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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편소설 / 비도(非道) ㅣ 김현우

by 남전 南田 2012. 11. 28.

 

 

 

경남소설가협회 2012년 작품집 <경남소설>(제7호)에 단편소설 "비도(非道)" 를 발표하였다.

 

 

단편소설

 

비도(非道) 

김현우

 

 

서울 인근 도시에 사는 친척의 잔치에 참석했다 마산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고병달은 그녀를 처음 만났다. 요새 결혼식이란 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란 요식행위요 길게 말하자면 아들이나 딸, 자식 낳아 길러서 짝 맞춰 제 살길 마련해 주는 절차 복잡하고도 엄청 돈이 드는 소비성 행사의 일종이다. 그런데 날아오는 청첩장을 받고 무시한다는 거 한국 사람의 정서대로라면 힘들고 괴롭고 부조봉투를 들고 가자면 또한 고민이다. 몇 년 전 퇴직하고서 빈둥거리는 고병달의 생활 형편에 청첩장은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결혼식장이 제 사는 동리이면 또 좋겠는데 이번에는 꼭 참석해야만 하는 가까운 일가친척의 잔치라 몇 만 원 왕복 교통비 들여서 일요일에 다녀와야 하는 길이라 좀체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하튼 그런 부담감을 떨치고 새벽 첫차 타고 서울까지 가서 결혼식장에 들러 혼주와 손잡고 축하 인사 나누고 같은 건물 뷔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친척들과 떠들다 오후 서너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탄 것이었다. 그런데 표에 찍힌 좌석번호를 살피며 가니 그의 좌석 옆 창문 쪽에 오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옹송그리고 앉아 있는데 무슨 고민이 있는지 기분 나쁜 일을 당했던지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리며 표독스런 인상을 쓰고 있어 첫눈에 그의 기분을 팍 잡치고 피로감이 확 덮쳐오게 만들었다.

─주는 것 없이 밉상이네.

마산까지 4시간여 함께 앉아갈 동행이라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상 좋은 여자가 좋고 좀 욕심을 부리자면 젊고 예쁜 여자가 좋지 않겠나. 여자는 그가 앉으려 하자 옆 좌석에 놓아두었던 검정색 가방을 마지못해 들어 올리는데, ?왜 하필 여기 와서 앉으려 하느냐??는 거부감이 역력했다. 여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병달은 헛기침을 하면서,

"같이 가게 됐네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여자는 핼끔 곁눈질 같은 눈길 한번 주었다가 냉랭하게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쓰다 달다 대답도 없이. 고병달은 이런 여자야말로 제 푼수도 모르고 사는 인생이란 생각이 들어 외면해 버리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면서 흘낏 여자의 옷차림을 살피니 그리 궁색해 보이지 않았고 무릎에 놓은 가방도 싸구려 같지는 않았다. 자그마하면서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갸름하고 예뻤다. 설거지하고 걸레 빨고 아이 키우며 살림만 사는 여자란 느낌이 별로 없는 인상이었다.

버스가 출발해서 한참을 달렸다. 요즘은 고속도로에 차가 밀려도 버스는 전용차로로 달리니 승용차나 트럭과 달리 시원하게 제 속도를 냈다. 느지막하게 점심도 많이 먹었겠다, 거기다 술도 양껏 마셨겠다, 잠이 슬슬 왔다. 서울요금소를 지날 무렵에는 눈을 감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느 승객의 휴대폰인지 모르지만 신호가 길게 울리는 바람에 잠을 깼다. 신호는 한참이나 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바로 옆자리 여자의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잠시 끊겼다가 다시 소리가 났다. 여자는 참지 못했던지 드디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신경질적으로 단추를 눌러버리고 받지 않았다. 그러고 한참 지나니 또 소리가 났다. 여자는 이번에는 재빨리 단추를 꾹 눌러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쪽에서 끈질기게 또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그랬다. 잠을 자려다 방해를 받은 고병달은 참다 못해 짜증내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전화를 받지, 왜 그래요?"

"……."

"뭐, 급한 일인가 본데요?"

"……."

무슨 쓸데없고 주제넘은 참견이냐는 듯 여자는 독기를 내뿜으며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보았다. 여자는 아까처럼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고 있었고 얼굴은 독살스러운 고양이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이쿠!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치겠네.

여자 심리에는 통달한 박사이노라, 여자를 쉽게 제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노라, 입버릇처럼 장담하며 사는 고병달은 그만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시는 여자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을 청했다.

