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외부리

by 남전 南田 2022. 6. 12.

<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외부리의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15. 외부리(外釜里)

 

 

 

가매실이라 불리었던 외부리는 본래 어촌면(漁村面)의 지역이었다. 어촌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유장면과 합하여져 유어면이 되었는데 이때 이곳은 유어면에 편입되지 않고 창락면의 소속으로 되었다. 예전에 어촌면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유장가매실" "어울가매실" 이라 부르니,

유장면 쪽에서도 가매실이 있어 지금의 유어면 부곡리(釜谷里)이며, 어울가매실은 바로 이곳을 지칭하고 있다.

어울은 어촌면을 말하니 어촌면에는 내부곡촌(內釜谷村)이 있다고 호구총수에 기록되어있다.

가매실이라 지명이 불리기는 대체로 산이 주위를 빙 둘러싸서 분지형을 이룬 지역으로 가마솥과 같이 생긴 지형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가매실도 서편은 성지산 남동은 등산등의 산줄기가 사방을 둘러싸고있어 마치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매실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가매가마이니 신()의 고어(古語) ᄀᆞᆷ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ᄀᆞᆷ은 , , , , 가마, 가미, 거미, 거무, 등등으로도 변하여 인명 지명에 널리 사용되어져 온 말로 구지(龜旨), 구미(九尾), 구시(), 구무(), 등도 모두 ᄀᆞᆷ계 지명인 것이다.

1914년 어촌면이 창락면에 합하여질때 내부곡촌과 외부곡촌도 합하여졌는데 이때 동명을 내부곡으로 할지 외부곡으로 할지 주민들 사이에 말이 있었으나 외부리로 결정 하였다 한다.

창락면으로 존속되어오다 1955년에 창녕면과 창락면이 합하여 졌으므로 지금은 창녕읍의 구역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신문부곡의 땅으로 오래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온 곳으로 말무덤이라 전해져오는 고분과 이곳에서 도자기를 생산한 가마터와 불을 지펴 도자기를 만들었다 하여 분터라는 지명도 있음을 보아 신문부곡일 당시 일부 주민이 농사를 지으며 도자기를 생산하였던 부곡으로 추정된다

행정리는 외부 1개리이다. 전에는 131호였으나 지금은 95호이다.

 

(1) 외부(外釜)

 

외부리 일대의 행정리 명칭으로 통칭하여 가매실이라 부르거나 4개 자연마을이 있으니 그중 큰 마을이 바깥가매실인 외부곡으로 법정리 명을 외부리로 하였다.

 

가매실(釜谷)

바깥가매실 안가매실 등을 총칭하여 부를 때 가매실이라 부른다. 지형이 가마처럼 생겨서 가매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남쪽 1km쯤 떨어진 토오골 산등성이에 말무덤으로 알려진 고분이 있는데 이것은 가매실에 오래전에 살았다 하는 백씨(白氏)와 관련이 있다. 창녕의 구성(舊姓)을 흔히 조() () () () 이라 하는데 그때 이곳은 백씨촌이었다 한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아기와 백마가 죽자 그 집안도 망하여 이사를 가니 지금은 성씨(成氏)촌이 되었으니 창녕의 신성(新姓)은 성(), (), (), 라고 한다.

 

안가매실(부곡(釜谷))

가매실 마을 중에서 동편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안가매실 이라 부른다. 37호였던 것이 지금은 26호이며 창녕성씨와 벽진이씨가 세거한다.

희로재(창녕성씨 봉선소), 용양재(벽진이씨 봉선소) 등이 있다.

 

골담

안가매실 뜸으로 가매실 마을 중 가장 끝에 있는 뜸이라 하여 골담이라 불린다. 12호가 살고 있는데 벽진이씨가 대부분이다.

 

바깥담

안가매실의 뜸으로 안가매실의 바깥쪽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바깥담이라 한다. 성씨들이 사는데 14호가 된다.

