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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퇴천리

by 남전 南田 2022. 6. 9.

<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퇴천리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11. 퇴천리(兎川里)

 

퇴천리(兎川里)는 본래 창락면이었고 창락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창락면(昌樂面)은 현재 창녕읍의 남부이니 퇴천리를 위시하여 탐하리신촌리용석리여초리옥천리 등이었다. 외부리는 본래 어촌면(漁村面)의 내부곡촌(內釜谷村)과 외부곡촌으로 있었다가 1914년 창락면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이 창락면은 195571읍 승격을 앞둔 창녕면에 합하여졌다.

이곳 퇴천리는 호구총수에는 본창락촌(本昌樂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퇴천리라 개칭되었으니 마을 앞을 흐르는 내의 이름이 퇴끼내이므로 이를 토끼 토()내 천()으로 기사(記寫)하여 兎川이 되었으나 이곳 사람들이 토끼를 첨가 음으로 퇴끼라 발음하고 경북 안동의 도산면 土溪퇴계로 발음됨과 같이한자 라 하기보다는 로 발음하는 속음이 굳어져 현재 한자로는 토천리라 쓰면서도 군내에서 사용하기는 퇴천리로 굳어져 버렸다. 일종의 속음이 공식화되었다 할 것이다. 대합면 퇴산(兎山)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는 탐하리도 같은데탐하리도 한자는 탄하리(呑下里)라 쓰면서 의 옛말의 영향으로 탐하리라 굳어져 공식화되었다.

 

창락면 시절 면사무소는 퇴천리 지금의 창락교회가 그 터였다. 6·25때 면사무소 건물이
소실되자 퇴천리 213번지 후락당(後樂堂 : 瑞興金氏 齋室)으로 임시로 옮겨 업무를 보다가 그 후 퇴천리 191번지로 옮겼다가 창녕면과 창락면이 합해 짐으로 사라졌다.

창락지서는 마구선 국도와 1080번 지방도인 장마면으로 가는 길 삼거리에 있었다. 이 창락지서는 1922년에 성씨 재실에서 개설되었는데 1972년 가을에 퇴천리로 옮겨 지금의 퇴천리 마을회관 부근이었는데 6·25때 소실되어 퇴천리 504번지로 옮겼으나 이 또한 소실되어 재건되기도 하였다. 창락면이 창녕면에 합해지자 1955824창락출장소가 되었다가 19561214일에 폐지되고 말았다. 옛 자리에 지금은 우사가 지어져 있다.

퇴천리의 남쪽 생광 마을에 창락초등학교가 있으며행정리는 퇴천 1개 리뿐이다.

 

11-1 퇴천(兎川)

퇴천리 내의 여러 자연 마을의 행정리 명칭으로 퇴끼내창락동거우내생광우진기버들 등 마을을 관할하는 이장이 있다. 전체가 151호이다.

 

퇴끼내(兎川)

퇴천리의 동부 위쪽에 있는 마을로 마구선 국도변 동편 마을이다. 마을 앞에 흐르는 내도 퇴끼내라 부르니 이 내의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 내 이름을 딴 마을이 길을 경계로 하여 나누어지니 동편 마을은 말흘리 상퇴천이고 서남편의 마을은 퇴천리의 본동인 퇴천이다. 이를 상태하태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 창락면의 면소지서가 있었다. 전에는 70여 호였으나 지금은 64호가 살며문화 유씨가 시거(始居)하였다 한다. 동리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회화나무 정자가 있는데 둘레가 4-5 아름이 된다.

 

창락동(昌樂洞)

호구총수에 본창락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따라서 지금도 본창락이라 불리기도 한다.

토끼내의 서편 고속도로 지하통로를 지나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서홍 김씨의 세거지로 낙남재(樂南齋 : 瑞興金氏 奉先所)와 후락당(後樂堂 :

瑞興金氏 齋室고속도로 編入 現無)가 있었다. 39호가 살고 있으나 전에는 50여 호였다.

 

 

 석탑(石塔) 

창락동 한가운데 있는 터로 민가의 마당에 전에 삼층 석탑이 도괴된 채 있었다. 이 탑은 1969 10월 창녕읍 박물관 만옥정으로 이건 복원하였다. 이 터가 지금은 인가가 들어선 곳이나 예전에는 석탑이 있었을 만큼 큰 사찰이 있었던 터로 알려져 왔다. 이곳에 절이 있었을 때는 마을은 남쪽 산 아래에 있었다 한다.

이 탑의 높이는 3.5m로 신라 일반형 우수한 석탑이라 한다.

 

우진기(羽震基)

창락동 서북쪽의 마을로 지도상에는 우진지라고 오기하고 있다. 우정기로 불리기도 하나 우진기가 와전된 것이다.

