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술정리 / 직교리

by 남전 南田 2022. 6. 7.

<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술정리와 직교리" 를 올립니다.

 

6. 술정리(述亭里)

 

호구총수에 술정리란 동명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지명은 조선 후기에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교하동의 일부였을 것이다.

창녕 읍내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배설이라 하는데 따라서 화왕산 배바우가 있으며 이곳은 배를 매어 두는 마을이라 하여 계주말(繫舟洞)지주말리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배가 뜨려면 물이 있어야하므로 술정 서탑(西搭) 근처에 오래 전에 못을 만들었는데 이 못이 이들못이라 한다.

계주말의 계주(繫舟)는 계류(繫留)와 같은 뜻으로 선박이 안벽(岸壁)같은데 정박(碇泊)한 것을 말한다.

술정리 일대는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던 절터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 복판 술정리 120번지에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국보 34호이며술정의 서편 마국선 국도변 이들(米野) 가운데인 술정리 309-1번지에 있는 서삼층석탑은 보물 52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직교리에 있는 당간지주와 탑금당치성문기비에 여러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중 인양사나 다른 사찰이 이곳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술정리 29번지에 있는 중요민속자료인 하씨 초가(河氏草家)와 함께 국보급의 탑들은 술정리의 오랜 역사를 말하고 있다.

계주말이 술정리로 개칭된 것은 술정(述亨)이란 정자로 인하였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한강 정구(鄭逑) 창녕현감(1543-1620 : 중종~광해) 성리학자 文臣. 창녕현감으로 선정함.) 이 현내에 8(八齋 : 鄭寒岡이 세운 八齋八樂亭蔓津亭勿溪亭白嚴亭述亭芙蓉亭冠山齋玉泉亭 등이다. 이곳에 각각 훈장을 두고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를 세우고 흥학교민(興學敎民)에 힘썼는데 그때 세운 서재 중 하나가 술정으로 하씨가에 정한강이 기증하였다 한다.

은 본시 높은 산을 뜻하는 말이며 」, 「(), 「() 등의 뜻을 가졌다. ()()와도 상통한다.

술정리는 단일 행정리로 술정 1개리 뿐이다. 왕산병원창녕양파협동조합창녕군산림조합 등이 있다.

 

6-1 술정(述亭)

술정은 행정리명으로 계주말지주말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법정 행정 리 명칭을 정할 때 술정이란 정자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추술재(追述齋: 陽河民 奉先所)가 있다.

 

계주말(繫舟洞)

술정리의 옛 이름으로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창녕읍내가 배설이라 함에 따라 이곳은 배를 매는 마을이라 한다. 계주말이 구개음화되어 지주말리라 불리운다.

배를 매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서펀 들이들(米野)에 못을 파니 이것을 이들못이라 부르며그 후 20여년 전에 고속도로 진입로 변에 송고못(松皐池)을 팠는데 이곳은 못을 만들기에는 난처한 곳이어서 ㄱ자 둑을 쌓아 큰 못을 만드니 이제는 배가 마음대로 뜰 수 있을 만큼 물이 많아져서 창녕읍내가 더욱 살기 좋아졌다고 한다.

 

사흘장(三日市)

마을 서쪽에 있는 터로 지금 시외버스 정류소 주변 냇가로 80년전 원래 장터였다. 3일에
한번 서는 장은 일제시대 이전에 있었던 제도로 중국에서는 3일장이 섰으므로 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일장은 곧 사라져 5일장으로 보였는데 대평장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날씨가 가물고 기우제를 지내야 될 지경이면 이곳에서 3일장을 보였다고 한다.

창녕읍내의 기우제는

제일 먼저 보릿짚을 지고 관주산에 올라 보릿짚을 사르며 지내고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2단계로 화왕산에 보릿짚을 지고 올라 가 불을 지르며 지내며(이때는 현감이 지낸다.)
3단계로는 3일장을 보이는데 기존 창녕장을 이곳으로 옮겼다.

4단계로는 물이 마른 명덕못에 장을 옮겨 보이며

5단계로는 교동 박씨단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게 되면 집집마다 황토로 대문간에 검토를 하고 수양버들소나무 가지를 내걸고 술을 먹지 않는 정성을 드린다. 제관이 된 사람은 목욕하고 3일간 정성을 드리게 된다. 보릿짚에 불을 지른 후 기문을 읽는 순서로 기우제가 진행된다.

