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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옥천리

by 남전 南田 2022. 6. 14.

<창녕군지명사>에 실린 창녕읍 옥천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화왕산성  - 동문

17. 옥천리 [玉泉里]

 

창녕읍의 가장 넓은 법정리이면서 산이 수려하고, 가야의 고찰 관룡사가 있으며,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초조인 의상(義相)대사가  670(신라 문무왕 10)에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인 비슬산 옥천사(지금은 폐사되어 그 터만 남아있다)가 있었던 역사 깊은 곳이다.

산 계곡에 옥수가 흘러내리니 옥 같은 물이 샘솟는 옥천(玉泉)보다는 옥천(玉川)이라 할만한 곳이 바로 여기다. 신라 때부터 옥천사가 있었으니 어쩌면 이곳 땅이름도 오래되어서 그에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옥천리는 본래 창락면의 지역으로 호구총수에도 산옥천촌(山玉泉村)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된 지명이다. 흔히 이곳은 산옥정이라 하여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밖으로의 교통이 불편한 천옥(天獄) 과도 같은 뜻으로 불려진 것이 옥천으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또 창녕군 내에서는 옥천이 두 곳이 있다. 이곳은 산 가운데 있어 산옥천으로 부르고 이방면 옥천리는 들 가운데 있다 하여 평옥천이라 부른다.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이 있으니 가야의 고찰 관룡사와 신라 때의 화엄종찰인 옥천사 외에 청룡암 고불당 극락암 중생사 등……. 여러 사찰들이 지금도 있다.

관룡사는 옥천리 292번지 관룡산 아래 있는 사찰로 신라 때 건립된 고찰이며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대웅전 약사전의 건물과 2기의 석불이 보물이며 약사전 삼층석탑 사적기목판, 부도, 석장승, 석등, 석조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옥천사는 고려말 풍운아로 일세를 주름잡았던 편조(遍照)왕사 신돈(辛旽)이 어려서부터 자라서 승려 생활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옥천사 폐허가 관룡사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축대와 주춧돌만 보아도 아주 큰 규모의 절터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절 이름도 이곳 지명에서 옥천사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옥천리의 마을은 골골마다 있어 세칭 열두 땀이 있었다고 한다. 행정리는 옥천리 하나뿐이다.

 

 

(17-1) 옥천(玉泉)

 

옥천리 일대의 열두 땀의 행정리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산옥천, 산옥정 이라 속칭 된다.

창녕 현감을 지낸 한강 정구(鄭逑)가 작명을 하였다는 옥천정(안여경 강학소)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고 원통골에 옥천재란 재실이 두 곳 있으며, 그 외 옥천재(쌍매당 이윤, 동암 이준 부자 묘제각) 등이 있다.

또 창녕 현감을 지낸 고유(高裕)가 처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었다 하여 그 공적을 새긴 비가 화왕산으로 올라가는 산정골 길옆에 있는데 최근 절반으로 부러진 채로 있다.

자연마을은 담안, 새말, 고도방지, 하동, 모랭이, 앞들, 놋다이, 너븐골, 원통골, 방치목, 등인데 163호가 전에는 살았으나 지금 128호이다.

 

 

놋다이(魯洞)

노따이 놋단이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한자로는 노단(露丹) 으로도 쓰인다. 가장.깊은 골짜기 안의 마을로 토질이 붉다 하여 초목까지도 붉었다 하는데 이에 따라 붉을 단()을 써서 노단이라 하였다 한다.

, 의 음차이다. 이곳은 높은 곳의 마을이고 골짜기이니 높은 땀, , , 높다랗다 등의 말이 높다-놋단-놋따이 등으로 변하였다고 보여진다. 노고단과도 관계가 있을 듯 하나 미상이다.

전에는 15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8호가 산다

 

시미골(深明谷)

놋다이의 남쪽 편 깊은 골짜기로 옥천리 골짜기 중 가장 깊은 골짜기이므로 시미골이라 불린다. 전에는 7~8호가 살았으나 6.25 동란때 빨치산의 활동으로 아래쪽 광동으로 집단이주시켜 지금은 한 집도 없다.

