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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교상리 /창녕읍 교하리

by 남전 南田 2012. 5. 23.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와 교하리(교하, 옥만, 학천, 봉천 마을)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창녕객사 - 만옥정공원에 복원되었다.

 

4. 교상리(橋上里)

 

화왕산 자하골에서 흘러내리는 남창천과 마구선 국도와 만나는 곳에 있는 다리를 남창교라 불리는데 이 다리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는 영산 만년교 같은 석교(石橋)였다고 한다. 남창천에 걸쳐 있었던 돌다리는 100여년 전 어느 해 폭우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 일부 석재가 민가에 보관되어 있다고도 하는데 돌다리가 부서지고 나서는 나무다리가 가설되었다가 그 이후 마구선 국도가 개설될 때 지금의 교량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이 남창교(南昌橋)이니 남창천의 다리란 뜻이다.

남창교를 경계로 하여 다리 위, 아래를 나누니 위는 교상동이요, 아래 마을은 교하동이다. 또 다리 위쪽 중 남창천 북쪽은 교상동(橋上洞)이고, 남쪽은 말흘리이다.

이곳 교상동에는 창녕현의 관가(官家)가 밀집된 마을이었다. 옛 현청과 현청에 딸린 질청(別廳 : 吉廳) 등 여러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한일 합방 이후 보존이 되어야 함에도 그러지를 하고 객사는 뜯겨져 여러 곳으로 사라진 것처럼 동헌(東軒)도 군청이 들어서자 변모되어 그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그 자리에 군청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읍사무소가 있어 옛 동헌의 터였음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주변의 고가(古家)들이 한 채 두 채 세월이 감에 따라 철거되고 시멘트 건물의 현대식 건물이 틀어 서 버려 옛 자취를 찾기에 힘들어 졌다.

만옥정 공원 주변은 대밭이 우거진 산등성이로 이 대밭에서 대원군이 전국적으로 세우게 했던 척화비(斥和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화왕산의 주맥(主脈)이 흘러내리는 요지이었으므로 창녕현의 동헌을 비롯한 관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만옥정 대밭은 지금도 상당부분 남아 있는데 예전에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교상동에는 창녕읍사무소를 비롯하여 창녕경찰서, 창녕등기소, 창녕군립도서관 박물관, 창녕문화원 여러 기관들이 있으며, 만옥정 공원에는 국보 33호인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하여 퇴천리 삼층석탑, 객사(복원건물) 고인돌, 대원군 척화비,6·25동란 UN전승기념비, 천도교 포교당 등이 있다.

행정 리는 단일 리로 교상동 1 리이다.

◎ 4-1 교상동(橋上洞)

 

남창천 다리위의 마을이라 하여 교상동이라 불리었다. 『호구총수』에 읍내면 교상동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오래 지명이다.

예전에는 230호이던 것이 지금은 157호가 되었다.

관아(官衙)

교상동 일대에는 창녕현의 동헌과 그에 딸린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문헌과 증언을 통하여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동헌(東軒) - 만옥정 서편 아래에 있었는데 창녕군청으로 쓰이다가 읍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터에 있었다.

한강 정구(鄭逑 : 1577-1580 ) 현감의 東軒詠」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東軒詠

官府山林事塏

勞役役簿書中

民病未醫身病急

何如歸臥北窓

 

벼슬과 處土 어찌 일이 같으리요

로움 公簿 있도다

百姓 로움 건지지 못하고 하니

어찌하여 羲皇泰平 돌아가 볼꼬.

객사(客)- 동헌 동북쪽에 있었는데 송현동 구역이다. 집은 여러 채로 집들이 노후되거나 필요가 없게 되어 한일합방 이후 철거되었다. 그때 깨끗한 건물은 이건(移建) 되었는데 건물 가장 크고 깨끗하였던 객사를 1924 12(이장희군수 재직시) 술정리 싸전(米塵)으로 이전하여 창녕 시장내 보부상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전 당시에 읍내에서 가장 기술이 좋은 탐하리의 양목수가 옮겼다고 전해 온다. 건물은 1988 5월에 다시 만옥정으로 이건 복원되었다. 그 외 건물은 여러 면의 면사무소 청사로 이건되었다.

책실(冊室) - 각종 서류, 서책들을 보관하여 건물로 최근 헐렸으나 경찰서장 관사로 쓰인 집이다.

