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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송현리

by 남전 南田 2012. 5. 13.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천년학소>의 전설이 깃던 솔터 당산

 

1. 송현리(松峴里)

 

 

창녕읍의 동북부에 있는 송현동은 거대하고도 많은 수의 고분군(古墳群)이 있는 마을이다. 고분들 만을 보아도 사람이 오래 살아온 터전임을 알 수 있어 창녕 읍내의 첫 동리라 할 만치 유서 깊은 곳이다.

송현동은 솔터라 불리는 마을이니 솔터는 [사람이 사는 터]라는 뜻이다. [松]의 훈은 [솔]이니 그 어원은 옛말 [살, 사람, 삶(生)]을 말하니 솔터는 곧 [사람이 사는 터전]이란 뜻이다. [솔]은 [射]의 훈이기도 하여 사장동(射場洞)의 기사(記寫)되기도 하였다.

[松]의 古音은 (소)이다. 이것은 아래 용례를 보면 알 수 있다.

 

[金橋 謂西川之橋 俗訛 呼之松橋也] (三國遺史 卷三 阿道)]

 

따라서 [松亭 - 小亭 - 蘇亭]등으로 기록된 것은 다같은 뜻이며, [소디- 松洞 - 松臺]등으로도 지명에 쓰였으니 [소 . 솔 . 쇠]등의 음훈차로 [金]의 훈 쇠, [西]의 고음 [세], [松]의 고음 [소]로 쓰여 [金 . 西 . 松]이 구분없이 옛 지명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松亭 - 小亭 - 蘇亭] 등으로 쓰였음을 보아 솔터는 곧 소도(蘇塗)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도는 삼한시대에 천신(天神)을 제사하던 성지(聖地)를 말하는데 신령한 곳을 따로 두고 그 주장자인 신관(神官)이 있고,영고(靈鼓)를 단 큰 나무를 세우며 하늘에 제사를 올려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비는 신사(神事)를 주재하던 곳이었다.

송현동 마을 뒤에 서낭당이 있고 수 십그루의 오래된 고목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여러 곳의 당집이 있는데 같은 마을안에 당집이 3곳이나 있었다 하니 신을 모셨던 곳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아 화왕산 아래 신령한 땅 소도가 바로 이곳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호구총수]에 사장동(射場洞), 사창동(司倉洞), 대동동(大同洞) 등으로 3개동이 나오니 [사장동]은 활터가 있는곳, 사장(射場)으로 봄도 타당하다. 무당 사당들이 모여 놀았다 하는 사당골이 있었으니 두가지 뜻을 갖고 있다고 본다.

송현동과 교동 일대에 걸쳐 사창이란 창고가 있어서 사창동이라 불리어졌고, 큰 동리라 하여 대동동으로 불리어졌으니 지금의 송현동은 창녕읍의 역사깊은 첫 동리라 할 만한 곳이었다.

행정리로는 송현과 대동 2개리이이다. 창녕읍 파출소가 있다.

 

⊙ 1-1 송현동(松峴洞)

 

송현리 동부의 행정리 이름이다. 화왕산 서쪽 목마산성 아래로 가야 고분이 산재하여 있다.

1914년 송현동이라 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사장동, 대동동 등 2개 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전에는 170호이던 것이 360호로 증가하였으며, 김해 김씨와 전주 이씨 등이 세거하여 왔다. 소운정(小雲亭)이 있다.

 

솔터(松峴)

송현은 소나무가 있는 솔고개인데 솔고개라 하기보다는 솔터라 부른다.

마을뒤 당산의 서낭나무가 소나무라 한다. 소나무를 떠 받쳤던 [千年鶴巢]라 새겨진 돌받침대가 남아 있는데 서낭당의 당집과 함께 이 아래 서편 일대의 마을을 솔터라 부른다.

소나무가 많았던 고개, 터였으므로 솔터라 하였다고 전하여오고 있으나, (솔)은 옛말로 (사람이 사는 터전)을 뜻하고 있다.

또 옛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땅 소도였으리라 추측된다.

 

또 이 마을에 창녕현 시절, 객사와 현감의 숙소, 하산관이 있었떤 곳이었으며 이 건물들의 북쪽에 객사에 딸린 활터가 있었다.

활터는 지금 송현동 동사무소 일대로 이 근처에 객사의 못(蓮塘)이 있엇는데 이 못은 객사의 연당으로 팠다고 전하며, 이 연당의 남쪽편 언덕에 사대(射臺)가 있꼬 과녁은 북쪽 20호 고암가는 국도변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 활터가 있었으므로 쏠터 - 솔터라 불리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  옛 창녕현의 터

 

*활터(射場 -射弓場)

조선시대 창녕현의 객사 뒤에 있던 활터로 (사장터)라 하기고 한다. 솔터의 아래 쪽으로 송현동 동사무소 주위에 연당못이 있었는데 이 일대였다.