옥천 입구에서 이곳까지 십리골이라 한 것이 시미골로 변하였다고 한다. 또 숨어있는 골짜기라 수미골이라 하니 시미으로 보인다. 신묵골이라 와전되어 불리기도 한다.

 

 

넓은골(廣洞)

놋다이의 남서쪽 아래 마을로 이곳에 와서 골짜기가 넓어지므로 넓은 골, 너븐 골 이라 광동이라 한다. 14호가 살고 있다.

 

외똔집()

광동 옆에 집이 한 채 외로이 있는데 이 근처를 외똔 집, 독집이라 부른다. 이 집은 하씨 재실이다. 외따로 떨어진 집 외딴 집을 이지 방에서는 외똔집이라 말한다.

 

원통골

광동 아래 내천 옆의 골짜기로 전에 인가가 있었으며 지금은 재실이 있는 골짜기다. 둥글게 원통(圓筒)처럼 생겨 원통골이라 하였을 듯 하다.

이곳에 이씨의 산소가 있는데 당초에는 노씨의 산이었으나 이씨에게 양도하고 난 다음에야 명당인줄 알고서 원통하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에는 5호였으나 지금은 두 집이 있다. 옥천재(이신지 묘각)와 이름이 같은 옥천재(장연노씨 분암)등이 있다.

 

방치목(內川)

관룡사 올라가는 길과 넓은골과의 삼거리 길에 있는 마을로 개울 옆의 마을이어서 냇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축을 쌓은 곳이므로 방축이 있는 목이란 뜻의 방축목이라 불리어진 것이 방치목으로 변하였다. 이곳이 내의 안쪽이 되는 마을이므로 최근에는 내천이라고 한다. 12집이 살고 있다.

 

관광농원

최근 관룡사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관룡사 입구에 주차장 시설과 휴게 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이 일대를 관광농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가와 3호가 산다.

 

새말(新村)

방치목 남쪽 냇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 신촌이라 한다. 21호가 살고 있으며 진양하씨의 세거지이다.

 

담안(원촌, 垣村)

옥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초등학교인 옥천분교가 있는 곳이다. ()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이라 하는데, 한자로는 담 원() 자를 써서 원촌이라 한다.

41호가 사는데 전에는 45호였으며 1,500년대부터 김녕김씨가 많이 산다. 산천재(김녕김씨 봉선소)가 있다.

 

고도방지(古道坊)

 

담안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옥천 저수지 위에 있다. 옛길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고도방으로 쓴다.

11호가 살고 있으며 달성서씨 세거지 이다.

 

하동(下洞)

고도방지 아래 뜸 이므로 하동이라 부른다. 4호가 산다.

 

모랭이

하동 남쪽 옥천 저수지 옆의 뜸으로 저수지를 돌아가는 모랑이의 뜸이라서 모랭이라 부른다. 5호가 살고 있다.

 

앞들(전평:前坪)

계성면 사리 전평과 도랑을 사이에 둔 한마을인데 옥천리의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 앞들, 전평이라고 한다. 옥천 저수지가 바로 북쪽에 있으며 모랭이의 서편 아랫니다.

2호가 사는데 밀양 박씨가 오랫동안 살아왔다. 영사재(박여종 종실)가 있다.

 

**화왕산(火旺山)

옥천리의 서북 쪽에 있는 창녕의 주산으로 말흘리와 경계로 화왕산성의 동문은 옥천리 지역이다. 정상의 동편에 해발 700m의 화왕산 평원은 10리 길의 갈대밭으로 등산객의 사랑을 받는다.

삼천구지(三泉九池)가 있다는 화왕산성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싸워 왜군을 패퇴시켰다.

 

** 비슬산(琵瑟山)

화왕산 남쪽에 있는 산으로 닭볏(鷄冠)처럼 쭈빗쭈빗하게 산 봉우리가 생겨 벼슬, 비슬로 음차되어 비슬산이라 하였다. 남쪽 아래에 창락에서 옥천으로 넘나드는 고개를 비들재(鳩峴山)라 불리는데 역시 비슬산의 변화이다.

