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탐하리와 신촌리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12. 탐하리(呑下里)
본래 창락면 지역인 탐하리(呑下里)는 창녕읍의 남쪽으로 중부고속도로의 남쪽 마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지역은 북으로 읍내까지 미쳐 왕산병원까지 탐하리 구역이다.
빗물이 마을 앞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므로 동명을 탐하라 하였다고 한다. 「呑」은 그 훈(訓)이 ‘삼킬 탄’이니 「呑下」의 뜻과는 비슷하나 「呑下」를 마을 이름으로 부를 때 ‘탐하’라 하거나 ‘탐마’라 하는 것으로 보아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었다는 말은 뜻이 좋은 글자에 부회(附會)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呑」자를 이곳 지방에서는 속음으로 「탐」으로 발음하고 있다.
「탐」은 마을보다 작은 몇 집이 모여 사는 곳인 뜸으로 이곳 지방에서는 「담, 땀」이라 하는데 곧 탐하는 뜸 아랫마을, 담 아래란 뜻을 지녔다. 부르기에도 상담, 중담, 하담으로 쓰니 담 「呑」은 「담, 땀, 뜸」의 음차라 할 것이다.
본래 상담이라 불릴 마을은 중부고속도로 동북쪽 말흘리 낙영동 서쪽 아래 계곡에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 터가 상탐지(上呑池)가 되었다. 이때 이 마을을 바래미라 불렀는데 바래미는 반월산(半月山)의 뜻이니 이 지대가 반달처럼 생겼다 한데서 불리어졌다.
이 반달이 남쪽 퇴천의 토끼를 놀리는 형국이라 그 토끼가 달의 반쪽을 삼키었다고 구전되어 오기도 한다. 토끼에게 달의 반쪽을 먹은 형상으로 이쪽은 반쪽만 남아 반달뫼 -- 바래미이었다. 『호구총수』에는 탄원촌(呑垣村)이라 기록되어 있다.
행정리로는 탐하 단일 리이다.
◎ 12-1 탐하(呑下)
행정리 지명으로 중부고속도로 아래 남쪽의 마을들인데 상탐, 중탐, 하탐, 옥정골 등 자연 마을들을 관할하는 이장이 있다. 탐마라고도 불리는데 전체호수는 72호로 과거에는 102호였다.
◎ 돈데미
탐하리 마을을 돈데미라 불렀는데 이 돈데미를 『호구총수』에는 탄원촌(呑垣村)이라 기사(記寫)한 것으로 보인다. 돈데미의 「돈」은 언덕을 지칭하는 「둔」으로 이것이 담, 땀으로 발음되어 「呑」으로 기사된 것으로 보인다. 「데미」는 더미 • 덤의 변화이다.
한편, 「呑垣村」 이전엔 둔덤-둔더미(언덕마을)-돈데미로 변화 와전되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 바래미(上呑)
바래미는 탐하리의 제일 동쪽 윗마을로 상탐이라고도 한다. 바래미는 반월산이란 뜻으로 반달뫼가 바래미로 변하였다. 26호가 사는데 진양 하씨, 경주 최씨들이 많이 산다.
◎ 정자나무 걸(亭子木洞 : 中呑)
탐하리 마을 중에 가운데 있는 마을로 둘레 한 아름쯤 되는 정자나무가 있어 정자나무걸, 정자목동이라 불리며 중간 마을이므로 중담, 중탐이라 한다. 가구수는 8호이며, 정씨(鄭氏)들이 산다.
◎ 옥정골(玉井谷)
탐하리 중탐의 뜸 마을로 좋은 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옥정골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옥정정(玉井亭 : 동래부사 정영조 축)이란 동래 정씨의 재실이 있었는데 1970년대에 없어졌다.
12호가 살고 있다.
◎ 양지마(陽呑 : 下呑)
탐하리 서쪽편 마을로 정자나무걸을 지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양땀이라 한 것이 양탐, 양촌, 양지마, 하담 등으로 불린다.
26호가 살고 있는데 전에는 37호였다. 양씨(楊氏)들의 마을이기도 하다. 돈담재(敦湛齋: 淸州楊氏 奉先所)가 있다.
