 한 자루 들고 어슬렁거리며 가서보면 묘지 관리인들이 벌써 벌초를 대충해 놔서 묏등의 잔디 몇 줌 베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속이 아주 편치 않았다. 어머니는 큰아들만 아들다워 했지 작은 아들은 못미더워했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십 몇 년을 어머니를 박덕만이가 모시고 살았는데도 그랬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수십 년을 같이 살았던 작은 아들 박덕만의 아파트도 아니고 제법 부자로 부산에 살고 있었던 큰아들집도 아니었다. 딸 둘이 돈을 모아 얻어준 사글세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덕만은 그래서 어머니 산소에만 오면 마음이 찜찜하고 무거웠다. 참 불효자 짓을 했다고 후회를 하는 것이었다. 엎질러진 물을 퍼 담을 재주가 없으니 어쩐단 말인가?

그가 어머니를 박대한 것은 순전히 형 박덕수 탓이었다.

형 박덕수는 언제나 부모의 위세를 등에 업고 요령 좋게 동생을 똥개 부리듯 부렸다. 맛난 것 있으면 어머니 아버지는 먼저 큰아들에게 먹이고 나머지 부스러기 못쓰는 것을 동생들에게 먹였다. 형은 재주가 있고 공부를 잘 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등상을 못 받았지만 반에서 10등 안에 들어가 아버지 칭찬도 듣고 어머니 자랑감도 되었다. 하지만 박덕만은 키만 멀쑥하게 컸지 실속이 없었다. 겁이 많고 머리가 둔했다. 공부는 제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산수 문제 하나도 똑바로 풀지 못했다. 물론 국어책을 띄엄띄엄 읽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집이 좀 부자였으면 형제들이 통영의 중학교에 진학을 했을 터이지만 워낙 고구마 농사만 짓고 쪽배로 고기잡이하던 집안형편이라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형제는 여름이면 조선포 마을 집 앞 바다에 나가서 살았다. 태어나면서 물에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을 앞 무인도인 옥섬까지 헤엄쳐 다녔다. 점심을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집에 돌아가 봤자 먹을 게 없었다. 보리쌀 삶아 놓은 게 전부인데 그걸 훔쳐 먹다가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형과 함께 훔쳐 먹었건만 욕을 먹기는 제 혼자였다. 형은 잽싸게 도망쳤고 어머니는 도망치는 형을 쫓아가지도 않았고 또 붙들고는 더 야단치지 않았다. 그게 차별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겨울에는 고구마가 식량이었으니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 어려운 세월, 박덕만이가 학교를 졸업하니까 형과 함께 동네 이발소에 다니라고 아버지가 그랬다. 그것도 기술이라고 배우기만 하면 제 밥벌이는 해결된다고 했다. 그런데 형은 요리조리 험한 일은 피하고 동생에게만 미뤘다. 샘물을 길어 오는 것도 이발소 바닥의 머리칼을 쓸어 모으는 것도 모두 동생에게 시키고 형은 면도칼만 잡으려 들고 가위만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박덕수는 집안 자형이 타고 다니는 배에 취직을 했다. 자형은 기관사였다. 그러니 자연히 박덕수는 퉁퉁배의 발동기를 주무르는 자형에게서 기술을 익혔다. 동생 박덕만은 이발소에서도 밀려났다. 손이 바지런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주인이 싫다했다. 그날부터 그의 등에는 지게가 붙고 말았다. 욕지도는 소문 그대로 일 년 중요 농사가 고구마 농사였다. 관정, 조선포, 치포······ 옥동 마을 전체의 농토는 모두 산비탈에 있었다. 밭이 비탈이 지니 소를 몰고 밭이랑을 만들려면 노련하면서도 고도의 요령과 기술이 필요했다. 소도 잘 훈련된 소가 아니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해 이랑이 구불구불해 지곤 했다. 아버지는 소를 몰고 밭 갈고 이랑을 모우는 데는 이력이 나서 빈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밭이랑 두둑을 넓고 높게 흙을 쳐서 만들어야 빗물에 밭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 비탈 밭 농사에 가장 무서운 것은 여름철 폭우였다. 그때 쏟아지는 엄청난 빗물이 한곳으로 쏠려 내려가면 사태가 나게 되고 밭의 바닥의 흙이 씻겨 내려가 버리면 그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돌바닥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랑도 활처럼 굽고 둥글게 탔다.