 

* 사장터(射場터)

위의 활터와는 달리 이 활터는 목마산성 사이의 골짜기에 있었던 활터로 군사들의 조련을 받았던 훈련장의 일부이다.

 

*객사터(客舍터)

현재 창녕군립도서관 길 건너 북쪽리 터로 원님이 기거하였던 객사 일대 건물의 터이다.

하산관이란 건물은 면사무소, 학교(대정 145년에 말흘리로 이전)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철거되어 이 목재가 옮ㄱ겨져 이방면 사무소를 지었다 한다.

또 하산관 뒤편은 현재 철공장 (경창공업사)이 있는 터이다.

이곳에도 집이 큰 것이 3채가 있었는데 건물이 철거되어 하나는 곡물시장으로 옮겨져 보부상들이 사용한게 되어 쓰다가 최근 만옥정으로 이전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또 한 채는 옮겨져 경남여객회사의 건물로 사용되다 사라졌다.

 

*군기터(軍器터)

하산관 뒤 철공장 주변으로 현청의 군사들이 쓰는 각종 무기들이 있는 창고자리이다.

 

*민소못(面所못)

객사터 바로 뒤에 후원의 연당으로 조성된 못이었는데 최근 매립되어 그 흔적은 사라지고 송현동 동사무소가 그 북쪽에 있다.

이 못은 평지를 파서 만든 못이라 하여 민소못으로 불리게 되었다.

[민소]는 면사무소의 줄임말인 (面所)의 이곳 지방말이다.

 

*이문재(以文齋)

송현동 북쪽 교동구역인데. 고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던 한말의 학교였다.

이범선(李範善: 1901년 창녕군재직) 군수가 쓴 이문재 중수기를 보면 이문재의 뜻을 [以文會友요 以友輔仁]이라 하였다.

 

※ 이문회우 이우보인(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 학문으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뜻임.

즉, 학문과 예에 뜻을 가진 사람을 벗으로 하고, 벗의 장점을 본받아 인을 키우라는 뜻임.)

 

*봉안당(奉安堂)

객사터 동쪽에 있었던 당(堂)의 이름으로 현감의 숙소, 내실이라 한다.

 

*폴구나무

활터 민소못북쪽 객사 통로이며, 마을 입구였던 언덕에 있었던 고목으로 예전에 마을 입구 길 옆에은 흔히 폴구나무가 있어 오가다 길에서 죽은 객신(客神 )을 올려 (모신) 놓는다.

바로 그런 나무가 이곳에 있었는데 1961년 5월에 고사하여 바람에 쓰러져 없어졌다.

 

 ⊙ 사당골

송현동 동편 골짜기로 옛날 무당 노릇을 하던 사당들이 많이 모여서 굿판을 벌리며 놀던 곳이라 하여 사당골이라 한다.

아마 사당들이 살았던 곳일 것이다.

 

 ⊙ 사장골(舍場谷)

목마산성 안에 있는데 목마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숙사, 관리소, 지휘소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상당수의 군사들이 이 목마산성 일대에 있었으며, 말을 키우며 주둔하였던 흔적들이 여실히 남아 있다ㅏ.

활터 외에 집이 있었던 주춧돌과 샘터, 송현동과 목마산성 사이에 말을 몰아 다녔던 넓은 길이 닦여 있다.

 

사창(社倉)앞

교동과 인접한 곳인데 조선시대에 사창이란 창고가 있었던 곳의 앞이므로 사창앞이라 한다.

(호구총수)에 보면 사창동 (司倉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고암으로 가는 20, 24호 국도가 지나며 교동 동쪽 창녕읍 파출소 부근이다.

 

 

1-2 대동 (大洞)

 

송현동의 서부로 창녕석빙고와 북창천 일대인데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행정리 명칭으로 대동[大洞]이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지명은 [大同洞]이었다.

솔처 아래의 큰 마을이었으므로 대동동이라 불리었다고 본다.

187호인데 전에는 65호였으며,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가 오래동안 살아왔다.

 

 ⊙  당산 (堂山)

송현동 동쪽 당집이 있는 곳으로 괴목나무와 소나무 정자 외에 돌로 만든 남근(男根)형상의 입석(立石)이 있었다고 전한다.

남근은 원래 장하고 뻣뻣하여 생장의 원동력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이를 숭상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 남근상은 일제시대 한창 도굴범이 설칠때 없어져 버렸으며, 군내에는 도천면 어만리 입구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 당산에는 소나무가 서낭나무였다.

