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용석리와 여초리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14. 용석리(龍石里)
용석리(龍石里)는 창녕읍의 남서부 지역으로 본래 창락면이었다. 용석리는 동서간이 아주 긴 형태로 서쪽 작다리에서 동쪽 골용석까지 그 길이가 5.5kIn인데, 서쪽으로 대지면과 유어면 사이를 깊숙이 파고 들어갔는데 이 들을 세거리벌이라 한다ㅣ..
『호구총수』에는 용석촌과 이교촌(泥橋村)으로 나오는데 1914년 2개 리가 합해지면서 용석리가 되었다. 이때 뒷개, 새말, 어섬, 진다리, 작다리, 학산 등의 자연마을을 포함하여 법정리가 되었다.
산이 용의 형상이라 하여 용덤이라 한 것이 용석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용석리의 남부인 골용석, 양용석 두 마을이 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마을 앞을 흐르는 퇴끼내에 돌이 많은 것이 특색이라 한다.
행정리는 3개 리로 어도(漁島) 이남(泥南) 학산(鶴山) 등이다.
◎ (1) 어도(漁島)
용석리의. 본동으로 동부의 어섬, 양용석, 골용석, 새마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전체 호수가 전에는 93호였으나 지금은 74호이다.
◎ 어섬(漁島)
예전에 큰 내가 마을 주위에 흘러 이곳이 마치 섬처럼 보여서 내륙의 한가운데지만 섬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어섬이라 하고 어도(漁島)로 기사(記寫)하니 천지개벽 때 고기 머리(漁頭)만큼 남았다고도 한다.
옛날 이곳은 궁벽한 곳으로 죄수틀을 유배(流配)하였던 정말 섬과도 같온 외부와 단절된 지대였다고 전해 온다. 인근 서편에 신라 고려 때 신문부곡(흙門部曲)이 있어 이와 연관지어 볼 때 신라 병합에 반대한 비화가야의 사람들이 이 일대에 유배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어섬은 신문부곡의 구역이라 하겠다.
34호가 사는데 장수 황씨와 진양 강씨가 많이 살며, 창남국민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었다.
◎ 서재골
어섬 뒤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서재가 있었다 한다. 지금도 집터가 있었던 흔적으로 기왓장이 나온다.
◎ 양지땀(陽龍石)
어섬의 동쪽편 마을로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양지땀이라 하며, 양용석으로 기사(記寫)되었다. 19호로 밀양 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 골용석(谷龍石)
양지땀인 양용석의 남쪽 골짜기 안의 뜸이므로 골용석이라 한다. 조선조 말에 서흥 김씨가 세거하였으며, 전에는 20여 호였던 것이 10호로 줄었으며, 기룡재(起龍續 : 瑞興金氏民 奉先所)가 있다.
◎ 새마
어섬의 바로 남쪽 도로 건너의 산 아래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창녕 성씨가 사는데 11호이다.
** 선심 비석껄
창남국민학교 앞 어도교 건너 동편에 선심비라 불리는 비석이 서 있는 거리인데, 이 비는 대지주(서씨)가 어려운 소작인의 소작료를 탕감하여 주는 등 선심을 썼다고 하여 소작인들이 세운 비이다.
** 남운(南雲) 비석껄
석현과 새마 사이에 남운처사 이병원(李秉源)의 비가 있는 거리인데 그의 제자들이 1979년에 세웠다.
◎ 이남(泥南)
용석 7담 중의 하나로 진다리의 행정리 명칭이다.
◎ 진다리(泥橋 : 泥南)
진다리는 들 복판의 마을로 흙이 무르고 진흙이 많은 지대여서 진들이란 말이 진다리가 되었다.
다리는 들로 옛말 「들 • 들 • 드르」 등인데 산 또는 들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들」이 드르, 다리로 늘어진 것을 이교로 훈음차 하니 「泥」의 훈은 수렁, 진흙 이(니)이며 「橋」는 다리 교이니 「들」의 음차인 것이다. 이남은 이교의 아화이다.
50호가 살았는데 30호로 줄었으며, 진양 하씨가 시거(始居)하였다 한다.
◎ 학산(學山)
학산은 이남의 북서쪽 마을로 용석리의→서편의 학산, 후포, 작다리 등 여러 마을의 행정리 지명이다.
이 마을을 이남 마을에 비하여 북에 있다 하여 이북(泥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옛날 마을 뒷산이 학처럼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이 근처에 학이 많이 살아서 학산이라 하였다 한다. 이 일대는 늪이 있어 저습지가 대부분이었다.