비슬산 동쪽 옥천리쪽에 신라 때 세워진 화엄십찰인 옥천사가 담안 쪽에 있었는데 훼철되었다. 지금도 그 폐사 흔적이 남아 있다.

관룡사

**관룡산(觀龍山)

관룡사를 지을 때 용이 등천 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관룡산으로 불렀다 한다. 높이는 739.2m로 고암면 감리와 경계를 이룬다. 이 정상 남쪽 편은 병풍을 둘러치듯 절벽을 이루고 있어 이곳을 구룡산(九龍山)이라 하기도 한다.

빛벌문화에 이곳 경치를 노래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적적송림 찾아들어 청계에 목욕하고

장송을 차일 삼아 석경(石逕)에 앉았으니

관룡의 종성은 구름밖에 들려오고

고산 구룡에는 운금(雲錦)이 자욱하다.

 

인왕대문 들어서니 천년 고찰 옥천폐사

풍경소리 가냘프고 목탁 소리 처량하다

웅장한 대웅전은 옛것이 분명하고

약사전 지붕에는 신라기와 얹혀있다.

 

척촉(躑躅)을 짓밟으며 송간세로 올라가니

낙락절벽 연대 위에 천 년 전 고석불이

태연히 앉아서 이 세상을 웃는 고야

구백홍진 어디 가고 잠간 우화(羽化)하는 도다.

 

 

**굴덤

관룡산의 서북쪽 봉우리로 큰 바위가 있어 굴덤이라 한다. 높이는 740m이다.

 

 

시미골 안의 골짜기들

 

옥천리의 일대는 크고 작은 산과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어 골짜기의 이름만을 조사하기에도 어렵다. 십여 년 전에만 해도 사람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으나 지금은 연료를 연탄이나 석유를 사용하게 되니 나무하러 산에 갈 일이 사라졌다. 따라서 산골 골골마다 붙여진 땅이름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예전 나무꾼들이 골골마다 다니던 시절의 지명들이 후손에게 남겨져야 하지 않나 하여 조사하였다.

 

잔나무 밭골 - 시미골 동편 안쪽 골짜기로 극락암 뒤쪽으로 이 고개를 넘으면 밀양 무안면 서가정과 통한다. 작은 나무들이나 잣나무가 있는 골짜기로 추정된다.

뭉텅골 - 잔나무 밭골 골짜기의 북쪽이다.

고재골 - 뭉텅골의 북쪽으로 산이 평평하고 넓다 고() ()로 보인다. 이때 는 고개, 산을 말한다.

시미골 고개 - 시미골에서 동편으로 밀양 무안면 삼태 서당골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고개 마루는 네 갈래 길로 북쪽으로 가면 밀양 조천 무시덤에 닿고, 동으로는 삼태 서당골, 남으로는 화봉리 마곡에 닿는다. 이 고개 북쪽 산의 높이는 541m이고 남쪽 봉우리는 조금 낮다.

팥밭골 - 고재골 옆으로 외팥이나 심어 먹던 밭이 있었다 한다. 화전민이 불을질러 파서 일구어 먹든 밭을 이곳에서는 팥밭이라 한다.

노송등이 - 팥밭골 근처로 노송이 있는 산등성이이다.

 

**놋다이 안의 골짜기들

 

새미골 - 놋다이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샘이 있는 골짜기이다. 산을 넘는 고갯길이 있는데 밀양 무안면 조천리로 간다. 이 고개의 북쪽 봉우리는 582m이며, 남쪽 산의 높이는 640m이다.

칠밍이재(七明峴) - 놋다이의 북쪽 가장 안쪽의 산인데 고암면 감리 청간마을로 가는 고개가 있다. 칠밍이는 칠목의 와전으로 이곳에 일곱 군데의 높고 낮은 목이 있다하여 칠목재라 한 것이 칠미, 칠명 등으로 변하였다. 명의 발음을 이곳에서는 미, 밍이, 등으로 한다.

