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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지명사/창녕읍

창녕군지명사 / 창녕읍 교리

by 남전 南田 2012. 5. 21.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지명유래를 올립니다.

 

 비화가야의 고분으로 알려진 창녕교동고분군과 교동 마을

 

 

 

 

2. 교리(校里)

교리, 교동은 창녕항교가 있는 마을이었으므로 향교가 있는 동리라 하여 교동, 또는 교리라 불리었다.

이 일대는 가야시대 고분군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특히 금관이 발굴된 고분은 복원되어 그 웅자를 들어내고 있다. 또 교리 일대는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던 절터로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바로 군청 동편 논 가운데 있는 탑금당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牌)가 그것이며,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술정 동탑과 서탑, 직교리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도 절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탑금당 비문을 보면 많은 절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 원지사(苑池寺), 상락사(常樂寺), 대곡사(大谷寺)인양사(仁陽寺) 등은 이 일대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녕향교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낳은 관제 학교이었다. 『호구총수』에는 교동(校洞)과 사창동(司倉洞)으로 나오니 교동은 오래된 지명이다.

사창은 현면 단위에 있었던 창고로 이곳의 사창은 바로 현청 옆에 있었던 것이므로 현 직속으로 관아의 각종 양곡을 보관 하였던 곳이라 하겠다.

1910년 대에 리동을 정할 때 향교 일대와 갈전동, 개와막, 사창, 염투골, 오리정 등 여러 동리를 관할하는 동으로 교동을 정했다 한다. 1960년 11법률 제538호에 의거 교동을 교리로 고쳤다. 행정리로는 교리갈전, 창서,3개 리이다.

창녕군청이 1984년 교상동에서 옮겨 왔으며, 현재 창녕군의회, 창녕축협, 명덕국민학교 등이 있다.

◎ 2-1 교리(校里)

교리의 동편 지역의 행정리 명칭이다. 전에는 교동이라 불리었다. 자연 부락은 생애골, 숲골(교동), 사창동, 이문재, 바깥생골 등이다. 교리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창녕군청의 동쪽으로 명덕저수지와 고분군 등이 있는 지대이다. 명덕 저수지 북쪽 산 아래에 창녕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체 가구수는 539호이다. 육일재(六逸齊 : 河氏 奉先所), 곡지재(谷池齊 : 迎日鄭氏 墓室), 화수정 (花樹亭 : 朴氏 宗親會館) 등이 있다.

◎ 교동(校洞)

향교가 있기에 교동이라 하였다. 숲골 마을일대로 과거에는 76호였으나 지금은 231호이다. 밀양 박씨와 벽진 이씨 등이 살아왔다.

창녕향교(昌寧鄕校)

명덕 저수지 북쪽에 있는데 조선 효종 때 세워졌다. 훈도(訓導)의 지도로 관내의 젊은이를 모아 글을 가르쳤던 관학(官學)이었다. 고종 31년 과거제도 폐지 후 왜정의 우여곡절 끝에 금 남아 있지만 옛 학교의 기풍보다는 지방 유학(儒學)의 본거지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 명륜당, 정문(正門 : 秋漢門) 등 여러 건물이 지방 문화재로 보되고 있다.

교동 고분군(古墳群)

왕릉이라 불리는 거대한 고분이 교리 북쪽 구릉지 일대에 널려 있는데 거대분(巨大墳) 중심으로 여러 수 십기가 왜정 때 발굴되어 그 출토품들은 일본 등 역외로 반출되었다. 왕관 등 많은 유물이 나왔으며, 도굴된 것도 많아서 대부분의 고분이 제 모습을 잃어 버렸다.

1976 고분 복원사업을 펼쳐 모습을 되찾았다.

고분은 대체적으로 가야식 장방형의 횡혈식(橫穴式) 석곽분(石廓墳)으로 밝혀졌다.

◎ 생애골(生愛谷)

향교 동편의 마을을 생애골이라 부른다. 북쪽에 교동 고분군이 있다. 예전에는 상여를 보관하여 두었는데 그 상여 집이 있는 곳이라 하여 생애골이라 불린 것이다. 상여를 이곳에서는 생이, 생애 등으로 말한다. 지금 15호가 살며, 경주 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하고 있다.