◆ 들마
서쪽 들판 기운데 있는 뜸으로 옛날에는 절강 편씨가 10여 호 살았으나 그 후손들은 계성면으로 이사를 나갔으며 최근까지 3,4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인가가 없다.
** 상탐못(上呑池)
말흘리 낙영동 남서쪽 아래 탐하리로 오는 길에 있는 못으로 이곳에 예전에 탐하리의 본 마을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하곤양(하재구)의 선산 관리인의 집만 있어 사람이 살았으나 중부고속도로 개통 시에 철거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지금은 인가가 하나도 없다.
** 앞산
탐하리의 남쪽에 있는 산인데 바래미와 옥정골의 앞산이다. 높이는 133m이다.
** 당산(堂山)
앞산 줄기로 동신제를 지내는 당집이 이 산 등성이에 있으므로 이 일대를 당산이라 부른다.
동신제를 상탐에서는 정월 13~14일에, 중탐에서는 14~15일에 지낸다고 한다.
** 서재골고개
중탐 옥정골에서 북쪽으로 남산을 넘어 서재골로 가는 고개이므로 서재골고개라 부른다.
** 조산고개
중탐 옥정골에서 북쪽으로 조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것을 횡단하여야 한다.
** 물당못(勿堂池)
교하리 봉천에서 옥정골로 오는 산길 중도에 있는 못으로 이 북쪽의 고개를 물당고개라 하였다. 아마 물을 저장한 곳이라 하여 물당이라 하였을 것이나 이 고개에 물당이라 불리는 당집이 있었다고도 한다.
** 상보(上洑)
양지마 마을 동쪽에 있는 보로 양지마 근처 들에 물을 댄 보이다.
13. 신촌리(新村里)
신촌리(新村里)는 새말이라 불리운 마을로 본래 창락면 지역이었다.
새말이라 함은 새로 된 마을이란 뜻이니 1914년 고리실(環谷), 지픈골, 회산 등을 포함하여 신촌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회산과 고리실로 나누어져 있다가 합하여져 새로운 마을이 되니 신촌리라 한 것이다.
『호구총수』에는 회산촌(回山村)과 고리곡촌(古里谷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산이나 환곡은 모두 골짜기나 산의 생김이 둥글어 원처럼 생긴대서 붙여진 지명이다.
신촌리는 탐하리의 서남쪽에 있는데 서편은 유어면 용소리로 창녕읍의 서부 지역에 해당된다.
행정리는 2개로 회산과 환곡이 있다.
◎ 회산(回山)
신촌리의 북부 쪽을 행정리 명칭으로 회산리라 한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지명이니 오래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회산동의 앞산이 왕산봉(旺山峰)인데 그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 화왕산과 연락하는 작은 봉화대였을 것인데 이와 연관 지어 마을을 환산(環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모양이 우리나라 모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전에는 60호였던 것이 지금은 48호인데, 300여년 전에 김녕 김씨가 마을 앞산 아래에 자리를 옮겼다 한다. 지금도 김녕 김씨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산재 (麻山齋 : 金寧金聲鳳 講學所)가 있다.
◎ 삼정자(三亭子)
회산 마을 서쪽 세 그루의 정자나무가 있는 곳인데 이 일대를 지칭할 때 삼정자라 한다.
◎ 환곡(環谷)
신촌리의 님부지역으로 용석리의 북쪽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다. 63호가 산다.
환곡재(楊秀禎 墓聞), 첨모재(鄭氏 世葬 墓閣), 응곡재(金寧金氏 奉先所), 환산재(安東金氏 奉先所), 영모재(河氏 奉先所), 환간재(昌寧成氏 奉先所), 삼우재(慶州崔氏 奉先所), 숭의재(成天禧 祭壇), 삼 각(三節閣聞 : 安東金氏 門中) 등이 있다.
◎ 고리실(環谷)
이 마을이 있는 일대가 산에 또 산이 둘러싸여 있어 고리처럼 둥글게 생겼다 하여 고리실, 고리라 불리었던 것이다. 『호구총수』는 이를 음차하여 「古里谷村」이라 하였는데 뒤에 환곡(環谷)이라 기사 되었다.
