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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조산리 / 도야리

by 남전 南田 2022. 6. 7.

<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조산리와 도야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8. 조산리(造山里)

 

창녕읍 시가지에서 바라보면 앞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구마 고속도로 동편에 있다. 호구총수에 읍내면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조산리는 기록돼 있지 않다.

풍수설에 의하여 자그만 산을 모았다하여 조산(造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들었다는 산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고조산으로 보이는 것은 성씨 재실인 송림재(松林齋)가 있는 산인데 이 산은 천연적인 산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설에 뫼터의 앞쪽에 있는 산을 조산(朝山)이라 하고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산을 조산(祖山)이라 하는데 이곳 마을이 있는 곳의 산은 창녕 읍내의 앞산 격이니 조산(朝山祖山)이라 불리었으리라 할 수 있으니 朝山造山으로 변한 것이라 추정된다.

이곳은 예전에 둔전(屯田)이 있어 송림재의 옛 이름도 둔전재였다. 둔전은 고려조선 시대에 군사적 중요지대이거나 군사가 오래 머무는 곳(주둔지)에 평시에는 농사를 지어 자급토록 하던 농토를 말한다. 아마 조산에는 군사들의 주둔지였을 것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조산요(造山窯 : 1980년에 설치)가 있어 가야 토기의 재현과 도자기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단일 행정 리로 조산 1개 리 뿐이다.

 

8-1 조산(造山)

창녕읍의 앞산이란 뜻의 조산(朝山)이라 보이는데 사람이 쌓아서 만든 산이라는 뜻의 조산(造山)으로 쓰이고 있다. 조산(造山)은 정원이나 공원 같은 데 돌과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산처럼 꾸며 놓은 것을 말한다.

동편 땀과 서편 땀이 있는데 모두 90호이다. 서씨와 성씨 들이 많이 살며 둔전재(屯田齋 : 成氏 奉先所現 松林齋 : 祭閣)불온재(不溫齋 : 成昌達 別業)동산재(東山齋 : 徐氏 書塾) 등이 있다.

동편 땀

조산 마을의 동쪽 편 뜸을 동편땀이라 한다. 50호가 되는데 달성 서씨가 시거(始居)하였다 한다.

서편 땀

조산 마을중 서쪽편 뜸을 서편땀이라 부른다. 40호가 살고 있다.

새청(鳥廳)

마을회관 주변을 지칭하는데 이곳에 갖가지 새들이 모여 노는 자리라하여 새청이라 부른

다고 한다.

송림산(松林山)

조산 마을의 동펀 산으로 높이는 150m정도 되는데 이 산에 창녕 성씨 좌정승 비각(成有得(고려말 사람. 벼슬이 좌정승에 이름): 祭壇)과 망송각(望松閣 : 成思齋(高麗말의 忠臣. 成有得의 아들로 杜門洞 72의 한사람. 諡號貞節) 祭閣)이 있다.

 

떡고개

조산 마을에서 남쪽으로 탐하리로 넘어 가는 고개인데 탐하리 쪽에서는 조산고개라 한다.

옛날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을 판이 되면 논 한마지기에 떡 한 시루와 바꾸어 먹는 일이 있었다 하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논을 떡논이라 하였다고 하며떡논이 있는 고개라서 떡고개라한 것이다.

불온산(不溫山)

독뫼(獨山) 형태로 둥그런 작은 동산으로 송고못 남쪽에 있는데 높이는 70m이다. 성씨의 선산인데 불온당 성창원(成昌遠)의 묘비가 있기 때문에 불온산이라 한다.

비조골(飛鳥谷)

조산 마을 동펀 송림재(松林齋 : 成氏 齋室) 뒤편 골짜기이다. 이곳 지형이 새가 나르는 형국이라 하여 비조골이라 불린다.

조산지(造山池)

송고못을 조산리에 있다하여 조산지라 한다. 1959년에 만들었다. 이 못 옆에 한국도로공사
창녕지부가 있다. 송고못이라 함은 불온산에 있는 성씨의 묘소 중 한 분의 호가 송고(松皐)
이기 때문이라 한다.