 

바깥가매실(外釜谷)

가매실 마을중에 서쪽 바깥에 해당하는 마을 이므로 바깥 가매실이라 한다. 33호가 살며 전에는 43호였고, 창녕성씨 세거지이다.

원모재(성유례 묘각) 삼치재(성안경 묘각) 등이 있으며 선덕비(참봉 성경무 시혜불망비)가 마을회관 북쪽 산 밑에 있다.

 

평지마(平洞)

평지마을이라 평지말, 평지마 라고 부른다. 가매실 가운데 평평한 들에 있는 마을인데 바깥가매실의 서편에 있다. 성씨가 15여호 산다.

 

너머땀

가매실의 뜸으로 이곳에 팽나무 거목이 있으며 성씨가 15여 호 산다.

 

분터(桂西)

가매실 마을 입구 삼거리로 바깥가매실 북쪽에 있는 뜸으로 17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가매실 북쪽 더 오목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네 마을 중에 가장 나중에 생겼다고 한다.

분터의 뜻은 불을 지른 곳 화장한 곳 이란 뜻이 있는데 이곳은 도자기를 만든 지대이니 가마터를 지칭한다고 본다. 창녕성씨가 10, 단양우씨가 6호정도 살고 있다. 상선정(창녕성씨 봉선소)가 있다.

 

웃담

유어면 풍조리 풍조마을 옆 동쪽에 창녕읍 구역이 있으니 도랑을 경계로 하여 2호가 있다. 속칭 풍조 웃담이라고 한다. 전에는 5호가 살았는데 성씨 문중의 정렬각이 있다. 이 비각은 벼슬길에 나간 남편이 객사하자 그 시신을 옮겨놓고 부인이 숨지자 나라에서 비를 세웠다 한다.

 

돌고개(石峴)

창락에서 장마로 가는 도로에 있는 고개로 예전에는 행인을 위한 주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인가가 많이 들어섰다. 이 고개는 청석 석돌 등으로 이루어진 돌이 많은 고개여서 돌고개라 부른다 이 고개로 난 도로는 마구선이 생기기 전에는 마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 한길로 인마의 내왕이 많았다고 한다.

전에는 15호였는데 지금은 11호가 살고 있는데 성씨와 서씨가 살고 있다.

 

팽실(桂洞)

돌고개 동쪽 마을로 노인봉의 아랫니다. 팬실이라 하기도 하는데 새마 옆 남쪽의 뜸이다.

은 땅이 푹 파이다, 패이다 의 뜻으로 패인 실(마을 골)’이 팬실로 변한 것이다. 6호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성씨다.

 

 

**성지산

가매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유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높이는 202m이다.

조선시대 풍수지리가로 알려진 성지도사가 이 일대를 두루 답사하였다 하여 성지산이라 부른다. 이곳 말무덤과 관련하여 성지산 장군바우에서 장군이 날것을 왜군대장이 바위를 끊어버려 장군이 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한다. 유어면 쪽에 장군등이 있다.

 

**큰 개골산

평동 뒷산인데 큰 개모양으로 생긴 골이라 하여 큰개골, 시잉골 이라 하며 산정상에 측량기점 표시가 있다.

 

**토오골(土谷)

어울고개 아래 평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말무덤이라 구전되는 고분이 있다. 토골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토옥곡(土玉谷) 이라 하기도 한다.

 

**말무덤

옛날에 이곳 가매실에 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500여년 전 평동 어느 백씨 집에 아들을 낳았는데 난지 이레되는 날 아기가 천장에 붙거나 걸어 다니고 또 괴력을 쓰는 등 이상한 일이 생겼다. 또 손바닥을 펼쳐보니 임금 왕()자가 점박혀 있는지라 나라에서 알면 가문에 큰 화를 입을 것이라 걱정을 하게 된 부모는 다듬이 돌로 눌러 아기를 죽여버렸다. 사흘뒤 성지산 장군등에서 용마가 날아 나와 마을을 돌며 큰 소리로 울더니 죽고 말았다.