전에는 7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호 뿐이다.

 

거우내(鏡川)

마을 앞에 흘러가는 내가 하도 맑아 거울과 같아서 거울내라 부른 것이 거우내경천으로 되었다. 창락동 서편의 마을이다.

전에는 26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9호가 산다. 뜸이 두 개인데 남양 홍씨와 남평 문씨가 살았다 한다. 퇴끼내가 이 앞에 와서는 내 이름도 거울내경천으로 불린다. 일설에는 경천(鏡川)이 아니라 아천(鵝川)이라한다. 이곳의 아랫마을이 어심이 어섬(漁島)이라는 곳도 있어 물이 많았던 곳이라 늘 거위()가 많았기에 이곳을 거위내」「거우내로 불렸다고도 한다.

 

생갱이(生光)

창락동 서남편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창락초등학교가 있다. 칠봉산 줄기가 서편으로 뻗어 내려온 산자락 뜸이다. 여초리와의 경계 마을이라 길을 사이에 두고 인가가 붙어 있는데 퇴천 생갱이와 여초 생갱이 두 뜸이 있다.

25여 호가 살며 여초리의 뜸에는 78호가 살며창원 황씨의 세거지이다.

 

감나무들

창락동 남쪽 들로 지금은 저온창고가 들어선 곳으로 전에 마을이 있었다 한다. 이 마을터에는 상산 김씨가 살다가 김해 쪽으로 옮겨 갔다 하는데 기왓장토담 무더기가 남아 있어 집터가 아직도 완연하며인가 주변에는 감나무가 오래 남아 있었으므로 감나무들이라 한 것이다.

 

비슬산, 비들재(琵瑟山, 鳩峴山)

퇴천리에서 동편으로 옥천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산 일대를 비들재라 하는데 비슬산, 구현산이란 산 이름이면서 동시에 고개 이름이기도 하다.

산 모양이 삐죽삐죽 닭 볏 모양이라 비슬재, 비슬산이라 불린 것이다. 비슬은 닭 볏으로 이 지방말이다.

창녕에 살던 하씨 2세손이 죽어 무덤을 쓰기 위해 이 산자락에 묘터를 팠는데 그 자리에서 비둘기가 날아 나왔다 하여 비들재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왼쪽인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골짜기가 있는데먼저 까재골 양달이 나오고내 건너편에는 약샘이 있다. 그 다음 골짜기는 석진골이며 퇴천리 공동묘지머구박골 등이 있는데 머구박골 정상이 화왕산 남쪽 정상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하늘골이라 불리는데 돌아진골이라 하기도 한다.

머구박골 너머는 옥천리 구역인데먹뱅이라 불리우고 먹뱅이를 지나면 널뱅이()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사불음달그 다음 냇가를 지나 감나무골다음이 꼬장미꼬장미의 정상이 꼬깔봉이다. 중간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고개 중간쯤에 감나무징 이 있고그 위에 있는 골짜기를 짐피골이라 부르며이 골짜기의 정상이 비들재비슬산, 구현산이라 한다.

최근 왜고개에서 옥천까지 이르는 3km 연장의 임도(林道)를 개설하여 길이 넓어졌으며, 고갯마루 못 미쳐 인가들이 5집 있었으나 지금은 1집만이 있다.

남쪽 봉우리는 고깔봉이라 불리는데 산의 높이는 350m이다. 이 산마루에 왜정 때 방공감시초소가 있어 경방대원(警防隊員)이 지켰다.

 

재련골(紫蓮谷)

신라 시대 자련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골짜기이므로 자련골이라 불리었다. 이 골짜기 입구에 작은 뜸이 있었는데 지금은 34호가 있다.

퇴끼내가 이 골짜기에서 시작되는데 내의 남쪽 편이 퇴천리이고 북쪽이 말흘리이다. 골짜기는 두 갈래인데 북쪽으로 오르면 자련사에 이르고남쪽으로 오르면 높이 6~7m의 자련폭포를 만난다.

자련재(紫蓮齋: 成昌郁 墓閣)가 있다.

 

승골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자련골 아래의 일부인 이곳을 승골(僧谷)이라 한다.

퇴끼바우(兎岩)

자련골의 아래에 있는 큰 바위로 이 바위로 말미암아 내의 이름이 연유하였다. 지금 상퇴천 바로 남쪽 냇가 언덕 위에 있다.

승골의 절이 하도 크고 신도들도 많았던지 이곳에서 내려오는 뜨물이 탁하고 나빠서 절 아래에 사는 부자가 어떻게 하면 절을 망하게 할까 궁리를 하였다 한다. 중부대방(中部大坊)이란 벼슬을 산 부자는 그의 세도를 이용하여 절에 드나드는 중을 붙들어 두들겨 패거나 욕을 하는 등 못살게 굴어 중들을 절에서 쫓아내고 산문을 닫게 하려 하였다.