지금 창녕장은 38일에 장이 선다. 이 일대의 가구 수는 90호가 된다.

 

서잿골

남산 아래의 마을인데 신창여중 서남쪽이다. 전에는 45호였으나 지금은 90호이다.

창녕 성씨(기장현감을 지낸 이)의 큰 서재가 있었다고 전한다. 서재를 지을 때성씨가 부자이니 담장을 쌓으면서 무너지지 말라고 찹쌀풀을 끊여 흙에 섞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부자가 그 후 인심을 잃어 민란이 일어나 그 서재가 불타 버렸다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주택(住宅)

신창여중 남쪽으로 최근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 선 동리라 하여 주택이라 불린다.

 

이들(米野)

서탑 근처의 들을 말하는데 지금 공장인가가 들어섰으며공설 운동장 남쪽의 들이다. 쌀농사가 잘되는 들이며미질 또한 좋은 곳이라 전한다. 쌀밥을 이밥이라 함에 따라 이곳 들이름을 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창녕양파조합이 있다.

 

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

이들 북쪽 남창천의 옆에 창녕읍의 공설 운동장이 있다. 이 운동장은 협소하여 상퇴천으로 장차 옮길 계획이다. (지금 현재 상퇴천으로 옮겼다.)

 

남산(南山)

신창여중 남쪽 편에 있는 산으로 창녕읍내의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이라 불리운다. 높이는 동편 정상이 110m서편 봉우리는 109.8m이다. 궁도장 남산정이 있다. 남산정 활터는 창녕읍민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썩은들

송고못위 직교리 쪽의 들로 땅이 썩은 들이라 하여 썩은들이라 불린다.

 

원래 창녕읍 일대는 절터였다. 탑금당치성문기비동탑서탑 근처는 사찰 터이며직교리의 당간지주가 선 곳이 절의 입구라 하니 그 사찰의 규모는 상상을 넘어 아주 컸으리라 전해온다. 따라서 그 큰절에 스님들도 많고 날마다 와서 불공을 드리는 대중도 많고 보니 매일 밥을 하면 몇 섬의 양곡이 들었다. 이 양곡을 씻은 뜨물이 남창천을 따라 강물처럼 흘러내리니 그 일대의 들과 도랑물이 썩게 되었다 한다.

이 들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까지 펼쳐져 있는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

술정 마을의 당이 있는 동산을 당산이라 한다. 하씨초가의 뒤편으로 이팝나무가 동산의 언덕에 있다.

 

이팝나무는 수령이 300여년이 된 고목으로 높이는 약20m이며둘레는 2m이다. 밥나무벚나무니앞나무 등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5월 초순에서 하순까지 하얀 꽃이 피는데 이 꽃이 꼭 쌀밥과 같아 이밥나무라 불리는 것이다. 국내 휘유(稀有)의 나무라서 보존되고 있다.

 

동탑(東塔) 근치(近處)

술정리 동편에 있는 3층 석탑이 서 있는 곳을 흔히 동탑 근치라 부른다. 근치는 근처의 이곳 토박이들의 발음이다.

이 탑은 국보 34호로 보존되고 있는데 높이는 5m 45cm이다.

 

서탑(西塔) 근치(近處)

술정리 서편 3층 석탑이 있는 일대를 말하는데 이 탑의 높이는 4.5m이다.

하씨 고가

하참봉(河參奉)

술정리에 오래 살아 온 하씨의 종가(宗家)로 술정리 29번지에 있는 초가집이다.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10호로 보존되고  있는데 하씨의 입창조(入昌祖)인 하자연(河自淵)이 중종 2(1506)에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이곳으로 와서 지었다고 전한다.

 

7. 직교리(直橋里)

 

직교리(直橋里)는 창녕읍의 서편에 있는데 대지면 효정리구미리와 경계이다. 호구총수에 그 지명이 없다가 구한말에 나타남을 보아 조산동이나 교하동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직교리는 직다리라 부른 것에서 기사(記寫)되었는데 직다리는 직달의 늘어진 형태로 보인다. 직달(直達)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전달하는 것을 뜻하나, 「의 음차로 () ()에 대응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오는 지명들에 이 많은 것으로 보아 흔하게 쓰인 글자이다.

다리의 음차로는 ···多羅·道理·道日 ·月良 등이며훈차로는 등이었다.