칠명재의 서편 봉우리는 502m이고 재의 높이는 500m이며 동편에도 660m 봉우리가 있는데 밀양 청도면과의 경계라 청도면, 고암면, 창녕읍 등 3개 면의 경계가 된다.

황태골(黃土谷) - 칠밍이재 바로 아래 골짜기로 황토가 많은 곳이라 황토골이라 한 것이 황태골로 변하였다.

동재넘골 - 황태골 아래로 관룡사 동쪽의 고개 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곧 동재 넘어골인데 너른골의 북쪽 뒤에 있다.

범두골(虎頭谷) - 동재넘골 안인데 시미골로 가는 길 밑에서 산꼭대기까지 산의 골짜기이다. 이 산 정상이 범의 머리형상이라 하며 산 아래는 평평하다.

기비골 - 범두골 아래 맞은편(동쪽) 골짜기이다.

참샘골 - 기비골 옆의 골짜기로 이곳저곳에서 아주 차가운 물이 나는 샘이 있다.

독짐이골 독집(외딴)이 있는 골짜기로 너른골에서 놋다이 사이인데 하씨의 갓()이 있다. 독집이 독짐이 독점이 등으로 변하였다.

 

**옥천 남쪽의 산과 골짜기들

 

옥천리의 남동부 일대의 골짜기 중 가장 큰 곳은 극락암이 있는 극락골과 더 남쪽에 있는 쇄기골 등 두 곳이다.

이 일대에 걸쳐 있는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고나리(가례)- 지도상에 영취산(靈鷲山)이라 표기되어 있는 산으로 높이는 732.2m로 옥천 남동쪽 높이 솟은 산이다. 영축산은 영산면에 있는 산으로 이 산의 훨씬 남쪽에 있다. 화왕산 그 줄기가 동쪽으로 관룡산을 이루고 남으로 뻗어 이 고나리재를 솟게한 후 더 뻗어 영축산으로 이어졌다. 산 정상 옆으로 밀양 서가정으로 가는 고갯길이 있다.

상강댕 - 고나리재 북쪽의 산으로 높이는 655미터이다. 이 산 아래 극락암이 있다. 아마 극락암의 축약으로 상강댕이 된듯하다.

극락골 고개 - 극락암을 지나 상강댕 남쪽 편으로 고갯길이 있는데 동편으로 시미골과 통한다. 남쪽 길로 가면 고나리재에 이른다.

무시밭골 - 산이 무 모양의 길쭉하고 미끔하게 생겼다 하여 무시밭골이라 한다. 무시는 무의 이곳 토박이말이다. 그러나 도둑 떼가 출몰해 무시무시한 바깥 골짜기라 하여 무시밭골이라 불린 것으로 추측된다.

소싸움 밭골 - 양쪽의 산이 마주 바라보는데 그 형상이 마치 소가 싸움을 하는듯하므로 소싸움밭골이라 한다. 소싸움밭골의 은 바깥의 뜻이다.

배나무골 - 배나무가 있었던 골짜기였다.

감시골 - 새말 동리 앞의 골짜기로 마치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산이 두루벙벙 하게 생겨 감시골로 불린다. 맞은 편 서편에 상대가 되는 불당골이 있다. 여근곡(女根谷)은 대체로 옥문골(玉門谷)이라 하여 아화(雅化)되기도 하였으니 옥천의 연원일 가능성도 있다.

가매실골 - 감시골 일대를 점잖게 일러 가마처럼 생겼다 하여 가매실골이라 한다.

서재골 - 새작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새마 마을 앞 골짜기로 박씨가 살았는데 서재가 있었다 하여 서재골로 불린다.

집은골 지픈골, 깊은골 이라 하는데 골짜기가 깊어 집은골, 지픈골이라 한다.

극락골(極樂谷) - 새마의 남쪽 담안의 동편 골짜기로 이 안에 극락암이 있으므로 극락골이라 한다. 옥천 남쪽 편의 깊은 골짜기이다.

송악산 - 모랭이의 동남쪽 쇄기골의 끝 산으로 송학산이라 하기도 한다. 높이는 660m이다.