중부대방의 핍박에 견디다 못한 절 측에도 궁리를 한 결과 퇴끼바우 때문에 부자가 되었음을 알고 이 바위를 깨어 버리면 부자가 망하여 버릴 것이라 예견하였다.

상좌가 어느 날 부자를 찾아와 주지에게 쫓겨났다면서

"저놈의 바우만 깨트려 버리면 이 지방에 더 큰 부자가 난다고 비밀리에 얘기하는 말을 들었노라."

하며 귀띔을 해 주고 사라졌다. 상좌의 속임수임을 깜박 모르고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될 욕심으로 일꾼들을 시켜 퇴끼바우를 깨트리게 하였다. 일꾼들이 바위를 깨뜨려 버리니 그 속에서 토끼 한 쌍이 나와서 산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도 망하고 부자를 망하게 한 절도 망하였다 한다. 지금도 바위가 쪼개어진 채 언덕 위에 있다.

 

배락등

자련골 입구에 있는 산등성이로 이곳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 해 벼락을 맞았다 하배락등이라 부른다. 배락은 벼락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서낭당

자련골 입구에 있는 퇴천의 서낭을 모신 당으로 음력 정월 보름에 당제를 올린다.

남재련골

자련골 남쪽 골짜기를 남재련골이라 한다. 폭포가 있어 매년 여름에 사람들이 많이 놀러 오곤 하였다.

양정(良丁)다리 걸

퇴천 마을 남쪽 마구선 국도에 걸려 있는 다리이다. 이 일대를 양정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칠봉산(七峰山)

창락동 남쪽 앞산인데 여초리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왜고개에서 서편 생광까지 이르면서 봉우리가 일곱 개라 하여 칠봉산(七峰山)이라 한다. 높이는 130m이다.

이곳에 탕건처럼 생겨 탕건바우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왜고개

퇴천 마을 남쪽에 마구선 국도가 넘어가는 고개인데 칠봉산의 동편에 있는 고개로 여초리로 간다. 고개 아래에 집이 두어 채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왜()고개라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창락 밖의 고개란 뜻의 외()고개로도 보인다.

왜정 때 이곳에 동양 면양(綿羊)연구사무소가 있었는데 면양을 키우며 분양도 하는 종축장이었다. 초지(草地)를 인근에 조성하여 면양을 대량으로 키웠는데 농사만 짓던 농민들에게는 호기심을 주었으나 목축을 하려는 이가 없었으므로 왜정 말기에는 폐쇄되었다. 면양의 털로 창녕에서 홈스판 모직을 짰다고 하는데 그때 공장은 지금의 창녕여중고 동편에 있었다.
공장 건물은 초등학교 과정과 농업기술을 가르쳤던 창녕고등공민학교 건물로 말흘리에 있었는데 이 공민학교 폐쇄되자 그 건물에 양털로 베 짜는 공장을 차렸다. 이 공장 건물은 6·25 때까지 있었다. 지금 창녕여중고 테니스코트 자리이다.

 

구박산

생광 서편에 있는 산인데 이 산의 형태가 물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한다. 퇴끼내의 물이 이 산에 부딪혀 돌아 나간다. 귀막산이라고도 한다.

선달네 골짝

우진기 서편에 있는 골짜기로 광산 김씨의 선산이 있으므로 그 가문이 선달네 집안이라 하여 선달네 골짝으로 부른다.

약산골

거우내 서편으로 신촌리 환곡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개구디기

약산골에 있는 구덩이로 예전에 이곳이 펄구덩이가 있어 짐승들도 빠져 죽고 사람도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 죽었다 한다. 소도 빠져 죽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전한다. ()는 뻘, 펄이 많은 곳을 말한다.

 

퇴끼내(鏡川)

재련골에서 시작하여 창락 마을 앞을 지나 용석리외부리를 거쳐 유어면으로 흘러가 낙동강에 유입된다. 창락동을 지나서는 거울같이 맑다 하여 거울내, 경천이라 불리기도 한다.

퇴천들

온배미들이라 하기도 하는데 퇴천 마을 일대에 있는 동리 쪽의 들이라 하여 퇴천들이라 한다.

새미보

감나무들 뒤편 논 언덕에 수원이 아주 좋은 샘이 있어 이것을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참새미라 하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손이 시릴 지경이며땀띠 난 데에 치료 효과가 큰샘으로 이 물을 이용하는 보가 설치되어서 새미보라 한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  이 지명유래는 1992년 11월에 발간된 <창녕지명사>를 수록한 것으로 현재 상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