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말흘, 낙영, 신당, 상퇴천 마을)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말흘리 전경
3. 말흘리(末屹里)
말흘리(末屹里)는 창녕읍내 여러 마을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화왕산에서 자하골 서쪽으로 흐르는 남창천이 읍내 복판을 통과하며 마구선 국도와 만나는 남창교까지 잇는 선(線)에서 남쪽, 관주산(貫珠山) 아래 여박골, 자련골과 그 아래 마을 상퇴천까지로 마구선 국도의 동편 지역인데 화왕산 줄기가 뻗어 내리는 곳이다.
이곳은 진흥왕 척경비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말흘리는 화왕산의 끝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끝 말(末)을 써 말흘리라 불렀다 하며,이것이 와전되어 머허리라고도 한다.
옛 지명을 상고하여 보면 충청도 회인(懷仁 : 목천과 진천 근처) 땅에 말홀탄(末屹灘)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말흘탄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다.
「말흘탄 돌(石)이 험하고 물(水)이 급하다. 방언에 "말흘은 험난한 것이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水石險急方言末屹爲險故名) (增補 文獻備考 卷21 與地考九 山川三 忠淸道 懷仁)
위의 기록을 보아 이곳 말흘리도 화왕산 계곡 자하골이 가파르고 사다리 산길로, 비가 왔다하면 갑자기 냇물이 큰 바위를 굴러 내리며 급하게 흘러내리다가, 비가 그치면 곧 따라 그쳐 버리는 경사가 심한 지형이므로 회인과 마찬가지로 돌이 험하고 물이 급하다 하는데서 말흘리라 불리어진 것이다.
말흘리는 신라, 또는 고려 초기에 화왕군 또는 창녕군 현청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유적으로 여박골 앞 과수원 안에 그 주춧돌이 남아 있고 현청의 터라 전래 되고 있다.
말흘리 일대에는 창녕교육청을 비롯하여 창녕군농협, 창녕군보건소, 창녕국민학교, 창녕중학교, 창녕농공고등학교, 창녕여자 중, 고등학교 등 학교가 밀집하여 있고 통운과 포교당, 창녕청년회의소 등 여러 기관 단체들이 있다.
행정리로는 말흘, 낙영, 신당, 상퇴천 등 4개 리가 있다.
◎ 3-1 말흘리(末吃里)
머허리, 미허리라고도 와전 변화되어 불린다. 과거 전체가 760여호였으며, 현재는 400여호 이다. 김해 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 말흘리의 행정 리 명칭으로 쓰일 때는 남창천 남쪽 창녕군 농협이 있는 일대를 지칭한다.
화왕산이 가파르고 사다리 형국이므로 비가 오면 갑자기 물이 쏟아지고 돌이 구르다가도 비가 그치면 냇물도 그치니 「水石險急」이라 말홀로 불리어진 것이다.
일원재(一源齋 : 昌寧曺氏 奉先所)가 있다.
◆ 새미정자
말흘리 동쪽에 있는 샘으로 정자나무 곁에 있는 샘이므로 새미정자라 부른다.
◎ 신당(神堂)
창녕여고, 포교당(仁旺寺)이 있는 일대로 말흘리의 동북부이다. 『호구총수』에도 「神堂洞」 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말흘리 중 동편 관주산 아래 남창천 주변의 행정 리 지명이다. 122호가 살며, 1840년대부터 진양 하씨가 세거하고 있다.
이 일대에 예전에 신을 모시는 무당과 당집이 많았다고 전한다. 당집이 많으니 자연히 무당도 많았을 것이니 신(神)을 모시는 동리이니 신당이라 한 것이다.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다.
◎ 이송정(二松亭)
신당 동북쪽으로 소나무 정자나무가 두 그루 있었던 곳이므로 이 근처를 이송정이라 하였다.