아기가 장성하여 장군이 되면 탈 말이었으나 주인이 죽었음을 슬퍼하다가 자진한 것이었다. 백마는 결국 토오골에 떨어져 죽고 마니 백마가 큰 덩치였으므로 시체를 묻은 묘가 논두렁 9필지를 차지할 만큼 되었는데 그 무덤이 전해 온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백씨 집안은 몰락하여 떠나갔다고 한다. 성지산의 장군바우가 왜군에 의해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었다. 장군바우가 끊어 졌을때 석 달여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울고개

평동에서 서남쪽으로 유어면 광산리 어울 쪽으로 가는 고개이므로 어울고개라고 한다. 어울은 예전 어촌면의 면소재지였으며 가매실은 어촌면의 구역이었다.

 

**등산(燈山)

외부리 남쪽에 있는 산으로 장마면 신구리와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146.5m이다. 이 산에 옛날 절이 있어서 등불을 달았다 하여 등잔 을 써 등산(燈山)이라고 한다.

 

**등산고개

등산에 나 있는 고개로 안가매실에서 남쪽으로 장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예전에 이곳에는 집이 몇 채 있었다. 도둑이 들끓어 625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부엉덤

가매실 남쪽 등산의 산등성이로 부엉이가 많이 사는 산등성이므로 부엉덤, 봉덤 이라 한다.

 

**도둑골

부엉덤 너머 길기가 300m 쯤 되는 골짜기로 산이 양쪽에 둘러있어 도둑들이 은거하기에 좋았던 곳이라 도둑골로 불리었다.

 

**씨릉골

등산이고개의 아래 골짜기를 씨릉골이라 한다.

 

**굼벙이덤

안가매실 골담에서 남쪽 장가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굼벙이산 덤 사이로 길이 있다.

 

**골담 뒷산

부치골이 있는 산을 골안의 뜸 뒷산이라 하여 골담뒷산으로 불린다.

 

**부치골

안가매실 동쪽인데 월명고개의 남쪽 골짜기를 부치골이라 한다.

 

**월명고개

안가매실 동편으로 장마면 월명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당산배기

안가매실 뒷산을 말하며 이 산 고개에 당산나무가 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지낸다.

바깥 가매실과 분토는 따로 지낸다.

 

**진등고개

창녕 월명촌과 자느골 사이에 길게 늘어진 고개인데 서북쪽은 당산배기이고 남쪽은 영산(장마) 월명고개와 만난다.

 

**창녕 월명촌

3호가 살고 있었는데 6.25때 없어졌다. 남쪽고개를 넘으면 영산(장마) 월명촌이다.

 

**구실고개

창녕 월명촌 입구에서 창녕-장마선 도로로 가는 고개이다.

 

**똥매골

안가매실에서 뒷골을 지나 자느골을 넘으면 돌고개로 가는 도중의 골짜기이다. 똥매골 들 가운데로 쑥 내민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자라산이라 부르고 자라목으로 길이 나 있다.

 

**지랭이

제양산 아래 뒷골에서 창녕 월명으로 가는 도중 자느골 밑 북쪽인데 이곳 지형이 지렁이처럼 생겼기에 지랭이라 불리었다.

 

**제양산(帝良山)

뒷골의 입구에 있는 산으로 가매실 마을의 북쪽에 있는 낮은 야산이다. 이 산에 구한말 한학자 성대섭(成大涉)의 묘비가 있다. 상선정(尙善亭)이 있는데 성대섭의 부친이며 한학자인 성종호 의 문하생 340명이 모은 상선계가 있어 매년 음력 33일에 모이며 또 한학자 성봉상의 문하생 100여 명이 모은 양산계도 있어 매년 음력 34일에 모이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썩비랑

뒷골 입구에 있는 제양산의 뿌리로서 동편에는 한학자 성대섭의 비석이 있다. 봄이면 노인들이 삿갓을 쓰고 드나들 때 이 벼랑에 앉아 내와 선창 들을 바라보며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며 쉬어가던 길목이다.