학산 마을은 15호로 창녕 성씨가 많이 살고 있다.
◎ 뒷벌(後浦)
학산 뒤쪽 북에 있는 마을로 학산 뒤에 있는 벌이라 하여 뒷벌, 후포가 되었다. 6호가 살고 있다.
◎ 작다리(鵲橋)
학산과 후포의 서쪽 창녕읍의 끝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까치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작다리라 불렀다. 까치나 까마귀는 흔히 고대인에게는 해의 정령 해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후대에 와서 까치는 길조로 까마귀는 죽음을 알리는 흉조로 치부되었다.
뒷산 까치산이 까치 형국이고 마을이 있는 지대가 그 까치의 다리에 해당되어 작다리라 한다고 하나 「달」은 옛말 「ᄃᆞᆯ」로 산 또는 들을 나타내는 옛말의 변형인데 이때는 산을 말하니 곧 까치산을 뜻한다.
유어면 쪽에도 똑같은 작다리가 있어 이를 구별하기 위해 창녕(뒷) 작다리, 유어(앞) 작다리 등으로 부른다. 16호이던 것이 12호로 줄었으며, 옥산 김씨가 시거하였다 한다.
** 자무덤
장씨들이 예전에 살았다 전하는 마을 터로 지금은 이사를 가버려 폐동이 되었으며, 밭과 묘지로 변하였다.
자무덤의 '자'는 '작은' 뜻이며,「무덤」은 묘지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한 집단, 떼, 무리의 이곳 지방말로 「무디기」가 변한 것이다. 작은 뜸이란 뜻이다.
** 부엉덤
학산동 서쪽에 있는 산으로 부엉이가 새끼를 칠만큼 험하다 하여 부엉덤이라 부른다. 유어면 풍조리의 뒷산이기도 하다. 붕덤이라고도 하는데 부엉덤의 줄여진 말이다.
** 조리봉
이남 동쪽으로 조리처럼 생긴 산이므로 조리봉이라 부른다. 조대봉, 조루봉, 「朝禮峰」이라 하기도 한다. 높이는 91.6m이다.
** 돌빼기
이남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두 평 반 크기의 바위인 큰 돌빼기와 한 평 크기의 바위인 작은 돌빼기가 있어 돌빼기라 부른다. 현재 이 바위들은 논 한가운데 놓여 있다.
** 노인봉(老人峰)
새마 남쪽에 있는 산을 노인봉이라 부르는데 장마면과의 경계지점에 있다. 이 산 아래 팬실뜸이 있다.
** 잡살고개
자갈고개, 자살고개라고도 하는데 어도에서 북으로 환곡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 자갈이 많아서 자갈고개라 했는데 잡살은 자갈이 변한 말이다. 서낭당이 이 고개에 있어 서낭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 어븐골
어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 안에 잡살고개가 있다.
* 홈골
홈같이 푹 패인 골짜기라 하여 홈골이라 한다.
** 귀바우
양용석 마을 뒤(북)의 산으로 산의 형상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감고 있는 것이라 하는데 뱀 머리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어 이것이 뱀의 귀부분에 있으므로 귀바우라 한다.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이 여기 와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고 하며 요즘도 기도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 들과 벌
* 시거리벌(細巨里浦) - 후포에서 작다리 사이의 저습지 일대가 대지면 용소리의 세거 리 앞이므로 세거리벌, 시거리벌이라 부른다. 늪이 있었는데 최근 수리시설이 이루어져 논으로 바뀌었다.
* 뒷벌(後浦)- 뒤에 있는 벌, 늪을 가리키니 바로 세거리벌의 일부이면서 후포 마을 일대의 들을 말한다. 이곳도 전에는 늪이 있고 매년 침수되는 곳이었으나 최근에는 수리시설이 완비된 답작지대로 되었다. 앞벌에 대칭되어 불리었다.
* 앞벌 - 학산 앞 남쪽 편의 벌인데 세거리벌 일대에 비해 앞쪽에 있는 들이므로 앞벌이라고 부른다. 이 근처 들을 성창들이라 한다.
큰 물이 들면 뒷벌과 앞벌에 물이 드는데 학산 이남 쪽의 물은 풍조 앞에서 올라오고 또 북쪽에서는 세거리벌이 먼저 침수되고 그 물이 와서 학산 동편에서 두 물이 서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메기가 코를 꿰었다고 말한다.
* 선창들 - 용석 마을 끝에서 서편으로 이남 마을 앞까지의 들을 선창들이라 한다.