버스가 오산IC쯤 지냈을 무렵이었다. 옆자리의 여자가 그의 옆구리를 꾹 찔러 왔다.

─뭐야?

속으로 그러면서 여자를 돌아보니 독기가 서렸던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끙끙 앓으면서 나지막하게 겨우 한 마디 했다.

"아저씨! 내 가슴…… 좀 쓸어주세요……."

그는 그녀의 말을 얼른 못 알아들었다. 아니 뭔가 듣기는 들었지만 너무 엉뚱한 말이라 잘못 들은 듯하고 이해가 안 돼 어리둥절해 여자를 쳐다만 보았다.

"아저씨! 내 배…… 아파서 죽겠어요. 좀 손으로 쓸어 주세요."

"아, 배가 아파요? 멀미가 심하구먼."

"멀미……."

"멀미가 심하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기사에게 물어봐야겠어요. 멀미약이 있는지."

"아, 아니. 그냥 좀, 잠깐만 문질러 주세요."

정말 황당한 부탁이라 고병달은 당황해서 잠시 주저했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배를 주물러 달라니! 그것도 승객이 가득 찬 고속버스 안에서. 고병달은 미처 이런 낭패스런 상황을 정리하거나 따져볼 생각도 겨를도 없이 신음소리도 크게 못 내고 앓는 여자의 절박한 요청을 엉겁결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잠깐 망설였다. 미적거리며 여자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명치 끝…… 아, 거, 거기……."

여자가 낮게 앓으면서 너무나 다급했던지 주저하는 그의 손을 부여잡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객들은 대부분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가슴에 손바닥을 밀착시켜 슬슬 부드럽게 둥그렇게 비비며 쓸어주었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였고 비록 옷 위이지만 얇은 여름옷이라 그런지 그에게는 여인의 살결을 만지는 듯한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자는 갑자기 엄습한 복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더니 남자의 손을 맨살에 갖다 대도록 유도했다.

고병달은 '어따! 이게 무슨 횡재냐?'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여자가 하자는 대로 갈비뼈 아래 명치 근처와 그 아래 배를 점점 범위'를 넓히며 살살 문질러 주었다. 비단 손수건처럼 얇고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오니 슬그머니 자신의 몸에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한편 그의 손끝에 여자 복부의 딴딴한 뭉치가 만져지기도 했다. '소화가 안 된 거군. 뭘 잘못 먹어서 급체를 했구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조심스러워서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건성으로 문질렀다.

"아저씨, 좀 세게…… 꼭꼭 눌러서. 댁에 아이들 배 많이 문질러주었을 건데. 예, 거기, 거기! 거기가……."

"예, 여기가 많이 뭉쳤네요. 뭘 먹었길레? 이 여름에 식중독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며 완전히 그의 품에 몸을 내맡겼다. 여자가 머리를 그에게 기대자 그녀의 머릿결에서 아내에게서는 맡을 수 없는 진하고 좋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좋은 향내가 나는 여자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의 몸에서는 항상 비린내가 풍겼다.

*

고병달은 마흔 살쯤에 춤을 배웠다. 회사일 때문에 자주 드나들지는 못했지만 댄스홀을 다니면서 여자들을 만나고 여자가 허락만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여관으로 가서 재미를 보았다.