아버지는 소를 훈련시키려고 심심하면 소를 끌고 밭에 가서 쟁기질을 했다.

“이놈으 소가 조금만 늦추면 제 갈 길을 잊어뿌린데이. 그라니까 자꾸 밭을 갈아야 돼.”

박덕만은 덩치가 커지자 농사일 말고도 아버지를 따라 노를 젓는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아야 했다. 그때쯤 형 박덕수는 배의 엔진을 제 마음대로 돌리고 수리하고 기름칠하는 기술을 잘 익혔는지 기관사 자격증을 곧 따게될 것이라 자랑했고 여객선 기관장 보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덕만은 아버지가 어렵사리 장만한 2톤짜리 퉁퉁이배를 몰고 연화도나 초도, 쑥섬, 노대 등 욕지도 주변 섬이나 연대도, 비진도, 사랑도 통영근해나 거제 앞 바다 매물도까지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로 성장했다. 군대 오라는 소집 영장을 받아 놓고 발동기를 수리하다가 오른손을 다치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다. 엄지손가락과 검지 중지 손가락 3개가 잘려 주먹손이 되고 마는 바람에 입대도 못하는 불구가 되었던 것이다.

집안 자형은 박덕만이가,

“집에서 고구마 농사나 짓고 퉁퉁이 배나 타고 노나 저으며 섬 가까이 나가 고기를 잡아서는 젊은 놈이 장래성이 없어요. 내 취직자리 소개할 테니 갈 테냐?”

하면서 소개해 준 곳이 5, 6톤짜리 큰 어선이었다. 그는 출생이후 떠나본 적이 없던 욕지도를 뒤로 하고 18년 전 마산으로 이사를 나올 때까지 어부로 살았다. 그동안 그가 타고 다녔던 어선은 근해 조업선이라 북쪽으로는 강화도, 연평도, 인천 앞바다는 물론 철따라 고기 따라 남해안 부산에서 전라도 근해까지, 동해도 울산 앞바다에서 속초까지 봄가을 가리지 않고 고기를 따라 다녔다. 제주도 마라도 먼 바다까지 나가면 보름이나 한 달을 배 위에서 지내기도 했다. 주로 잡은 고기는 부산 자갈치어시장에 와서 풀었다. 결혼을 하고 집도 장만하고 밭도 샀다.

그런데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박덕만의 나이가 서른여섯이었고 아버지는 환갑을 넘긴지 2, 3년이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숨을 거두는 아버지께서 가라사대 집이고 땅이고 밭이고 모두 장자 앞으로 상속을 한다고 유언을 했다.

“내 옆에 있는 덕만이 너는 자수성가해서 집도 있고 밭도 있고 수협조합에나 어촌계에 돈도 있다면서? 덕수 니 형은 앞으로 조부모, 부모 제사를 모셔야 되니 내 재산이 몇 푼 되지 않지만도 큰아들에게 줘야 안겠나?”

박덕만은 아버지의 말에 ‘그 말이 틀렸소. 같은 아들인데 나에게도 아버지 재산 좀 나눠주소.’ 하지를 못했다. 마음씨 좋은 흥부처럼 그는 아버지 어머니 말에 항상 수굿하게 복종했듯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하시라고 그랬다. 아버지는,

“늬 어미 살아생전에는 명의변경을 하지 말고 살다가 늬 어미 죽고 나거든 팔아 묵든지 말든지 늬 멋대로 해라.”