◎ 3-2 낙영동(樂榮洞)
창녕 중, 고교가 있는 일대의 마을로 낙뢰(落雷)가 잦거나 낙매(落馬의 와전)를 잘 보는 지대라는 속설이 있어 불(火)를 막기 위해서 지명에 찰 냉(冷)을 써 냉동(冷洞)이라 전에는 불러 왔다고 한다. 최근 냉동이란 동명이 별로 좋지 않으므로 음이 비슷한 낙영으로 고쳤다.
창녕교육청, 창녕국민학교, 창녕중학교, 창녕농공고동학교와 창녕보건소, 창녕청년회의소,통운 등이 있다.
이 마을 남쪽은 창녕 읍내의 입구로 고개에 용화당(龍華堂 : 罵洛昌寧郡宗親會館)이 있다.
◎ 동헌(東軒) 터
낙영동에 있는 터로 여박골 입구 과수원 일대인데 예전부터 동헌의 터라 전해오고 있다. 아마 창녕현의 초창기인 신라, 고려 때 화왕군 또는 창녕군 현의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들어 교상동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과수원의 지하에 주춧돌로 감지되는 반듯한 거석들이 줄지어 있고, 또 인근에 동헌새미라 불리는 우물이 현존하고 있어 동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동헌새미는 창녕의 우물물이 다 말라도 이곳 만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작골(紫霞谷)
말흘리의 동북쪽, 화왕산의 서편으로 내려 뻗은 긴 계곡인데 물과 반석이 아름답고 깨끗한 골짜기로 항상 푸르스럼한 안개가 끼어 있다 하여 자하골이라 불리었다. 작골은 자하골의 축약이다. 남쪽편 골짜기를 성지골이라 한다.
화왕산 등산로가 이 계곡을 따라 있으며 1992년 등산로가 확장 포장되고 주차장이 마련되었다. 군데 군데 쉴 수 있는 바위와 샘물이 있다. 입구에 창녕여중, 고등학교가 있다.
◆ 듬박골
작골과 요박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아기가 죽으면 묻어 주던 애장이 많았다.
◆ 요박골(禮拜谷)
낙영동 동편 골짜기이다. 화왕산의 서편 산줄기인 관주산과 성지산 사이의 계곡이다.
계곡이 둥글고 짧지만 깊은 맛이 있는 곳을 흔히 호박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도 그런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요박골, 오박골, 여박골, 요배곡(遙拜谷), 예배곡(禮拜谷) 등으로 와전 변화되었다.
예배곡은 사람들이 고요히 예를 드리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 말하고 있다. 골짜기 안에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최근 석불을 발견하였으므로 절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그때 이 절을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서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석불사(石佛寺)가 있으며, 골짜기 입구에 여박골못이 있고, 옛 동헌(東軒)터가 있다.
◆ 오란밭
요란밭이라고도 하였는데 창녕중 • 농공고 부근 일대를 가리키는데 전에는 사래(이랑)가 긴 밭이었다. 이 밭에는 연초를 심었다 하며, 예전부터 "광(廣) 넓은 논, 사래 긴 밭이 최고다" 하는 말이 있었듯 이 오란밭은 사래가 길어 창녕 읍내의 일등 밭으로 꼽혔다 한다. 밭 토양은 비가 오면 배수가 잘 되는 밤자갈이 섞인 부드러운 흙이 있는 밭이라서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지금은 인가와 학교, 건물들이 들어섰다.
위 「오란」이란 「골안」이니 곧, 골안-고란-오란으로 와전된 지명 이다. 이곳은 관주산 기슭의 서남쪽의 골안 밭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이 골안에 인가가 있어 사육신인 성삼문도 여기서 탄생했는데 그 때 화왕산 신령님이 관주산 마루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물었을 때 탄생되었으므로 ‘三問’이라고 이름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역사 기록에는 성삼문이 충남 홍주의 외가에서 탄생했으며 거기에도 역시 이와 유사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 남정(南亭) 터
낙영동 동쪽 냉동의 통운창고에서 하씨 선산이 있는 곳 주변인데 여기서 하씨(봉군) 고가(古家)와 남재(南齋)가 있었으므로 남정터라 속칭한다.