형 지명에는 근원적인 의 의미에서 전화(轉化)되어 의 의미로도 쓰였다. ( 韓國 地名學硏究序說(崔範勳))

따라서 바로」 「곧은라는 뜻이며

또는 ··드르의 음차또는 훈차로 보면 들()의 뜻이라 하겠으니 직다리직달직교는 바로 ()이라 하겠다. 화왕산으로부터 흐르는 남창천이 마을 가운데 지나며 이루는 들이 그야말로 곧바르게 환히 트인 들판을 이루었으니 직다리라 한 것이다. 마을 가운데 곧은 다리가 있어 직교라 했다하나 이는 글자의 뜻에 얽매인 부회(附會)이다.
촌로들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다리는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직교리는 창녕읍의 서쪽 입구임에 따라 당간지주가 직교리 64-2번지에 서 있으니 곧 신라 때 있었던 대 사찰 인양사의 입구임을 말해 주고 있다. 당간지주가 있는 곳으로부터 서편으로 고속도로를 너머 들이 펼쳐져 있고 최근 이 일대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구한국 지방 행정구역 명칭일람에 직교동(直橋洞)으로 나오며행정 리로는 직교와 직신 2개리가 있다.

 

7-1 직교(直橋)

직다리의 행정 리 명칭으로 창녕읍의 서편 입구 마을이다.

직다리(直達)

직교리의 동부 마을로 구마 고속도로의 동편이다. 한국 도로공사 창녕지부가 있는데 들이 환히 퇴여 곧바르게 퇴인 들이라 하여 직다리라 한 것이다. 직달(直達)은 음차이며직교
(直橋)는 직다리의 훈차이다.

92호이던 것이 현재는 158호인데창녕 성씨와 김해 김씨 등이 많이 산다.

날끝

직교 마을의 북쪽 야산의 끝부분인 모롱이이다. 남서쪽으로 새 주택들이 많이 들어섰다.

 

7-2 직신(直新)

직교리의 서부마을로 새마(新村)가 있으므로 행정 리 명칭으로 직교리의 과 신촌의 을 합해 직신이라 한 것이다. 해방 전후에는 직교 2구라 하였다.

새마(新村)

직교리의 서편 마을로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새마신촌으로 불린다. 직신 중에서는 동남쪽 마을인데 그 서편은 대지면 구미리이다. 전에는 10호뿐이었으나 지금은 79호가 살며창녕 성씨와 김녕 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

청온당(淸溫堂) 金時華 祭閣)이 있다.

도양동(道陽洞)

새마의 북쪽 20호 국도를 사이에 두고 있다. 길가 양지 마을이라 하여 도양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 북쪽에 창녕준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오리정고개

직달에서 오리정으로 가는 고개이므로 오리정고개라 한다.

어물리고개

직다리에서 대지면 어물리 들로 가는 고개이므로 어물리 고개라 한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이 고개를 통과하고 있다.

역마등(龍馬嶝) 장사등(將士嶝)

새마 서남간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높이는 67.7m이다. 전에는 한 봉우리였다고 한다.

임란 때 왜군이 지나다가 보니 산세가 장군과 용마가 날 것이므로 왜장이 산등을 잘랐다고 한다. 과연 산을 자르니 피가 많이 흘러 내렸다고 하며 만일 며칠 뒤였더라면 장군과 말이 태어났으리라 하고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고 전한다.

잘려져 두 봉우리가 되니 한쪽은 장사등 한쪽은 역()마등이라 불리운다.

새갓산

직교리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0m이다. 이곳에 충혼탑이 건립되어 있으며1978년에 경화회관이 농민의 교육장으로 세워졌다.

직교 뒷산

직교 마을의 북쪽에 있는 야산으로 높이는 30m이다. 현재는 대지로 변하여 많이 달라졌다.

썩은들

탑금당치성문기비에 의하면 신라 때에 창녕 읍내 일대에는 인양사를 비롯한 여러 큰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양식을 씻은 뜨물이 하도 많이 흘러 내려와 땅이 썩었으므로 썩은 들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직교리 일대의 넓은 들인데 쌀농사가 아주 잘 되는 논들이 많다.

송고못(松皐池)

고속도로 입구 동편에 있는 못으로 1959년에 준공하였다. 소나무가 많았던 지대이다. 산리 쪽의 이름을 따서 조산지라 하기도 한다.

 

####

1992년 발간된 <창녕군지명사>를 정리한 것이므로 지금 현재와 맞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