질청(吉廳 : 別廳) - 지금 등기소와 경찰서 사이에 있었던 건물로 이방 호방 현의 관리들이 모여 사무를 보는 곳이었다. 아전들이 모여 놀기도 하고, 전직 이방들이 모임을 갖고 현감의 자문에 응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위사(衛舍) - 동헌 옆에 있었던 것으로 숙위(宿衛) 군사들이 있었던 건물. 포화당 - 동헌 안의 사무를 보는 건물이다.

폐문루(閉門樓) - 경찰서와 읍사무소 삼거리 길에 있었던 동헌의 문루(門樓) 2 건물이었는데 북이 달려 있어 퇴청을 알리는 북을 쳤던 곳이다.

관주각(貫珠閣)- 현청 안에 있었던 (閣)으로 관주는 동편 이름과 같으니 이곳 지신을 모신 사당으로 보인다.

 

 

(官) 누정(樓亭)

『창녕현지』에 의하면 창녕현의 현청 근처에 현감들이 사용하였던 누정들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은 건물은 없고 터와 이름만이 남았다.

 

불일루(不日樓) - 동헌 서편에 있었던 문루(門樓) 동헌과 객사간의 문이라 한다.

징원당(澄源堂) - 동헌 동편에 있었던 정자 건물이다.

추월헌(秋月軒) - 객사의 서편에 있어 객관의 서헌(西軒)으로 현감 박한주(朴漢柱) 세웠다. 건물의 북쪽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돌을 모아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송현동 민소못이라 불리는 일대이다.

세심정(洗心亭) - 동헌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만향정(滿香亭)-추월헌의 북쪽 가운데 있었다. 현감 유수(柳) 짓고 (講)했던 곳으로 그 후 현감 최경홍(崔景興) 중수하였다.

평근당(平近堂)- 동헌 뒤에 있었다고 한다. 현감의 사였다.

봉안당(奉安堂)- 동헌의 뒤에 있었는데 현감의 숙사였다.

 

 

창고, 단묘, 부속건물(附屬建物)

위의 건물들 외에도 관아 일대에 창고와 단묘(壇墓)들이 있었다.

대동창(大同倉) 군기창(軍器倉) 진창(진倉) 공고(工庫) 마방(馬房) 있었고, 단묘로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 여단(礪壇) 등이 있었다.

만옥정 (萬玉亭)공원

동헌터 동편 일대 등성이로 지금은 창녕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안에 창녕 군립도서관과 박물관 건물이 있지만 예전에는 만옥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었으므로 이곳을 만옥정이라 부른다. 최근 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만옥정공원, 창녕공원이라 부르는데 벚꽃이 많이 피어 아름다웠다.

만옥정(萬玉亭) 현감 정봉시가 중수하였다는 萬玉亭 在縣東竹田裏 縣監鄭鳳時依舊新創」이라고 『창녕현지』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천도교 자리에 예전에 6각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를 육모정, 죽림정(竹林享)이라 하였다 하며, 원님이 공무 피로하면 머리를 식히는 곳이라 전한다. 건물터 에는 현재 천도교 교당이 있는데 일제 때에는 창녕보통학교의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창녕군립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고, 진흥왕 척경비, 퇴천리 3층석탑, 고인돌, 척화비, UN전승비, 객사 건물 여러 문화재와 유물이 있어 창녕문화재의 집합소라 할만 하다.

이곳 죽림정에 현감 고유(高裕) 처결의 이야기가 전한다.

고유는 창녕현감으로 재판을 잘하고 사건 해결을 잘하기로 수문이 나서 고창녕 불리어 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죽림정 앞에서 세수를 하는데 세숫물 난데없이 낙엽이 한 닢이 날아 떨어졌다. 낙엽을 유심히 살펴보니 근처에는 없는 나무의 잎이었다. 이에 수상하게 여긴 고창녕은 낙엽의 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찾아가 보니 잎은 합천 해인사 앞의 고목의 잎이었다. 고목 안을 살피니 썩어 나무둥치가 비었는데 안에 뼈만 남은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자의 시체였는데 목에 칼을 맞아 죽어 있었다. 염탐을 하여 보니 아래의 사람이라 고창녕의 영민한 머리로 추리하여 실마리를 풀어 범인을 잡아 한을 풀어 주었다 한다.

『빛벌문화』에 이곳의 풍경을 읊은 시가 실려 있다.