언덕에는 대밭이 무성하여 늑대가 새끼를 낳고 살았다 한다.
◆ 남창교(南昌橋)
창녕 읍내의 중심지, 남창천이 흐르는 위로 마구선이 통과하는 다리 이름이다.
예전에는 영산 만년교(萬年橋)처럼 생긴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석교는 100여년 전에 폭우로 물에 떠내려갔다 한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말흘리, 교상동, 교하동 둥이 있다.
◎ 3-3 상퇴천(上兎川)
말흘리 남부의 행정리 명으로 자연 마을로는 웃퇴기내가 있다. 전에는 60호 였으나 지금은 86호이며, 진양 하씨와 김해 김씨가 세거한다. 자련재(紫蓮齋 : 昌寧成氏 奉先所)와 연화재(蓮花齋: 晉陽河氏 奉先所)가 있다.
◎ 웃 퇴끼내(上兎川)
말흘리의 가장 남쪽편에 있는 마을로 퇴천리(兎川里)와 인접하였고, 재련골에서 시작하여 퇴천리를 거쳐 서편으로 흐르는 내의 이름이 퇴끼내, 퇴천이며, 이 내의 상류쪽 마을이므로 웃 퇴끼내, 상퇴천이라 한다.
한자로 토끼 토(兎)를 쓰고, 발음하고 상용하기는 「퇴」라 속음(俗音)으로 사용되는데, 이곳 지방의 발음이 「퇴」로 굳어진 관계로 퇴천리, 상퇴천 등으로 따른다.
화왕산 전경
◆ 화왕산(火王山 : 火旺山)
창녕 읍의 동쪽, 말흘리 동편에 높이 솟은 산으로 창녕현의 진산(鎭山)으로 높이는 756m이다.
예전에는 불을 뿜는 화산이었으므로 불이 크게 이는 산 「큰 불의 뫼」라 하는 뜻으로 화왕산(火王山)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산천(山川) 란에 화왕산(火王山)이 (창녕)「현의 동쪽 4리에 있는 진산이다.J이라 기록하였다.
火王山 縣西五里鎭山(新增 東國與地勝覽 卷27 昌寧縣 山川)
『대동여지도』와 『해동여지도』에는 「火王山」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영남지도』와 『경상도현읍지』의 지도에는 「火旺山」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따라서 「王」과 「旺」이 흔동되어 쓰여 졌으나 그 본래의 뜻은 차이가 없다 할 것이다. 화왕산의 북쪽은 고암면이며, 동편은 관룡산, 남쪽은 비들재(鳩峴山), 서편은 관주산과 창녕읍 시가지가 펼쳐져 있어 창녕현의 진산답게 모든 산을 거느리고 있다.
불사국(不斯國), 비화가야, 비사벌, 비자화군 등으로 불리던 것이 신라 경덕왕이 전국적으로 두(2)자 한자 지명으로 군명을 개칭할 때 이 화왕산의 이름을 따서 화왕군(火王郡)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후 고려조에 개칭된 「昌寧」이란 군명도 「火王」의 뜻과 다름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화왕산은 창녕군의 큰 산임에 틀림없다. 산 정상에는 화산으로 불을 품었던 분화구가 있어 그곳에 물이 가득 차 큰 못이 되어 용지(龍池)라 불리었으니 이곳이 창녕 조씨(曺氏) 득성의 전설이 유래되는 곳이 되었다. 지금은 그 못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나 옛 기록에 보면 화왕산 정상에 구천삼지(九泉三池)가 있다 하였다. 또 가야시대의 축성으로 보이는 화왕산성이 있으며, 조씨득성비와 배바우 등이 있고, 십리에 이르는 갈대밭이 가을이면 장관을 이루고 봄이면 참꽃, 철쭉꽃이 피는 등 아름다운 경치에 이끌려 많은 등산객들이 일년 내내 찾고 있다.