새골 세에골, 쌔골 등으로 불리는데 송악산의 아래 골짜기 모랭이까지 길게 이어지는데 골짜기 사이라는 뜻이다.

전평골 전평 마을의 동남쪽 골짜기로 계성면 사리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이다. 정상은 620m이다. 영산면 구계리의 꼬깔봉과 이어진다.

양산골 - 꼬깔봉 뒤쪽의 산과 골짜기이다.

뒷골 - 양산골 옆 골짜기를 뒷골이라 한다.

 

**관룡산 일대의 골짜기들

 

관룡사가 있는 골짜기에도 많은 유적과 골짜기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관룡사 산 - 관룡사가 있는 일대의 산을 속칭한다.

물안이 관룡사 동편의 골짜기로 스님들의 다비장(茶毗場)이 있었던 곳이다. 이 위에 약수터가 있었는데 인적이 끊겨 가시덤불만 엉겨있다. 물안이의 남쪽 골짜기로 원통처럼 둥글게 생긴 골짜기를 원통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밭골 - 관광농원의 북쪽으로 원통골의 서편 골짜기로 전에 대밭이 있었다 하여 대밭골이라 한다.

느리쇠 대밭골 옆의 골짜기이다. 산이 늘어진 지형이므로 느리쇠라 부른다.

서낭당 - 옥청서낭을 모시고 있는 당집이 있는 곳을 말한다. 옥천사 터의 동편이다. 성산의 연화각시에 대응되는 남자 서낭이다.

용선대(龍船臺) - 관룡사의 서편 산등 위에 큰 덤바위가 있는데 배처럼 생겨 용선대라 부른다. 이곳에 석불이 있는데 보물 519호로 지정되었다. 또 큰바위에 붉은 색깔이 있어 팥죽바우라 불리기도 하며 석불도 팥죽부치라고 하며 팥죽을 얻으러 간 또 다른 부처가 있다고 전해온다.

 

**옥천사(玉泉寺)

관룡사 들어가는 입구 옥천리 산 293번지에 있는 터로 약 800평이 되는데 신라 때 창건된 비슬산 옥천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석축과 주춧돌 연화대석 석탑재 석등의 하대 옥개석 등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축석의 크기를 보면 사찰의 규모 또한 컸으리라 짐작된다 이 절에서 고려말 신돈이 태어나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고려왕조의 중흥을 꾀하다 죽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玉泉寺 在火旺山南高麗辛旽母乃此寺婢也 旽誅寺廢 後改創未旣 以旽之故復有論列者撤去

 

위의 기록을 보아 옥천사가 없어지게 된 것은 신돈의 일로 인한 것인데 그 후 절을 다시 지으려 하다가 역시 신돈의 일 때문에 재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임진란 때에 불이나 폐허화되었다고도 한다.

 

**화왕산성 일대의 골짜기

 

산성골 - 화왕산성이 있는 남쪽 골짜기를 산성골이라 부른다. 옥천리의 북부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려온 계곡의 서편은 창녕읍 구역이고 동편 산등은 옥천리이지만 좌우의 지명을 구분 없이 조사하여 싣는다.

 

모래작골 - 산성골의 제일위의 골짜기를 모래작골이라 한다 .

석간지골 - 모래작골 옆의 골짜기로 돌 틈에서 물이 나는 곳이 있어 석간지골이라 부른다.

우능바우 - 산성골 물이 흐르는 계곡에 있는 바위로 바위 아래에 물이 흘러 사람이 우는듯한 소리가 나므로 우는 바위라 불린 것이 우능바우로 변했다.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 수축공사가 벌어졌을 때 창녕현의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어 일하였는데 이때 힘이 센 마구 할미도 축성을 도우려 집채만 한 바위를 치마폭에 싸서 화왕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성을 마쳤다는 소식이 들리자 바위를 산성골에 버리면서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 바우가 올라가야 성이 무너지지 않을 텐데 원통하구나!” 하면서 할미가 울었는데 그 후부터 이 바위가 계곡의 물소리 따라 울고있다고 전한다.