하고 형에게 신신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아버지 유산을 받았다면 장가가고 딴살림 날 때 받은 300평짜리 비탈밭이 전부였다. 결국 어머니를 작은 아들인 박덕만이 모셔야했다.

형 박덕수는 기관장 조수가 된 이후 수십 년간 제가 벌어 받은 월급은 한 푼도 아버지에게 살림에 보태라고 내놓은 적이 없었다. 착착 모아서 부산에다 묻어두기만 하더니 장가를 간 이후에는 부산에 살면서 명절 때 형수와 함께 오면서 청주 한 병 사 오면 그만이었다. 일찍부터 부산에 자리 잡아 집 사고 제 자식 키우며 재산 불리는 데만 열중했다. 그런데도 장자라고 아버지 어머니는 나중에 제사를 지낼 아들이라고 항상 호의적이고 만사 멋대로 하도록 두었다. 그러다 죽음을 앞두고는 작은 아들에게는 숟가락 몽댕이 하나 물려주지 않고 전부 큰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준다고 한 것이다. 서운한 마음이 안 생길 수 없었으나 박덕만은 입맛만 다시고 가타부타 따지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 후 박덕만은 아들이 통영(그때는 충무라고 불렀다)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통영에다 집을 장만했다. 지긋지긋한 섬 생활을 청산하고 통영으로 이사를 나가려고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막 결혼을 했던 영악한 여동생이 어머니와 짜고 그를 홀렸다.

“오빠가 이사 나올 때까지 우리가 그 집에 잠시 살면 안 될까? 오 서방이 집 살돈이 없다네. 남의 집 살 밖에야·······”

“그래라! 니 여동생이 불쌍 안하나? 임시로 살다가 너희들이 나가면 비켜 줄 끼다.”

좋은 게 좋다고 박덕만은 그러라고 했다. 그게 오산이었다. 어머니가 통영으로 이사가지 않겟다고 고집을 피우며 반대하고, 그래도 몇 달 뒤에 막상 통영으로 이사를 나가려 하니 여동생이 이 핑계 저 구실을 대며 집을 비워주지 않았다. 그러다 집값이라며 돈을 몇 푼 들고 왔다. 물론 시세보다 한참 모자라는 돈이었다. 또 어머니가 거들었다.

“니는 이곳에 집이 있는데 뭐 할라꼬 통영꺼징 이사를 갈라하노? 필요없는 집 그만 니 동생 줘라. 나는 절대 통영 나가 살지 못하겠다.”

어머니 말에 수굿해져 버렸다.

몇 년 뒤 그의 큰딸이 마산에 있는 여상에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며 원서를 썼다. 자취를 한다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섬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또 하기 시작했으나 혼자 사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고향을 뜨려했다.

“영애가 마산서 학교 댕기면 할미가 가서 밥을 해 줘야 안 하겠나?”

여상을 다니는 큰딸 영애를 돌보며 밥이나 해 준다기에 구암동에다 전세방을 하나 얻어 마산으로 먼저 내 보냈다.

그즈음 박덕만은 어부생활을 접고 수협자금을 얻어 바다 양식장을 하고 있었다. 처음 1, 2년은 뭐가 될 듯했다. 그런데 3년째 되던 해 여름, 태풍이 불어 닥쳤다. 태풍이 지나가고 보니 양식장 그물이 찢겨지고 헝클어지고 키우던 고기는 다 달아나 한 마리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수협 빚만 지고 양식장은 허가장만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수협 빚을 2년인가 고생해 갚고 보니 완전히 빈손이었다. 다시 배를 타며 고기를 잡든지 아니면 농사를 지어야 될 판이었다.

“그만 섬에서 나가입시다. 창호도 마산에서 취직을 한다하고 창국이도 고등학교를 마산서 댕기겠디고 고집을 부리니 그만 마산으로 이사갑시더.”