◆ 화왕산성(火旺山城)
화왕산 산정 일대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성(古城)으로 자하골 좁고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산상직하(山上直下) 60도 경사의 사다리길을 오르면 넓은 분지에 펼쳐지는 성터이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장군의 싸움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화왕산 동고록”이 전해 온다. 동문(東門)은 쌓은 그대로 뚜렷이 남아 있으나 서문은 허물어져 흔적뿐이다. 성의 길이는 1,794.9m이고, 성안의 면적은 1,796.9a이다. 그러나 석축 주위는 약 2.6km에 이르며,남북 양 봉우리 안은 56,280평 이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火王山城 周一千百二十七步 內有泉九池三 又有軍倉 火王山古城 石築周五千九百八十三尺今廢中有泉九池三
위의 두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 때는 군창까지 있었던 성이었으니 당시 군사들도 주둔하여 사용되고 있는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 조에는 폐성이 된 것이다. 임진란 때는 이 성을 수축하여 곽재우 장군이 수성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조 29년(1596년)에 창녕의병장이었던 성천희(成天禧)의 장계로 성을 수축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성안에 구천삼지, 조씨 득성비, 임진란 전승비, 배바우와 갈대밭 등이 있어 명승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어 많은 등산객이 산을 찾고 있다.
◆ 구천삼지(九泉三池)와 조씨(曺氏) 득성지지비(得姓之地碑)
화왕산에는 언필칭 아홉 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어 이를 구천삼지라 하였다. 이것은 이 산이 화산으로 분화구에 물이 고여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못과 샘으로 남은 것이다.
신라 때는 이 산 정상의 못이 물이 많고 맑아 용이 사는 못이라 하여 용지(龍池)라 하였으며, 이 용지와 연관 되어 창녕 조씨가 득성하게 되는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이 설화의 내력을 적은 비가 바로 “조씨 득성지지 비”인 것이다.
신라 때 한림학사였던 이광옥(李光玉)의 딸이 나면서부터 배가 아픈 증세가 있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창녕 화왕산 못은 영험하니 가서 목욕 재계하고 기도하면 병이 나으리라." 하는 말에 택일하여 화왕산 용지에 와서 목욕하고 기도하였는데, 이때 병도 낳고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이 아이는 용지의 용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더니 「曺」씨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하였다. 이 아이가 장성하여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곧 창녕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창녕현지』와 창녕 조씨 보첩(譜牒)에도 위와 같은 기록이 있다.
◆ 북각봉(北角峰)
화왕산 북쪽의 정상으로 높이는 757m인데, 바위 덩어리가 뿔처럼 뾰족하게 생겼으므로 북각봉이라 한다. 이곳에 올라 아래를 보려면 기어올라 엎드려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현기증으로 위험하다.
◆ 배바우(舟岩 : 船岩)
화왕산의 남쪽 정상으로 이곳 역시 바위 덩어리인데 천지개벽 때 온 천지가 물로 가득 찼을 때 이곳에다 배를 매었다 하여 배바우라 부른다. 이곳 높이는 742m이다.
배바우 아래 골짜기를 배바우골이라 한다.
◆ 환장고개
화왕산성 성문(西門) 바로 아래, 작골 맨 위의 급경사 고갯길로 사다리같이 가파른 고개길을 오르자니 하도 힘들어서 환장할 지경이라 하여 환장고개라 불린다.
◆ 이은대(吏隱臺)
화왕산 서펀 자하골 계곡에 있는 크고 넙적한 바위이다. 이 바위는 사람들이 올라와서 놀만한 크기인데 예전에 현감들이 관속과 관기(官妓)와 함께 이곳에 와서 공무에 시달린 피로를 풀고 놀았다 한다. 그래서 이속(更屬)이 은거한다 하는 뜻으로 이은대라 한 것이다.
◆ 관주산(貫珠山)
화왕산의 서편 줄기의 하나로 말흘리 동쪽의 산이다. 높이는 530m이다.