손골 - 석간지골 아래로 골짜기가 솔쪽하므로 손골이라 한다.

불당골 비슬산 동쪽 옥천리 산 332 번지 일대로 절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하나 남성의 주요 부분인 불두덩같이 생겨 불안골의 아화로 보이기도 한다. 골 건너 동남쪽에 여성을 상징하는 감시골이 있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말흘리의 자련골에 닿는다.

친목갓 - 산성골 입구에 있는 산등으로 친목게의 갓()이라 한다.

앵미골 - 산성골 입구에 있는 골짜기로 서편으로 자련곡과 통한다.

먹뱅이 - 역시 자련곡으로 통하는 골짜기인데 이곳은 먹방 캄캄한 골짜기로 먹방의 불 켜는 자리가 명당자리라 전해온다. 아래에 늘뱅이가 있다.

하늘골 - 먹뱅이와 늘뱅이의 뒤쪽 등성이로 화왕산 남쪽 줄기가 뻗어 비슬산에 이어졌다. 돌아가는 산길이 있어 이곳을 돌아진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중산골 - 먹뱅이가 있는 비슬산 골짜기를 중산골이라 한다. 옥천초등학교 뒤이다.

금정산 - 옥천리 산 337 번지 일대의 산으로 김녕김씨 종산이 있다.

구룡산 - 산등인 능선이 아홉개가 있는 산 이라하여 구룡산으로 불린다.

비공암 - 청룡암 맞은편에 있는 바위 덤으로 큰바위 3개가 있다.

 

**비슬산, 비들재 일대의 골짜기들

 

비슬산(琵瑟山) - 옥천마을 앞에서 서편으로 창락 말흘리로 넘어가는 고개 비들재가 있는 산이다. 이곳에서는 비슬산을 고개 이름 그대로 비들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비둘기보다는 닭 벼슬(, 鷄冠)처럼 산이 찌삣찌삣(쭈뼛쭈뼛의 이곳 말)하게 생겨 비슬산이라 한다. [닭 볏]을 이곳에서는 벼슬, 비슬 등으로 말한다. 이 비슬산 동쪽에 신라 때 세워진 10대 화엄종찰인 옥천사가 있었다.

옥만동 - 옥만댕이라고도 부르는데 담안 서편으로 전에 옥()을 캔 산이라 한다.

구슬목 - 담안 앞 동편 앞등으로 옥천사 터로 오르는 길의 돌아가는 모퉁이인데 구슬처럼 둥글다 하여 구슬목이라 부른다.

약새미골 - 약천(藥泉)이 있어 약새미골이라 부른다.

왱골 - 약새미골의 옆이다.

서낭골 - 서낭당이 있는 곳으로 창녕으로 통한다.

지경골 - 지정골로 와전되기도 하였는데 고도방지에서 여초리 지경골로 가는 골짜기 이다. 이곳에서 창녕읍 장마면 계성면 등 3개 면이 만나는 꼭지점이다.

굴등산 - 고도방지 뒤 서편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542.6m이다. 이 산에 굴이 있어 굴등이라 한다.

 

* 옥천 저수지(옥천못)

옥천리 남쪽에 있는 큰 저수지로 옥천의 여러 골짜기의 물을 모아 계성 장마의 들에 농사짓게 한다. 이곳 옥천못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빙어가 살아 유명해지고 있다. 옥천리와 계성면 사리와의 경계가 옥천못 뚝을 사이에 두고 창녕 앞들(전평)과 계성앞들(전평) 두 마을이 있다.

 

 

**계성천(桂城川)

시미골과 화왕산 산성골에서 시작하는 2개 냇물이 옥천못에 흘러들고 다시 아래로 흘러 큰 내를 이루는데 예전에는 수량이 많아서 송강(松江)이라 불렀다 한다. 계성면, 장마면을 거쳐 남지읍 본동 한계를 지나 도천면 송진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 이 자료는 1992년 발간된 <창녕군지명사>를 정리하였으므로 현재 상황과 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