신당집

조산 마을 서편에 있는 당집을 말하는데 이곳 일대를 지칭할 때 쓰인다.

미넘기 들

물넘기가 있는 들이라 하여 물넘기들이라 불린 것이 미넘기들로 변하였다. 이들 못에서 시작되는 못 아래에 물넘기 시설이 있다.

 

9. 도야리(道也里)

 

도야리(道也里)는 하리(下里)와 함께 창녕읍의 북부이면서 본래 고암면(古嚴面)의 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2개 리가 읍내면에 편입되면서 고암면의 도야동(道也洞)은 도야리가 되고 고암면 역촌(驛村)은 하리가 되었다.

도야리 가운데로 20호 및 24호 국도가 지나간다.

도야리는 디이불되불이라 불리었는데 디이불되불의 는 뒤()이며, 「
()로 들()의 옛말이다. 그러므로 디이불은 뒤에 있는 벌뒷벌이니 창녕현 현치(縣治)의 뒤에 있는 들이란 뜻이다. 동남쪽의 산에는 가야 때의 읍성이거나 목장으로 사용된 목마산성이 있으며도야리 마을 서편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니 바로 이 들이 창녕 읍내의 뒷들인 것이다.

행정 리는 도야 1개 리만 있다.

 

9-1 도야(道也)

디이불곰터못밑 등 자연 마을의 행정 리 명칭으로 99호가 살고 있다.

디이불(道也)

뒤에 있는 들이란 뜻으로 디이불되불로 불리어 졌는데 도야는 디불의 차자로 의 음차이고 는 곧 이니 훈차(訓借)이다. 로 쓰지 않고 그 뜻을 따 와 통하므로 로 썼다.

일정 때부터 道也로 썼다하나 실은 호구총수에 나오는 지명이니 오래 된 지명이다.

전에는 110호였던 것이 지금은 80호이며해주 오씨창녕 조씨 등이 많이 살고 하씨김씨도 일부 있다. 원모재(遠幕齋 : 權氏 奉先所)백운재(白雲齋 : 昌寧曺氏 奉先所)가 있다.

곰터

도야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뒷산이 곰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감터로 보인다.

등으로 호전되는 의 고어(古語)의 고훈(尼叱今·寢錦·上藍에 쓰여 졌다 .의 어원은 ·(玄黑)이라 하였다.( 古歌硏究(梁柱東) p.8;.....9 )

은 우리말 지명에 많이 쓰였으니 이곳 곰터도 바로 신이 계시며제사를 드리는 곳인 금터(神鄕)인 것이다.

창녕읍 일대에 고분군이 여러 곳 있는데 그 중 도야 마을 인근과 교동송현동 등이 넓게 분포되어 있고특히 구멍덤이라 부르는 산이 있으니 이 구멍덤구무바희는 바로 지명으로 보이니 이 일대가 고대인들이 신이라 모셔졌던 지도자가 계셨던 곳이거나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 있는 신성한 곳이므로 」, 곰터라 불렸던 것이라 보인다. 으로 호전된 것이다.

이 지명은 상대(上代)의 신앙 정신면과 관계가 깊은 지명이라 할 것이다.( 韓國 地名學 硏究序說(崔範勳) ) 일어(日語)에도 신()가미’, 거북()가메라는 말이 있으니 과 서로 비교가 된다.

이곳에 10호가 살고 있으며 해주 오씨가 많다.

 

곰터고개

곰터에서 북쪽으로 고암면 우천리 소내로 가는 고개인데 20호 국도선에 있다. 이 고개 마루에 정자나무가 있고 사당이 있었다. 또 그 옆에 34호의 주막이 있어 길손들을 맞았다.

지금은 사당도 주막도 없고 정자나무만 서 있다.

 

웃말(上洞)

곰터 아래 남쪽 편으로 하리와 인접한 관계로 하리, 하동이 아래쪽 서편임에 비하여 이곳은 위쪽 동편 높은 지대라 하여 웃말상동이라 한다.