1895년 경 고사(枯死)직전이라 나무가지를 받치기 위해 남모씨가 천년학소[千年鶴巢]라는 글을 새긴 돌 받침석으로 만들어 고이었다.

그러나 수 년 후에 죽고 말았으며, 지금은 그 받침석만 남아 있다.

 

소나무가 베어 졌을 때, 남노인의 꿈에 학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쉴 곳이 없어져서 이 집 뒷간에 쉬어간다."

하고 사라졌다. 이틑날 변소에 가보니 전에 없었던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이 마치 학이 엎드린 형상이었다.

이 집에서는 이 돌이 귀하게 보존하였는데, 지금 문씨가에 있다고 한다.

동민들은 노송이 없어지자 당집을 그 옆에 짓고 매년 정월 보름에 당제를 올린다.

송현동에는 당집이 이곳 외에 세 곳이 있는데 그 중심되는 곳이 바로 솔터 당산이다.

그외 당집은 활터 옆, 대동, 소운재 옆 등인데 매년 동신제를 모신다고 한다.

 

화왕산(火旺山)

송현동 동북 멀리 있는 산으로 창녕의 진산이다. 높이는 756.6m이다.

 

목마산(牧馬山)

화왕산의 서편 산줄기로 성터가 있는 산이다. 능선을 따라 거대한 규모의 성벽이 쌓아져 있다.

이 성은 목마산성이라 하며, 이 성은 가야시대부터 말을 키운 성이여서 산 이름을 목마산이라 한다. 높이는 613m이다.

 

 

비화가야 시대의 읍성이었을 목마산성이 있는 목마산

 

목마산성

목마산에 있는 성터로 송현동 산 5-2와 8번지 일대에 있는데 창녕읍에서 올려다 보인다.

472m 높이의 능선에서 시작되어 사장터 아래까지 에워싸고 있은 성이다.

면적은 19,110평, 주위는 1.9km인데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가야시대로 추정되며, 비화가야 때 영주가 말을 키웠던 곳이라 하여 목마산성이라 부른다.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는 구전이 잇는 것으로 보아 창녕읍성의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 자그만 가야 소국마다 읍성이 축조되었는데 이 성이 마을과 인접하여 있으므로 전쟁이 터지면 그 역활을 하였으리라 추측되며, 이차적으로 화왕산성으로 사람들을 옮겼으리라.

목마산성에 이르는 골짜기의 길이 아주 넓게 닦아져 있어 말과 사람의 내왕이 많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가 이끄는 군사들이 이 성을 방비하였다 한다.

 

송현동 고분군

고분군이 있는 지대는 두 곳으로 한 곳은 송현동의 동북부로 목마산 기슭에서 서편으로 내려오며 교동까지 이어지며 80여기의 큰 고분들이 있었고, 다른 한 곳은 동남쪽으로 자하골 계곡을 따라 송현동 석불까지 20여기가 논 사이에 있었다.

대부분의 고분이 일제시대 도굴되어 파괴되었으며, 구릉과 같은 흔적만 남았고 대부분 논으로 개답되어 많은 고분들이 사라졌다.

 

똥매(獨山)

송현소류지 위의 고분을 마치 따로 떨어져 솟아난 독산처럼 보이므로 똥매라 부른다.

이 일대의 고분들이 일인들의 공공연한 사주에 의하여 인근에 살았던 조선 사람들이 고분도굴에 종사하였는데 이 고분도 도굴되어 내부가 환히 들어나 있다.

도굴이 성했을 그 당시 창녕에 도굴의 원흉은 일본인 니시야마(西山)란 자라 한다.

동일여관이라 간판을 걸고 여관을 경영하는 왜인이었으나 실은 고분 도굴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조선사람들이 파 온 출토품을 수집, 대구를 비롯하여 외지로 반출 밀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굴꾼 수 십명을 고용하여 창녕군 내의 고분이란 고분은 다 뒤졌으며, 일본 경찰의 비호아래 겁나는 것없이 살았던 인간이라 한다.

이때 조선인이 도굴하여 가져다 준 것은 가야 금관외에 많은 가야, 신라토기, 그릇류, 곡옥, 마구류 등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양도 엄청났다.

도굴로 인하여 부자가 된 자도 있었으나 그 후손들이 지리멸렬하니.

"남의 무덤을 파 묵은 놈의 자식이 잘 될 리 없다." 고 들 말하고 있다.

 

⊙  소운재골(小雲齋谷)

송현 소류지 위 목마산성 아래 있는 골짜기로 문화 류씨(柳氏)의 제각 소운정(柳光漢 創建)이 있는 골짜기라 소운재골이라 부른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이라 봄 여름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재실에서 공부하여 진사 급제자가 여러 명 났다고 한다.

 

 미륵당(彌勒堂)

송현동 동남쪽, 자하골 옆에 미륵부처가 있어 이것을 미륵당이라 부른다.