 

 

만옥정 대밭

지금도 있는데 도서관 남쪽 산비탈이다. 대밭 주인 이름을 붙여 하두학이대밭이라 하기도 한다. 호랑이가 출몰하였다 하니 맹호죽림(猛虎竹林) 격에 맞는 대밭이었다.

이곳에서 일제가 뽑아 버린 대원군의 척화비를 찾아서 만옥정에 다시 세웠다.

척경비(拓境碑)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 비자벌(比子伐) 병합하고 나서 하주, 비자벌정(下州 完山州停) 설치한 이곳을 순시하고 일을 새겨 세운 비석으로 남창천 돌다리로 쓰이던 것을 발견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각을 세웠는데 화왕산 아래의 국보로 한번쯤 둘러 볼만 비석이다.

비석(碑石)

만옥정 서북쪽의 길거리로 읍사무소의 뒤편에 여러 관리들의 송덕비를 한곳에 모아 보존하고 있다. 비석들은 당초 읍내 입구인 교동 숲골과 교하동 시장통, 칭녕현이었던 창녕군 북부 일대에 널려 있던 것을 옮겨 것이다.

남창교(南昌橋) 다리

남창천 위에 걸쳐 있는 다리로 읍내 중심지이다.

예전에 다리가 돌다리였는데 어느 해 폭우로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나무다리가 놓여 졌는데 마구선 국도 개통 현재의 시멘트 교량이 가설되었다.

『창녕현지』와 『창녕현읍지』에 기록이 있는데 폭우로 유실되었다는 기록은 일치하나 그 연도가 서로 상이하다.

 

橋梁 在縣南溪石虹橋一間丙辰大水壞破後木橋二間(창녕현지) 橋梁 石虹橋一間在縣南溪戊子暴雨頹落(창녕읍현지)

작골보

자하골에서 시작되는 보로 송현쪽으로 가는 것은 양달에 있다 하여 양달보라 불리고, 말홀 쪽의 것은 응달보라 불리었다.

5. 교하리(橋下里)

교하리(橋下里) 남창천 다리 아래쪽 동리이므로 교하리라 하였는데 읍내면의 마을로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읍내면은 지금의 창녕읍 시가지 일대로 조산리까지 현의 관리가 있는 데서 오리 안쪽의 지역만이었다.

남창교 바로 아래 서편에 현청의 옥이 있었는데 옥은 현청의 외옥(外獄)으로 보여지며,동헌 안에 있는 내옥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아마 외옥은 장기수들을 수감한 곳이었을 것이다. 옥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옥동(獄洞)이라 것이 뜻이 좋지 않으므로 옥동(玉洞) 옥만동(玉萬洞)으로 아화(雅化)되었다.

동헌의 서편이며, 신라 때의 절터로 알려져 있으며 술정리 동탑이 마을 서편에 있어 읍내의 오랜 주거지였음을 있게 한다.

행정 동으로는 4 동으로 교하동, 옥만동, 학천. 봉천 등이 있다.

◎ 5-1 교하동(橋下洞)

 

남창천에는 예전에 돌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석홍교가 걸려 있었다. 돌다리는 병진년 대수(大水)에 파괴되어 후에 두칸 짜리 나무다리(木橋) 가설하여 사용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다. 남창교 아래 마을이므로 교하동이라 것이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마을이니 오래된 마을로 읍내의 중심지라 것이다.

천일여객 정류소 자리에 지금은 경남은행 창녕지점이 들어서는 창녕 상가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 전에는 130여호 였으나 현재는 201호로 진양 하씨가 많다.

 

 

창녕시장(昌寧市場)

교하동 서쪽 일대에 있는 장터로 일부는 술정리 구역이다. 읍내장(邑內場) 대평장(大坪場)이라 불리었던 이 5일장은 1928 3 1일, 허가된 역사가 오래된 장으로 3 8일에 장이 선다.

구한 보부상들의 집결지로 경상도 안에서 몇째 가는 장이었다.

창녕장은 사흘 장터에서 지금의 읍사무소 서편 창녕문화원 터와 홍제다방 근처의 골목장으로 옮겼다가 골목장 10여년 후에 1926(대정 15) 현재의 시장터로 이전하였다고 어물전 뒤편 市場移轉記念碑」에 적혀 있다. 지금은 5일장 외에 상설시장이 있다.