* 구들 - 이남 마을 동쪽에 있는 들을 구월들, 구들이라 한다. 물길이 좋아서 가물어 흉년이 들어도 이곳 구월들 만은 이삭을 주울꺼리가 있었다고 한다.
* 섬들 - 여러 들 중에서 조금 높은 지대로 침수가 되어도 나중에 섬처럼 남았으므로 섬들이라 한다.
* 용석보 - 양용석 마을 앞의 보인데 지하로 약 1km 가량 물을 끌어 온다.
** 용석천(龍石川)
용석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를 용석천이라 한다.
16.여초리(余草里)
여초리는 본래 창락면 지역으로 『호구총수』에 창락면 남통촌(南通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풀이 많아서 여초라고 하였다 하나 그보다는 남통을 여통으로 하였으니 여통(余通)의 여(余)와 초막골의 초(草)를 합한 동리 이름이다.
남통은 남쪽으로 통하는 곳 이란 뜻이 있는데 남통마을 앞산이 여통산이며, 이 산에 여통산 봉수가 있었다. 따라서 여통은 남통의 기사(記寫) 로 여(余)는 ‘남’을 ‘여’로 훈차 한 것이다.
초막골은 6.25때 피아간의 전투 중간에 휘말려 들어 큰 피해를 본 마을로 예전에 초막들이 있었다 하여 초막골로 불리었다고 한다.
여초리는 영산현과 창녕현의 경계가 되는 곳이었으므로 지경골(地境谷)이 되는데 이 지점은 창녕읍의 남쪽 입구로 지금은 장마면과 인접 하고 있다.
행정리로는 여초와 화전 2개 리가 있다.
◎ (1) 여초(余草)
여초리의 동부로 남통마을과 초막골, 지경골 등의 행정리 명칭이다.
전에는 101호 였으며 지금은 88호이다.
◎ 남팅이(余通)
남통, 남통이, 남퉁이 등등으로 불리는 여초리의 중심마을로 옛날 이곳이 창녕현과 영산현의 경계로 장승이 서 있어 남쪽으로 통하는 곳이란 뜻으로 남통이라 불린 것이 남팅이로 변하였다. 남쪽 앞산이 봉수대가 있는 여통산이니 서로 같은 맥락의 지명이다.
여[余]는 그 훈이 ‘남을 여’이므로 ‘남’의 차자로 [余]자를 쓴 것이다.
지도상에 여초라 표기되어 있듯이 요즘에는 이곳을 여초라 부른다. 동리 뒤에 옛날부터 남통지 저수지가 있었으므로 못 아래 마을이라 하여 일시적으로 지하동(池下洞) 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동편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25호가 살고 있다.
◎ 새동네
남통의 뜸으로서 중부고속도로 개통 시에 부지가 편입된 가구 중 16호가 모여 이룬 새동네이다. 경주이씨가 많이 산다.
◎ 지경골
남팅이의 동남쪽 마을로 예전에 창녕현과 영산현의 경계가 되므로 지경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구선 5호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데 장마면과 창녕읍의 경계가 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골짜기이기도 하다. 들 이곳저곳 뜨문뜨문 집들이 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고속도로 개통을 하면서 국도 좌우편에 집단 이주하여 새마을이 이루어졌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내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장마면 초곡이고 북쪽은 창녕읍 땅이다. 전에는 32호였으나 지금은 27호이다.
지경골 안의 작은 골짜기들이 많은데 창녕읍 지역으로 양달쪽 입구에서부터 들먹이면 다음과 같다.
첫나드랑, 쟁끼등, 뒤가풀막, 너구리등, 자래등, 절터골, 불땅골, 뱀이 많았던 누굴미골짝, 그리고 꼬깔봉이 솟았고 가장 안쪽에 옥천으로 통하는 지경골재, 창락골이 있고 그 남쪽 편은 삼성암으로 통한다 남쪽 편 응달은 장마면 구역으로 기암비탈, 돌안진고랑, 등이 있다.
◎ 초막골
마구선 북쪽의 마을로 지경골의 북쪽에 있다. 농사를 짓는 초막들이 있어서 초막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36호가 사는데 창녕성씨의 세거지 이다
**낭껄
여초와 화전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초곡리-왜고개 간의 창녕 장길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으므로 주막이 있었던 거리였다. 낭껄은 서낭껄의 축약이다.
◎ 화전(花田)
여초리의 서부 지역으로 꽃바정과 섬마등 자연마을의 명칭이다,
◎ 꽃바정(花田)
남톰마을의 서북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이 일대에 백일홍 꽃이 많이 피어서 꽃밭을 이루었으므로 꽃밭정이라 불리었던 것이 꽃바정으로 변하였다. 예전에 목화를 많이 심은 마을이라 한다.