곧 송현동 석가불좌상으로 송현동 105 - 4번지에 있는데 약 2m 되는 자연석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1910년대에 불상위에 당집을 지었다고 한다.

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작골(紫霞谷)

화왕산의 서쪽 계곡으로 목마산의 남쪽에 길고 급하게 쏟아지는 골짜기로 푸른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짜기라 하여 자하골이라 불린다.

작골은 자하골의 축약, 와전이다.

이 골짜기는 송현동과 말흘리의 경계이기도 한데 계곡 중부에 도성암(道成庵0이 있다.

남쪽편 골짜기를 성지골이라 부른다.

도 이 아래에 작곡재(勺谷齋 : 정씨 묘실)가 있으며, 물이 맑고 큼직큼직한 바위들이 많아 최근에는 등산객과 산보객이 줄을 이어 찾아든다.

 

나무랑고개

이문재(以文齋)가 있는 고개이므로 이문재 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개는 송현동의 북쪽에서 교동과 인접하여 고암으로 가는 고개인데 예전에 경상감사가 서울로 가는 길에 지나던 길이라 하는데, 도야 - 중대 - 시치 - 무솔 - 십이리를 지나 현풍으로 갔다고 한다.

이문재는 현감 정동기(鄭東麒 : 1793~1786년 창녕현감으로 재임)가 창건하고 현감 이성순(李性淳 : 1786~1788년 재임)이 인재 육성에 힘을 쓴 곳인데 한일 합방 전후에는 보통학교, 또는 중등학교 과정의 학교로 쓰이기도 하였다.

 

 용바구

당산 아래 서쪽 언덕에 있는 바위로 옛날 하씨로 곤양군수를 지낸 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하곤양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려 군수가 되고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를 잊지 못하고 일년에 5,6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온다.

하곤양의 재산은 엄청나서 곧잘 도둑이나 명화적이 들어 돈을 털렸는데 한번은 돈에다 표시를 하여 화적들에게 내어 주어 그것을 추적하여 범인을 잡고 보니 집안 조카였다고 한다.

집안 조카는 하곤양의 재산을 강탈하여 인근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우어주는 활빈도로 활약한 젊은이였다.

그의 도당은 20여명으로 하곤양의 꾀로 잡혀서 밀양 감옥에 수감되어 버렸다.

옥에 갇힌 하씨 젊은이는 그 후 옥을 부수고 탈출을 하였는데 밀양 남천강을 한 밤 중에 헤엄을 쳐서 건너 왔는데 강 중간에서 큰 구렁이가 몸을 감아 올라와 사투를 벌려 결국 사람이 뱀을 물어 죽여 버리고 구사일생 집으로 귀환하였다.

그 며칠 후 한밤 중에 문이 흔들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뱀의 혼령이 나타났다. 복수를 하러왔던 것이다.

그 구렁이는 용이 되어 곧 등천을 할 것이었는데 하씨 젊은이에게 붙잡혀 죽었으니 그 원한이 컸던 것이었다.

큰 담력으로 겨우 뱀의 혼령을 막아내 다음날, 송현동, 무당들을 다 불러 모아 큰 굿을 벌려 뱀의 혼령을 위로 하였다. 그 덕으로 뱀의 혼령은 이 용바구에서 용으로 등천하게 되었다 한다.

 

 창녕 석빙고 (石氷庫)

송현동 288번지 일대에 있는 석빙고로 창녕에는 가야, 신라시대의 유적이 많은 곳이니 그 때의 유적이라 할 것이다.

조선 조에 중수(重修)하였는데, 석빙고 비문에 보면 현감 신서(申曙)가 [70일 사이에 영건(營建)하였다.] 했으니 짧은 시일내 새로 짓는 것은 어려우므로 중수한 것이라 본다.

북창천 남쪽에 있는데 둥근 형태로 그 높이가 4.5m이다.

경주 등 다른 곳과 그 형태가 비슷하고 전형적인 구조이다.

 

 북창천(北昌川)

송현동 동쪽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는데 남쪽 말흘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내를 창녕읍의 남쪽을 흐르는 내라 하여 남창천이라 하고 이 내는 북쪽편에 있다 하여 북창천이라 한다.

이문재와 소운재 물이 다 북창천에 모인다.

 

◆ 명덕(明德) 도수로(導水路)

자하골 물을 농업용으로 쓰기 위해 교동에 있는 명덕 저수지로 끌어 들이는데 말흘리 남창천을 막아 송현동 당산을 가로 질러 교동에 이르는 물길을 말한다.

일인들이 화왕산의 정기가 창녕읍에 이르는 주맥을 자르기 위해 이 물도랑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창녕읍 교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