어떤 이는 소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꼬리실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62호였는데 지금은 56호가 살며, 경주 최씨, 진양 하씨 등의 세거지이다.
** 너미골
고리실 건너에 있는 뜸으로 전에는 1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7호가 살며 여양 진씨가 세거한다.
** 너메골
고리실 남쪽에 있는 마을로 들 너머 있는 뜸이었으므로 넘어골, 너머골, 너메골이라 부른다.
7호가 사는데 마을 북쪽에 둘레 서너 아름 되는 정자나무가 있다.
** 언청골
처음 환곡이 자리잡아 살았던 마을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며 웅천현감(熊川縣藍)을 지낸 성천희(成天禧)의 묘소가 있어 그 직함을 따 웅천골이라 부르던 것이 언청골로 변하였다.
** 지픈골(深谷)
환곡동에서 퇴천리 거우내와 우진기 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가 깊다하여 지픈골이라 한다. 「지픈」은 「깊은」의 이곳 지방말이다. 전에는 두어 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어졌다. 골짜기 안에 심곡지(深谷池)가 있다.
** 서잿골
고리실 동쪽의 골짜기로 지픈골 남쪽인데 전에 서재(1집)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못이 있는데 이를 서재골못이라 하고 이 일대 들도 서재골들이라 부른다.
** 달구 넙추리
진다리 동리 뒤(북) 산 언덕에 집이 한 채 있었던 곳이다. 이 집은 6 . 25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이 일대가 경지 정리된 논으로 변하였다.
** 왕산봉(旺山峰)
회산 남쪽의 산으로 산이 둥글게 생겨 환산(環山)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화왕산과 연락하는 봉화대가 있었다 한다. 「旺」도 「環」과 같은 뜻으로 상통된다 하겠다.
** 황새봉
너메꿀 서쪽에 있는 산인데 황새처럼 산이 삐죽하게 생겼다 하여 황새봉이라 부른다.
** 똑매(獨山)
회산 마을의 뒤(북)에 따로 떨어져 있는 동산 독뫼로 똥매, 똑매 등으로 불린다. 김녕 김씨의 선산이 있는 곳이다.
** 항갈
회산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골짜기란 뜻의 한(大) 골(谷)이 항갈로 변한 것인데 골짜기가 두 곳으로 큰항갈과 작은 항갈인 잔항갈이 있다.
** 나발등
잔항갈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나발처럼 생긴 등성이로 나팔처럼 생긴 등성이이므로 나발등이라 한다.
이곳에 비가 하나 있으니 이 일대를 진찰방유적비(陳察房遺蹟碑 :驪陽陳氏)라 불리운다.
** 방하등
서잿골에서 북쪽으로 탐하리 정자나무걸로 가는 고개인데 산 능선이 마치 디딜방아처럼 생겼으므로 방아등이라 한 것이 방하등으로 변하였다.
** 지픈골 고개
지픈골에 있는 고개로 환곡에서 퇴천 거우내(鏡川)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동쪽편 비들재(비슬산)가 직선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예전에 창녕읍내에서 줄땡기기가 있으면 옥천 서낭이 비들재를 넘어오는데 고리실 서낭과 농악대도 이 고개 만댕이에서 기다렸다가 옥천 서낭이 비들재 고개를 넘어오면 나가서 마중하여 같이 읍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이 고개에서 농악을 치며 놀았다고 한다.
창녕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 들과 보(洑)
* 간난이들 - 회산동 서쪽에 있는 들로 해마다 가물거나 물이 들어서 어렵게 간신히 수확을 보는 들이라 하여 간난이들이라 한다.
* 찬채미보 - 간난이들에 물을 대는 보를 찬채미보라 부른다. 이 보는 간난이들 남쪽에 있었다.
** 강태정(一井)
삼정자 옆에 있는 우물로 한겨울에도 따뜻하여 얼지 않는 우물이었다. 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질병 치료에 쓰였다. 회산 마을이 배설이라 하여 이 우물 외에는 다른 우물을 팔 수 없다 하여 이 우물을 귀하게 여겼다 한다.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 이 지명유래는 1992년 11월에 발간된 <창녕지명사>를 수록한 것으로 현재 상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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