창녕읍 시가지에서 바로 바라보이는 산인데 산이 둥글게 생겨 마치 구슬과 같으므로 관주산이라 한 것이다.
◆ 성지산(聖旨山)
화왕산 서편 줄기의 하나로 관주산의 동남쪽에 있는데 높이는 740m이다.
성지산으로 부르며, 한자로는 「聖住山」이라 쓰기도 하는데 명당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던 풍수지리가의 대가 성지도사의 발길이 이곳에도 머물러 성지산이라 하였다는 말도 전해온다.
성지도사는 조선 시대에 풍수지리가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로 창녕군 내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성지산, 성지골이 곳곳에 있다.
이 산의 북쪽아래 골짜기를 성지골이라 부르며 남쪽 아래 골짜기는 자련골로 고갯길이 있다.
◆ 비들재(鳩峴)
성지산의 남쪽으로 화왕산의 남편 긴 산줄기를 비들재라 부른다. 산줄기 남쪽 퇴천-옥전을 통하는 고개의 이름이기도 하다.
긴 산등 중 제일 높은 정상의 높이는 717m이다. 산의 긴 능선이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비둘기 재라 한 것이 비들재로 되었다. 또 산이 삐죽삐죽 여러 봉우리가 솟아 있어 닭의 벼슬처럼 생겼으므로 벼슬-비슬-비들로 변하였다고 한다.
◎ 재련골(紫蓮谷)
화왕산의 남쪽 비들재 서펀 계곡인데 상퇴천 마을의 동편의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 중턱에 예전에 자련사(紫蓮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자련골이라 불리었다. 자련골이 재련골로 와전되었다. 현재의 자련사는 약 15년 전에 중건한 것이다.
골짜기는 두 갈래로 상퇴천에서 북쪽 골짜기로 오르면 자련사 터와 신당동 공동묘지(共同墓地)에 이르고 고개를 넘으면 옥천리 불당골로 넘어간다. 남쪽 골짜기에는 자련폭포가 있어 여름이면 목욕하기에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재련골 입구에 여러 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두 곳의 절, 인가가 2호 있다.
◆ 재련폭포(紫蓮瀑布)
재련골 남쪽 골짜기에 있는 폭포로 읍내 인근에 있으므로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피서하러 놀러오는 곳이었다. 폭포의 높이는 7m이다.
◆ 자련사지(紫蓮寺址)
재련골 북쪽 골짜기에 산 중턱에 있는 절터로 자련사가 있었다 전한다. 『창녕현읍지』 고적란에 「자련사 승지사가 화왕산 동남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紫蓮寺勝地寺 俱在火旺山 東南今無) 하였다.
◆ 배락바우
재련골 입구에 있는 바위로 전에 벼락을 맞아서 쪼개졌다하여 배락바우라 한다r배락」은 벼락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 신당(神堂) 공동묘지(共同墓地)
재련골의 자련사지 위쪽에 있는 공동묘지로 신당마을의 소유이므로 신당 공동묘지라 불린다.
◆ 자실고개(尺室峴)
말흘리 남쪽, 창녕 읍내의 입구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옆에 김해 김씨의 종친회관인 용화당(龍華堂) 이 있다.
자실은 고개의 형태보다는 자련골 서편 아래의 고개이므로 자련골고개라 불리었던 것이 자실고개로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 척(尺)을 써 척실로 기사하였다. 고개 남쪽에 못이 있는데 이를 자련못이라 한다.
◆ 들과 보(洑)
◆ 작골보 - 자하골, 작골에서 시작하여 서편 일대의 들에 물을 대는 보이다.
◆ 재련보 - 재련골에서 시작하여 재련골 서편 일대 들에 물을 공급하는 보이다.
◆ 찬물새미
신당의 현 창녕여중고 아래에 있는 샘으로 여름에는 그 물이 아주 차서 땀띠 난 데에 큰 효과가 있어 목욕객이 많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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