◎ 사창동(司倉洞)

조선시대 사창(社倉)이 있어 사창동이라 불리었는데 현재 원불교 교당이 있는 곳에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한때 이 거리에 술집이 많이 들어서서 사창화(私娼化) 되기도 하였다. 이때 북창천 개울 근처에는 무당, 점쟁이들이 많았다. 성황당이 있는 곳이며 전에는 63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250호로 불어났다. 전주 이씨, 밀양 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화수정(花樹亭 : 密陽朴氏 昌寧郡 화수회관)이 있다.

박씨단(朴氏壇)

명덕 저수지 서쪽에 있는 제단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예전에(최근까지도) 날이 가물어 모심기를 할 수 없거나 논바닥이 갈라져 나락이 타 들 어가면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현감이 직접 나서서 지내기 마련인데 창녕읍에서는 먼저 관주산에 보리짚을 지고 가서 불을 지르며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안 되면화왕산, 또 못물이 말라버린 명덕못 바닥에서 장을 보이거나 오리정 근처 냇가 장을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이곳 박씨단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고 한다.

단은 실묘(失墓)하여 묘사를 지낼 곳이 불명하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드는데 집은 없고 단(壇)만을 쌓는다.

◎ 이문재(以文齋)

교리의 동편 마을로 이문재라는 서재가 있는 마을이었으므로 서재 이름이 그대로 지명화되었다. 현재 군인 아파트가 있는 주변으로 이 서재는 현감 정동기(鄭東驥)가 세웠다.

구한말 이곳에 한때 국교과정, 중등학교 과정의 학교가 있기도 했다. 전에는 15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7호로 줄어들었다.

◎ 숲골

현재 명덕국민학교 서편 아래 일대로 숲이 많은 곳이라 숲골이라 불리었다. 지금은 20호선 국도 양쪽으로 비석들이 많았으며탑금당치성문기비가 있다.

창녕 탑금당(塔金堂) 치성문기비(治成文記碑) 터

숲골 서북편 논 가운데 있는 비각으로 이 안에 앞은 비문이 있고 뒤편은 불상(지장보살의 입상)이 새겨진 색다른 비석이 있다. 이 비는 이곳에 있었던 인양사(仁陽寺)의 금당을 지으면서 경비의 내용을 새긴 신라 헌덕왕(810년) 때의 오래된 비이다.

따라서 근처는 신라시대에 인양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추정된다.

서낭당(城隍堂)

교리 현 명덕노인정 오른 쪽에 있는 사당으로 음력 정월 열 나흘날 밤에 당제를 지내는 곳이다. 이 사당은 성산면 연화(蓮花)각씨의 자매 사당으로 이곳 신은 연화각씨의 동생이라하여 연화각씨 사당으로도 불린다. 사당 안에 소책자와 서첩 약 20여점이 보관된 작은 궤짝이 있는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와서 빌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 한다.

예전에 창녕읍내에서 줄을 당기면 북부 서낭은 이곳에서남부는 옥천 서낭이 나서서 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 바깥생골

생애골의 바깥 마을로 전에는 44호였으나 지금은 36호이며해주 오씨와 옥산 전씨가 많이 산다.

◎ 개와막(蓋瓦幕)

생애골 서편의 마을로 전에 기와를 굽던 마을이었으므로 기와를 개와(蓋瓦)로 씀에 따라 개와막이라 불리었다.

◎ 2-2 갈전(葛田)

교리의 북서부 마을로 오리정, 염투골, 골목안 동의 마을의 행정리 명칭이며모두 302호이다

전에 칡넝쿨이 엉킨 산등성이 밭이어서 갈전(葛田)이라 불리었다고 하며, 또 갈대밭이 무성한 곳이어서 갈밭이라 한 것을 「葛田」으로 기사(記寫)하였다고도 한다.