 

**자느골

뒷골에서 석현으로 통하는 들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작은'이  늘어진 형이다.

 

**우붕골

애장골 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안가매실 넘어 뒷골 안인데 자느골 입구에 있는 골짜기다.

 

**뒷골

안가매실 동북편의 골짜기로 동리에서 뒤쪽이 되므로 뒷골이라 부른다.

 

**송정만리

안가매실 뒤에서 분터 뒤까지 가는 송정산 등성이의 길이 길다 하여 송정만리라 한다.

 

**서답바구

가매실 입구 외부교 냇가 동쪽에 있었던 10m쯤 되는 큰 바위로 이곳에서 여인들이 와서 빨래를 하였으므로 서답바우라 불리었다. 서답은 빨래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바위는 지금 부서지고 없는데 왜정 때 이 근처에서 삼솥을 걸어놓고 삼을 삶았다한다. 삼솥은 대게 그 크기가 사방 5*8자 되고 높이는 한길이 되는데 냇가이므로 물이 많아서 이곳에서 삼을 삶아서 껍질을 벗겼다고 한다.

 

**개장골

너머땀 삼치재 뒤 서편 골짜기인데 더 올라가면 큰개골산에 이른다.

 

들과 보

 

**무담이

선창들의 서편을 무담이라 부른다. 물이 자주 들고 물에 계속 잠겨있다 하여 무담이로 불리어진 곳으로 보인다. 물 담다가 무담이로 변하였다.

**선창들

외부리 북쪽에 있는 들로 용석천의 아랫 굼으로 외부천을 경계로 해 북쪽의 들이다. 이 들은 예전에 강물이 드나들어 수로가 원활하여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지금은 토사로 지대가 높아졌으며 사시불갈(四時不渴) 이어서 비옥한 논들이 많다.

**구월들

구들이라고도 하는데 선창의 남쪽으로 외부천의 남쪽에 있는 들이다. 이 들의 남쪽이 장마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물이 흔하여 농사가 잘되는 들이다.

**구월보

숲골 주막 밑에 있는 보로 항상 물이 맑게 흘렀는데 지금은 하천정리 경지정리 등으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새보

옥빼미 남쪽에 있었는데 한해가 심하면 사용하였다.

**옥빼미

새보 뒷쪽에 있던 웅덩이로 옥과 같이 물이 맑고 수량이 많았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숲골주막

돌고개에서 북쪽으로 구월들을 지나가면 용석천에 기생까지 있는 주막집이 있었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잎을 날리던 수양버들이 일품이었는데 6.25 후에 다 없어졌다.

 

**냇가주막

외부천변 정미소 북쪽 길 건너에 있었는데 6,25 이후에는 그냥 민가로 있다가 경지정리 이후에 없어졌다.

 

**외부천(外釜川)

 

용석리에서 흘러오는 내로 용석리 쪽애서는 용석천이라 하지만 외부에서는 이 내를 외부천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내가 넓고 모래가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 졌지만 이 모래사장에 음력 8월 보름 한가위가 되면 농악대를 앞세운 구창락 일대의 사람들이 다 몰려나와 낮에는 소싸움을 붙이고 밤에는 씨름을 하는 등 큰 행사가 벌어지곤 하였다.

이때 편을 가르기는 외부천을 경계로 하여 남북을 나누는데 남쪽은 외부리 북쪽은 풍조 학산 어도 등이었다 이곳 소싸움과 씨름에서 이기면 8월 열이렛날 계성천에서 벌어지는 대회에 출전 하였다. **

 

1992년 발간된 <창녕군지명사>를 정리한 것이므로 지금과 상이한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