그런데 일정 때 상동못이 생기면서 못 아래가 되어 못아래 마을이라 하여 못맡지하(池下) 라 부른다.

상동못(上洞池)

일제 때 판 못으로 상동의 못이므로 상동못이라 한다. 이 터에 고려 때 손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다고 전한다.

불미고개

도야 마을에서 남쪽으로 곰터고개 못 미쳐 불미간(治場間)이 있었던 고개라서 불미고개라 부른다. 이곳 대장간에서는 각종 농기구를 벼리었다. 지금은 불미간이 없어졌다.

구멍덤이(孔岩山)

도야 동남쪽의 산이다. 이 산은 화왕산의 북쪽 줄기로 목마산과 같은 산이다. 높이는 460m이다.

구멍덤이라 하여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 산이 아니다. 구멍덤의 구멍의 옛말은 구무구무의 변화이다. 구무 구미 거미로도 변하니 바로 아래 고개인 곰터곰터고개 등과 연관해 볼 때 이 산은 ()이 계시는 곳으로 구무()구무바희이다.

은 큰 바위산을 뜻하는 이곳 토박이 말이다.

성터(城址)

구멍덤이 상봉에 있는 성터를 말하니 곧 목마산성의 성터를 가리킨다.

여무산(女舞山)

도야 마을 뒤에 있어 뒷산이라 불리는 산으로 높이는 180m이다. 여자 무당이 춤을 추는 지형이라하여 女舞山女巫山이라 하였다. 고암면 사이에 있다.

구렁굴골

도야 동쪽편의 골짜기인데 구멍덤이 아래이다. 구렁은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간 곳이니 곧 을 말하니 구렁굴도 구멍구무의 변화이다.

골이 깊으며 구렁굴골 동편은 고암면 우천리로 이 계곡을 통하여 우천리 소내와 안치골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다.

양지골

구멍덤이 아래 양지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하얀 바위가 있어 이것을 백구암(白丘)이라 부른다. 전에 절이 있었다가 6·25 때 소실되어 없어졌다.

갈밭골

도야 마을 동편 뒷산으로 갈대가 무성한 골짜기여서 갈밭골이라 한다.

염불덤이

도야 마을의 동편 뒷산 중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이 산의 정상에 목탁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이것을 목탁덤이라 하는데 예전에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던 곳이라 하여 염불덤이라 불린다. 절이 있었으나 6·25 때 소실 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원통잇골

도야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통 분통하다는 뜻도 있겠으나 골짜기가 원통(圓桶)처럼 생긴데서 왔다고 한다. 안쪽에 원통약수가 있다.

누런 배미끝(黃蛇말리)

도야 남쪽편의 들로 교동리와의 사이에 있다. 이 들은 황토가 많아 논이 누르스름하였으며 그런 누런 논배미가 이어져 있었으므로 이 탈락되어 누런배미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서 누런 뱀황사(黃蛇)로 기사(記寫)한 것이다. 그러므로 황사는 黃沙황토를 가리킨다.

말리는 흔히 넓은 들마당마을을 말말리만리 등이라 부르니 +형태이다. 이 들에 끝을 붙인 것은 창날끝과 마찬가지로 지대의 끝보다는 그곳을 지칭하는 강조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 들에서 생산되는 쌀은 미질이 아주 좋아서"황사말리 쌀을 먹으면 영장도 무겁다."
하는 말이 전해 온다.

황소밭 등대

황사말리 높은 곳은 밭이 많은데 이 지대를 황소밭 등대라 부른다. 예전에 창녕 읍내에서 서울로 가려면 생애골-이문재-청도로 가는데 이곳을 지나야 된다. 역시 이곳 쌀도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황소는 황토-황사의 변화로 보인다.

길위 못

도야 마을 바로 남쪽에 있는 못으로 20호 국도 길 위쪽에 있는 못이므로 길위못이라 한다.

또 그 옆 동편의 작은 못은 동네 위의 못이란 뜻으로 동위지(洞上池)라 부른다.

 

** 1992년 발간된 <창녕군지명사>를 정리한 내용이라 지금 상황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