아내의 주장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욕지도 섬 생활이 신물이 났다. 밭을 팔고 집도 팔았다. 집은 450만원에 팔았고 밭은 거저 주는 기분으로 넘기자니 시세 이하였다. 1993년 막상 마산에 와서 방 3개짜리 셋방을 얻으려니 또 돈이 달렸다. 아들 둘에 딸, 어머니가 있으니 방 3개짜리 주택이 아니면 안 되었다. 어찌어찌 전셋집을 구하니 놀고먹고 지낼 수 없었다. 이젠 취직자리를 구하러 수출자유지역으로, 한일합섬으로····· 이 공장 저 공장 정문 앞에 사람 구한다는 공고를 보러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뛰어 다녀야 했다. 고향 사람, 일가친척, 수소문해서 찾아가기도 했다. 아내가 그보다 동작이 재빨라서 방직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박덕만은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오른손이 문제였다. 손가락 3개 없는 주먹손을 보고는 간부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 공장 일이 섬세한 작업이라서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하는데······그거 좀 어렵지 않을까요?”

그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제 주장을 확실히 펼 수 없었다.

“아, 일하는 데 자신 있습니다. 물건 쥐고 나르고 하는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십 몇 년을 고기를 잡았지요. 이 손으로······ 엔진도 수리하고 돌리고 스쿠류에 감긴 밧줄도 잠수해서 풀어내고요.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힘도 쎕니다. 내 키가 180에 체중이 85kg이니까 장사소리를 듣는데요. ”

하고 자신만만하게 제 뜻을 피력해야 함에도 겨우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조금 불편하지만도 힘쓰는 일은 지장 없는데요······.”

어깨가 축 쳐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에게나 아이들에게 뭣 때문에 취직을 못했는지 연유를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구한 취직자리가 냉장고나 에어컨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재벌 전자회사의 하청공장이었는데 종업원이 100여명이 넘는 곳이었다. 공고를 다녔나, 고등학교를 다녔나? 영어로 된 부속품이나 공구 이름들을 듣고도 초등학교 졸업 실력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초보 노동자에다 어제 그제 섬에서 나온 촌놈 무지렁이라 가장 고되고 힘쓰는 일이라면 그가 도맡아 했다. 무거운 물건 옮기고 차에 실고 부품 자재를 부리고 제품을 포장하는 일이었다.

땀 흘리며 끙끙거릴 때, 그는 초등학교 때 어깨 넘어 국어시간에 들었던 시조 생각이 절로 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리라

 

당장 만사 때려치우고 도로 욕지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었다. 일도 조금 익숙해지고 다른 사원과도 술을 한 잔 사면서 친해졌다.

“박덕만 씨는 사람이 순진해. 꾸벅꾸벅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거든.”

사람 놀리고 부려먹기 좋아하는 동료들까지 처음에는 야비하게 인정머리 없게 굴다가 차츰 순박하고도 묵묵히 불평 한 마디 않는 그의 인품에 고개를 숙이고 친절해졌다. 사장도 박덕만을 점차 믿기 시작했다.

“잘 해! 그까짓 손이 좀 불편하면 어때? 일이란 손으로 하는 게 아니고 머리로 기술로 하는 거야. 박 씨같이 회사 일을 내 일같이 하면 어디서든 환영받지.”

사장의 신뢰를 얻고부터 그는 차츰 기술자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물론 남이 하기에 거북한 일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염산을 다루어 파이프나 쇠의 녹을 벗기는 일이거나 아니면 도금(鍍金)하는 일이었다. 염산 냄새가 지독했다. 마스크를 쓰고 환풍기를 돌려도 독한 기운은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마산으로 이사를 온지 10여년 만에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이제 떳떳하게 마산이란 도시에서 내 집을 지닌 가장이 된 것이었다. 물론 전셋집 보증금에다 집안 아저씨의 돈을 빌리고 여러 해 모은 돈, 큰 딸 영애, 큰 아들 창호 둘의 월급 모은 것까지 털었다.