김해김씨 칠 형제가 살았다 하며 성주 배씨가 많이 살며 마을의 호수는 17호가 된다.
◎ 섬마(島村)
꽃바정 서편에 있는 마을인데 예전에 냇물이 많이 흐를 때 이 일대가 높아 마치 섬처럼 보였으므로 섬마을이란 뜻으로 섬마 슴마 라고 불렀다 한다.
20여 호가 살며 밀양박씨 파평윤씨 등이 많이 산다.
**항지곡(亢之谷)
섬마 근처로 지대가 함지처럼 생겼으므로 함지골이라 한 것이 항지골로 변하였다.
**왜고개
왜고개라 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진을 친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왜정 때 이곳에 면양을 키우고 분양하는 종축장이 있었다.
고개 남쪽에 인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집 한 채 있을 뿐이다.
북쪽으로 창락 퇴천으로 통하는데 마구선 국도가 통과한다.
**쌍거덤(雙轎山)
초막골 동쪽에 있는 뒷산인데 화왕산의 남쪽 줄기로 비슬산, 비들재의 남쪽 산이다. 높이는 456.6 미터이다. 쌍기덤 쌩기덤 이라 하기도 하는데 쌍교의 변화이다,
옛날 천지개벽을 하여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이 산의 정상이 크기가 쌍가마만 한 바위만이 남았다 하여 쌍가마덤이라 불리었다 한다. 쌍가마덤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산 아래에서도 훤히 보인다. 쌍거덤 맞은편 산을 구시덤이라 부른다.
날씨가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야 하면 이 산에 올라가서 지낸다.
**꼬깔봉(鳩峴山)
쌍교산 동쪽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구현산으로 나와 있다.
산봉우리가 뾰죽하게 생겨 마치 삿갓이나 꼬깔과 같은 모양이므로 꼬깔봉이라 하는데 비슬산의 일부이다. 높이는 350미터이다. 이 산의 북쪽에 비들재가 있다. 이 고개산을 지도상에는 구현산이라 표시하여 놓았다.
**비들재(琵瑟山)
꼬깔봉 북쪽 퇴천리와 경계가 되는 비슬산의 산 이름이기도 하고 고개 이름이기도 하다. 이 고개는 여초에서 창녕 옥천 간의 장길로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장보러 가거나 나무를 하거나 볼일을 보러 다녔다. 지금은 왜고개에서 동으로 옥천리 담안까지 임도(林道)를 닦아 길을 넓혀 차가 다닐 수 있다.
길이는 약 3km이며 고갯마루가 베틀 모양(도투마리) 이라 한다. 예전에는 3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한집이 있다.
**남통고개
여통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 인데 남통으로 오는 고개라 하여 남통고개라 부른다.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는 남통고개는 틀린 것으로 그곳은 계성으로 넘어가는 계남지 고개이다.
**생애골
지경골의 동북쪽 골짜기로 전에는 한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3~4 호가 있으며 농장들이 있다. 생애는 상여의 이곳 토박이말로 이곳에 상여집이 있었다.
**피밭골
남통 뒤의 높은 산으로 옛날 피를 많이 심었던 골짜기이므로 피밭골이라 한다.
이 사이에 원들이 있으며, 산에는 왜정 말기 경방대 초소가 있어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하게 되면 알려 주기도 하였다.
**절터
피밭골 너머 여초와 화전 사이의 산등성이에 있는 절이 있었다는 곳을 절터라 부른다. 지금 이곳에 우후(虞侯) 벼슬을 산 동래 정씨 선산이 있다.
**분두골
남통의 남쪽 골짜기로 장마면 초곡리 구역에 있는 골짜기이며 마을이다.
**된곰 만댕이
꽃바정 동쪽에서 여통 사이의 산으로 여통 마을 뒤의 구석진 산마루이므로 ‘뒷굼’이 된곰으로 변하면서 된곰만댕이로 불린다.
**원들
초막골에서 서편 화전으로 내려가며 있는 들을 원들이라 한다. 중부고속도로 서편인데 최근에 경지정리가 되었다.
이 들 가운데 방문원(防文院)이 있었던 곳이므로 원들이라 불린 것이다. 『창녕현읍지』에 “防文院 在縣南十三里今無 라 기록되어 있다. 이 원은 창녕의 남쪽으로 영산과 통하는 길에 있었던 것인데 출장 관원들의 숙소였다.
*** 이 지명유래는 1992년 11월에 발간된 <창녕지명사>를 수록한 것으로 현재 상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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