◎ 5-2 옥만동(玉萬洞)

 

행정 명칭으로 옥만이라 부른다.

창녕현 시절 현의 옥사(獄舍) 있었다 하여 옥동(獄洞)이라 하던 것이 옥동(玉洞) 옥만동으로 변하였다. 옥이 있었기 때문에 밤만 되면 이쪽으로는 겁이 나서 다니지를 못하였다고 전한다. 100 호가 살고 있다.

물댕(勿堂)고개

학천에서 탐하리 옥정골로 가는 사이에 있는 고개로 물당은 물을 모아 놓은 곳을 말하는데 저수조가 있는 만당, 만댕이 고개란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물댕이라고 부르는 당집이 있었던 고개라고도 한다.

옛날 근처는 공동묘지가 있는 부근이라 도둑도 있고,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으슥한 곳이었다고 한다. 상여를 두는 상여집도 있어 아이들이 겁을 내는 고개이기도 하였다.

◎ 5-3 학천(鶴泉)

 

창녕우체국, 창녕농협, 창녕군농촌지도소 창녕농지개량조합, 창녕농산물검사소, 창녕군 노인회관, 구읍사무소가 있었던 일대의 행정리 명칭이 학천동이다.

매룡새미가 있어 이를 학천(鶴泉)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 샘은 현재 창녕군 노인회 회관 동편 개울가에 있었는데 송고못과 남산 일대 학이 서식(棲息)하였는데 그 학들이 이 우물가에 수시로 날아 왔으므로 학새미라 했다고 한다. 매룡새미라 함은 - 용이 숨었다는 뜻의 매룡(埋龍)으로 보인다. 학천동 서남쪽에 최근 새로 우물을 팠으므로 이곳은 새매룡새미라고도 부른다.

당초에는 새롭게 인가가 들어서서 새동네라 하여 새터 신기(基洞)이라 부르던 것이 교하에서 분동되면서 학천이란 행정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최근 마을이 커져 1986 7 1일에 교하 또한, 학천동에서 봉천동이 분동되었다.

전에는 240가구였던 것이 현재 408가구이며, 진양 하씨, 김해 김씨, 벽진 이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남산재(南山齋 : 晋陽河氏 奉先所)가 있다.

새터(新基洞)

교하동 남쪽으로 해방 후 귀환동포(歸還同胞)들이 모여 들어 이룬 새동네여서 새터, 새마을, 신기동이라 하였다. 학천에서 분동되어 봉천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왜정 때 토끼를 키웠기 때문에 토끼막이라고도 불린다.

◎ 5-4 봉천(鳳泉)

 

새터가 점점 규모가 커져 1986년에 학천동에서 분동하였다. 창녕농지개량조합, 농촌지도소,농산물통계출장소 등이 있다.

봉천이란 이름은 학천이나 봉천이나 같은 이름이라 하는데서 봉천이라 작명되었다. 300 호가 된다.

보건소 터

봉천의 창녕군보건소가 있었던 자리로 옛날에는 논이었다 한다. 해방 직후 이곳에 가축도살장이 있었으며,1950년경 보건소를 신축했는데 옮겨 가고 현재 창녕 노인회관이 되었다.

여제당(癘祭堂)터

교하동 남쪽에 있었던 여제당의 터이다. 여제당의 와전으로 예지당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창녕현지』에는 여단(癘壇) 在縣北一里」에 있다 하였으니 이곳은 이전의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제당은 고을에 있었던 제단으로 이곳에서 서낭신이나 역질이 제사를 지냈다. 봄에는 청명에, 여름에는 7 보름, 겨울에는 10 초하루에 지냈다.

남산(南山)

술정리와 탐하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10m이다. 이곳에 활터가 있고 아래에 신창여자중학교가 있다. 남산재(南山齋) 있다.

매실원(梅實園)

봉천 창녕농공고 남쪽 산으로 일본인이 매실밭을 만들었다. 그 후 40 전부터 창녕농공고의 실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창천

자하골에서 흘러내리는 내로 교하동을 지나 서편으로 흘러간다.

장터새미

교하리 263-1번지에 있는 오래된 우물로 인근마을 사람들 외에 술정, 교리, 교하 주민들의 유일한 우물이었다. 6·25때 명덕국교에 주둔하였던 군 교육대 장병들도 다 먹었을 만큼 수량이 풍부하였다. 지금은 상수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허드레 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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