이제 번듯한 내 집에 살게 되었으니 좀 좋은가? 그런데 어머니가 탈이 났다. 부산 큰아들네 집에 가서 살겠다고 부득부득 그를 졸랐다. 형은 어머니의 얘기를 듣더니 속으로야 어떻든,

“아,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사입시더,” 했다.

형은 아버지 유산 대부분을 처분했지만 그때까지 그들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욕지도 옛집을 팔지 않고 그냥 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언제라도 고향 가서 살겠다면 그리해 줘야 한다면서 박덕만이 우겨서 고향집만은 팔지 못하도록 형을 말렸기 때문이었다. 욕지도의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그가 육지로 이사를 나오면서 450만원에 팔았던 집이 어느새 3,800만원이나 나간다는 소문에 박덕만은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형은 이제 마지막 아버지 유산인 그 집을 처분할 좋은 기회가 왔다면서 얼씨구나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노라한 것이었다. 어머니를 부산 제 집에 모시기만 하면 고향 집을 팔아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어문요. 큰아들하고 살아야 겠습니껴? 그만 우리하고 살면 어문이도 뱃장이 편할 낀데요? 가지 마이소.”

“뭐 할라꼬 부산 갈라 캅니껴? 여게가 더 마음이 편할낀데요.”

“할머니, 우리하고 삽시더. 가지 마시이소.”

며느리도 손자 손녀들도 말렸다. 그러나 80 노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박덕만도 사정하고 애원하다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상해서 못할 소리도 버럭 질렀다.

“어문 마음 묵은 대로 하이소. 인자 한 분 부산 가시몬 다시는 우리 집에 못 옵니더!”

어머니도 지지 않았다.

“저저, 황소고집 보래이. 누가 고집 쎈 니 애비 자식 아니라 칼까 봐. 오냐! 내 부산 가문 다시는 이 집 문지방에 발걸음 하나봐라!”

부산에 전화를 했더니 큰형은 한걸음에 달려와 옷 보따리를 안은 어머니를 택시에 태워 데려가 버렸다. 벌써 형과 어머니가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었다. 태어나서부터 50대 장년이 되기까지 어머니 곁을 지키며 모시고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어머니가 ‘내 죽으면 제사를 지내줄 아들은 장자빽게 없다.’ 하면서 모질게 그를 뿌리치고 가버린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도 안 되었고 생각할수록 서운하고 분했다. 어머니를 형에게 뺏겼다는 것이 너무나 섭섭했다. 동시에 아버지가 그에게 유산을 하나도 물려주지 않은 것을, 어머니가 여동생과 짜고 돌아 통영에 사 둔 집으로 이사를 가지 못하게 만들고 집을 빼앗겨 버린 일도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장자만 자식이가! 내한테는 부모도 없는 기다. 땅 한 평 내한테 안 주고 몽땅 형에게 물려 준 아부지나! 태어나서부터 이때껏 옆에서 모신 내가 장자가 아이라꼬 내삐리고 가는 어문이나! 부모 노릇한 기 뭐 있노? 제사? 젯밥 못 얻어 묵을까 봐 가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그는 며칠을 밥도 먹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뜻밖의 일이 터졌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부산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고함을 팩 지르고 도로 놓아버리려 했다.

“와요? 뭐 할라꼬 전화 했능기요? 내 기를 더 채할 일이 있능교?”

“아아! 덕만아! 그, 그기 아이고! 내 말 좀 들어봐라. 어문이를 마산으로 돌리 보냈다! 할마씨가 큰며느리하고 영 아인 기라. 티각태각 며칠간 시비를 벌리고 싸움박질 했다. 엄마가 너무 잔소리를 하니까 며늘이가 견딜 수가 있나?”

형은 급한 어투로 말했다. 요는 형수와 어머니가 서로 뜻이 맞지 않고 싸우는데 결국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게 되어 택시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으로 돌려보냈다는 얘기였다.