 

◎ 오리정(五里亭)

교리의 서편으로 관아에서 오리되는 기점이므로 오리정이라 한다. 옛날 현청 마을의 바깥에 정자를 지어 놓고 오고가는 관리의 영접이나 전송을 하였던 곳이었다.

지금은 마구선 5호 국도와 20호24호 국도의 교차지점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어 번화가가 되니 경화회관을 비롯하여 시외버스 정류장과 시내버스 정류소가 군 내외로 발차하고 있다. 85호 였던 것이 253호로 불어났으며, 김녕 김씨의 세거지이다.

 

 

◎ 염투골(念頭谷)

개와막 서북쪽 마을로 행정리로는 갈전에 속한다. 19호가 사는데 김녕 김씨가 많다.

 

 

골목새

골목안이라 하기도 하는데골목과 골목 사이를 말하는데 숲골 북편 하(대영)씨 집에서 어물리들로 나가는 길을 가리킨다. 예전에 북쪽 어물리 들에 농사를 지으려면 창녕읍내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하여 다녔는데 골목이 넓었으며 질매(길마)를 맨 소가 다녔다 한다.

30여호가 살며 밀양 박씨가 많다.

◎ 2-3 창서(昌西)

교리의 서편 일대의 행정리 명으로 최근 갈전에서 분동되었다. 1951년에 배성근목사(창녕중앙교회 시무)가 소혜원을 설립한 후 성장한 마을로 지금은 80호가 살고 있다.

창녕읍의 서쪽이라 하여 행정리 명칭으로 작명되었다.

향교너머

교동에서 하리로 넘어 가는 길로 향교의 뒤쪽이 되므로 향교너머라 한다. 대체적으로 향교너머에는 하리, 청학동을 지칭한다. 향교 너머에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재라 부른다.

생애고개

생애골에서 하리로 넘어 가는 교리 북쪽의 고개를 생애고개라 한다. 상여집이 이곳에 있다.

현재 교리 일부 주민(11 지역) 정월 보름날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이 있다.

연화봉(蓮花峰)

갈전에 있는 산인데 산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봉이라 한다. 북쪽에 연화못-여내못이 있고, 또 사당도 연화각씨 사당이 있으니 서로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백마담(白馬潭)

연화봉 맞은 편의 샘터 지역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왜군과 싸울 때 백마와 군사들이 마신 샘이라 하여 백마담이라 부른다.

◎ 원고개

오리정 북쪽5호선 국도 상에 있는 고개로 고개가 두개 있어 안 원고개, 바깥 원고개가 있다. 안 원고개는 영신버스 정류소 앞에 있는 것이고, 바깥 원고개는 창녕고등학교 입구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에 서원(西院)이란 ()집이 있었기 때문에 원고개라 불리었다.

원은 나라의 출장 중인 관원이나 찌방 관리들이 묵을 수 있게 관로 30리 마다 여관 같은 곳을 두게 하였는데, 임진란 이후 이용자가 너무나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점차 없어지거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현지 민간인에게 넘어가 주막, 여각 형태로 되어 사라졌다. 이 서원은 창녕현에 오는 하급관리들이 이용하였을 것이다.

창녕현에는 서원 외에 여초리 원들에 있었던 방문원(防文院), 성산면의 다견원(茶見院)과 적현원(赤峴院), 대지, 대합과 고암면 경계에 있었던 경산원(京山院), 유어면의 구곡원(仇谷院), 이방면의 감물창원(甘勿倉院) 등 7개 원이 있었다. 『창녕현읍지』의 기록은 「西院 在縣 西三里今無)」 이라 하였다.

마한골

교리에서 갈전으로 가는 골짜기를 마한골이라 부른다. 망한 골짜기란 뜻으로 보인다.

명덕지(明德池)

명덕국민학교 뒤에 있는 저수지로 향교 앞에 있다. 왜정 때 만든 것으로 날씨가 가물면 이곳 못물이 말라버린다. 그러면 기우(祈雨)의 뜻으로 이곳에서 장이 서곤 했다.

 

 

 

 

다음은 창녕읍 말흘리 지명의 유래를 올립니다.

(창녕군 지명사를 다시 정리한 원고이므로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