“지랄용천하네! 모셔 갈 때는 무슨 마음이고······인자는 형수 핑계대고 싫다니! 아아들 장난하는 기요? 아이문 벌써 형이 노망을 했소? 난 모르겠소! 절대 어문이를 나도 못 모시겠소. 우리 아파트 정문 앞에 기다렸다가 택시 오면 그냥 그대로 빡구시켜 보낼 끼요. 그리 아이소! 씨발!”

“야야! 그기 아이고······.”

그는 형이 뭐라 하는 소리를 더 듣지 않고 수화기를 내동댕이쳐 버렸다. 씩씩거리며 바깥에 서서 부산에서 오는 택시를 기다렸다.

정말 옷 보따리를 안은 머쓱한 낯빛의 어머니를 태운 택시가 아파트 정문에 도착하였다. 그는 택시를 막아서서 기사를 보고 고함을 쳤다.

“당장 이 할마씨 그냥 실고 돌아 가이소! 원래 태웠던 그 자리에 실어 주기만 하면 됩니더.”

“뭐라고요?”

기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기가 막혔는지 반문했다. 박덕만은 손짓발짓해가며 흥분해 앞뒤 조리도 맞지 않은 소리를 연신 내질렀다. 한참 만에 기사도 돌발 사태에 대해 이해가 되었던지,

“아, 알았습니다. 도로 부산 하단으로 돌아가면 되겠지요.”하고 노골적으로 안노인을 박대하는 자식이라는 그런 깔보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는 마산에서 부산까지 택시비가 얼마인지 물어 돈을 기사에게 던졌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기만 하고 있었다. 박덕만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한마디 던졌다.

“어문요! 작은 아들하고 살기 싫어서 큰 아들한테 갔으니까 거기 가서 잘 사이소! 뭐 땜에 제 발로 가 놓고 일 년, 아니 최소한 한 달, 아니 여흘도 못 살고 일주일 만에 후디껴와요? 효자 큰아들한테 가서 잘 사이소! 다시는 어문이 안 볼라요!”

막말이 막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는 기가 막혀선지 너무 놀랐는지 아무 말도 않았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택시가 유턴을 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머니를 태운 택시가 떠나고 나자 그는 부산에다 전화를 했다. 어머니를 돌려보냈다고.

“구워서 먹든 삶아 먹든 형 마음대로 하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내사 부모덕을 눈꼽만치도 본 게 없네요. 전부 형님 차지 아이던교? 그라니 어문도 형님 모가치요!”

그러고는 형의 응답을 듣지도 않고 탁 끊어버렸다. 곧 전화벨이 울렸으나 안식구보고 절대 전화 받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일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박덕만은 그 택시가 다시 돌아오면 못이기는 척하고 어머니를 도로 모시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형이 최소한 어머니를 한 달포는 모셔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 달쯤 부산에서 살다 돌아오면 어머니도 형 내외의 엉큼한 욕심과 속내를 알게 될 것이니 그 정도에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형은 무정했다. 택시 기사가 몇 시간 전 어머니를 태웠던 하단동 길거리에 도착해서보니 마중 나올 사람이 나와 있지 않았다. 아들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할머니를 길거리에 버려둘 수 없었든지 기사는,

“할머니 아드님 집 전화번호 아세요?”

하고 물어 겨우겨우 박덕수 집에 통화를 시도했는데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집에 사람이 없는지 일부러 그러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기사는 다른 방도를 강구했다.

“할머니! 부산에 또 누구 없어요?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낭패요. 이거를 어쩐다?”

넋이 나간 할머니를 채근해 부산에 사는 큰딸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택시기사는 긴가민가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큰딸은 마침 집에 있었다. 통화를 한 기사는 큰 딸네 집으로 택시를 몰고 가서 대문간에다 할머니를 부려놓고 도망치듯 달아나버렸다. 또 그냥 돌아가라는 핑퐁식 사태가 벌어질까봐 겁을 낸 것이었다. 큰딸은 어머니의 얘기에 기가 막혔고 두 오빠의 집에 전화를 하고 난리를 쳤다. 그러나 오빠 둘이 모두 완강하게 똥고집을 부리고 불효막심한 소리만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니 대신동 언덕 한참 올라가서 막다른 골목 찌그려져 가는 단칸방 사글세를 얻어 기거하게 했다. 통영에 사는 여동생과 의논해서······.

어머니는 거기서 채 일 년을 못 살고 돌아가셨다.

장례를 지내면서 아들들은 아버지가 묻혀 있는 욕지도 산소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딸네들은,

“살아생전 어머니를 잘 모시지도 못했으면서 인자 와서 뭐라 카요? 고향 그 먼 섬에다 산소를 쓰면 벌초라도 제대로 하겄소? 풀이 우묵하게 자라면 누가 벌초를 해 줄 것이며, 술 한 잔이라도 칠 것이요? 요 근래 오빠들이 하는 짓 보면 불효자 중에 상불효자인데 앞으로 우째 할 것인지 눈으로 직접 안 봐도 환하게 뵈이요.”

“이 봐라! 어문이가 이리 일찍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나? 나는 어문이가 내 잘못 생각했다 카민서 마산에 오면 같이 살라했던 기라. 그런데 너그들이 중간에서 가로 막았단 말이다. 너희들이 잡지 말고 마산 가라꼬 설득을 하든지 그냥 두었으면 결국 어문이가 마산 오실 거 아이가!”

주눅이 든 박덕만의 후회 섞인 고백에 여동생들은 코웃음 쳤다.

“하이고! 사돈 남 말하네. 그때 또 마산 가셨으면 문전에서 쫓아냈을 오빠가 무슨 소린교? 어문도 다시는 그 꼴 보기 싫다민서 마산 안 갈라꼬 했고요. 우짜든지 어문이 장례는 우리 딸내미 마음대로 할 끼요.”

지은 죄가 큰 박덕수는 끝내 씹다달다 말이 없었다. 아니 후회를 하는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안도하는지 통 형의 마음을 박덕만으로 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여동생들의 주장대로 김해 공원묘지에다 안장했다. 그는 어머니 묘 앞에서 속으로 후회의 눈물을 쏟았다.

“어무이요, 내 잘못했습니더. 내 살아 있을 동안 꼭꼭 칠월 보름이 지나면 벌초하러 오겠습니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집안의 산소를 다니며 벌초를 할 때가 되면 박덕만은 괴로웠다. 어머니 산소에 가면 공원묘지 관리소에서 손질을 잘 해 놓은 터라 벌초할 건더기도 없었지만 괜히 시간을 보내며 잔디를 잘랐다. 낫 한 자루 쥐고 가서······.

욕지도 조부모와 아버지 산소는 엉망이었다. 칡넝쿨이 성했다. 아카시도 열 댓 그루가 자라서 매년 베어도 또 그 장단이었다. 올해는 나무를 죽이는 제초제를 가져가서 아카시를 자르고 그루터기에 약을 뿌렸다.

아들은 예초기를 차에 실고 서촌으로 달려갔다가 고쳐 왔다. 그 사이 부산에서 온 형과 조카가 가져온 예초기로 말끔하게 벌초를 거의 다한 때였다.

“결국 플러그가 탈이더마는! 기술자가 쓱쓱 닦고 새로 기름을 넣어 돌리니까 쉽게 시동이 걸리데요.” ****

 

 

 

  소설이 실린

 

마산문인협회 연간집

 

  <마산문학>

 

   2011. 35호

 

  (발행일 : 2011년 12월 27일)

 

 * 제작 보급처 : 도서출판 경남 

 

 

 

 

 

 

 

 

 

 

 

 

 

 

 

 

 

 

 

 

 

 

 

출처 : 농암과 지당 글마당
글쓴이 : 남전 南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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