그 시절 댄스홀에 드나드는 여자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출입을 했다. 남 보기에는 상점이나 시장에 뭘 사려고 나온 듯 수수한 여자로 보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춤을 출 때 입을 옷이 들어 있었다. 일단 홀에 들어서면 허드레옷을 벗고 얇고 산뜻하고 촉감이 좋은 부드럽고 고급스런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래야 대기용 의자에 가 앉자마자 남자가 얼른 춤을 추자고 달려오기 때문이었다. 대기용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도 춤을 추자고 권해 오는 남자가 없다면 그건 치욕이요, 쓰라린 버림이기에. 기를 쓰고 예쁘게 화장하고, 진한 향수를 아낌없이 옷에 몸에 뿌려대고 암내를 풍겨야 춤을 현란하게 추면서 리드할 제비 한 마리와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댄스홀에서 만나는 여자들 열이면 아홉은 바람기가 철철 흐르는 부류라고 치부했다. 그 시절 댄스홀 출입은 화냥년이나 하는 비밀스러운 일이었고 소문이 나면 망신당하고 만인에게서 손가락질 받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더욱 은밀하게 춤을 추러 출입하며 인생을 즐겼고 댄스홀에 오는 남자들은 기꺼이 몸을 풀기에 안달이 난 상대를 황홀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남자들의 품에 안겨 음흉스런 사내의 접촉을 마다않고 즐겼다. 남자가 춤을 추면서 여자의 허벅지에 다리를 우겨 넣으며 강하게 충격을 준다든지 슬쩍 젖가슴이 뭉개지도록 꽉 끌어당긴다든지 하는 비신사적 매너나 아무런 애무도 자극도 주지 않고 젊잖게 손을 잡고 허깨비처럼 춤교본에 나오는 춤만 추다가 얌전히 물러간다면 "벼엉신!" 하고 비웃었다. 아슬아슬한 도전이 남자로부터 감행되어 왔을 때 여자는 농락당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남자의 품에 더욱 안겨들고 잡은 손을 조이며 숨을 할딱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럴 즈음 남자의 손이 비밀스런 부분으로 옮겨 다니면서 장단을 맞추면 여자의 성감대란 성감대는 일제히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인사불성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오랜 출입 끝에 그런 걸 통달해버린 고병달은 여간 고급스러운 여자가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여자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베테랑 제비라는 소문이 그 세계에서 좌악 퍼져 유명인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퇴직을 하고 나서는 갈 데라곤 춤추는 곳뿐이었다. 이제는 늙은 제비란 소리도 들었지만 왕년의 솜씨는 여전히 남아 여자 후리기에는 뒤처지는 법이 없었다. 코피가 터지든 비아그라의 힘을 빌리든 그는 댄스홀 출입을 일주일에 여덟 번을 하며 살았다. 물론 상대하는 여자들도 나이가 들었다. 나이 들고 허기진 여자들이 세상에 널려 있었다. 그녀들은 더 솔직하게 달려들고 본능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늙은 제비와 데이트를 즐기려 환장했다.

*

춤을 추며 여자들과 즐겼던 일들을 생각하던 그는 어떤 순간 어찔해지면서 손이 명치를 벗어났는데 그만 여자의 젖가슴이 만져졌다. '어! 실수!' 그는 급히 손을 빼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는 알았는지 몰랐는지 반응이 없었다. 아니 심한 복통에 그까짓 젖가슴이야 한번쯤 침범당해도 용인할 의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고통이 덜해졌는지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고병달은 그 바람에 여자의 가슴에서 손을 얼핏 거두며 자세를 바로 했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가 섰다. 기사가 한 마디 했다.

"20분간 쉽니다. 볼일 보실 분, 다녀오시고요."

여자는 기사의 말에 움찔 놀라며 흐트러진 옷섶을 추스르고 가방을 뒤져 거울과 분첩을 꺼내더니 화장을 고치는 척했다. 승객들이 우르르 화장실이나 식당을 가려는 듯 내리자 그도 따라 내리려 일어나면서,

"우리 내려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합시다."

하고 전부터 잘 아는 사람들처럼, 아니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는데 전연 어색하지 않았다. 여자도 핼끔 그런 말을 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조금도 싫은 기색이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벌써 그녀는 처음 버스 탈 때 보았던 입맛 없던 여인네가 아니라 이마의 내 천자도 사라진 발랄하고도 생기가 넘치며 남자를 유혹하려는 듯한 미소까지 머금은 표정의 매력적인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버스를 내려 우선 화장실로 갔다. 여자가 볼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커피를 파는 곳으로 갔다. 부축을 해주자 여자는 아직도 어지러운지 딴청부리지 않고 그의 팔을 꼭 잡고 걸었다. 걸어가면서 여자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50대 여인이지만 호리낭창한 예전의 몸매는 사라졌겠지만 젊었을 때의 육감적이고도 매혹적인 맵시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요즘 일주일에 여덟 번은 춤추러 댄스홀을 출입하고 있는 고병달은 여자를 척 보기만 해도 잠자리를 하면 재미가 있겠다, 없겠다 짐작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내들 축에 끼여 있었다. 사실 춤추러 다니면 만나는 상대가 여자뿐이니 재치도 있고 재미도 있는 여인, 돈만 알지 실속 없는 아주머니. 푼수끼 풀풀 내는 촌 아낙네, 할 짓 다하면서도 시침 떼는 계집, 줄듯 줄듯 하면서 애만 달구는 나쁜 년, 거기다 남자 등골 빼먹으려 사기 치는 년, 돈만 아는 꽃뱀…… 춤을 추면서 여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손을 얹어 몇 바퀴 돌면 그가 끼고 있는 상대 여자의 실체를 다 알아낸다고 자신만만한 사내이니 비록 지금 나이가 일흔을 바라보지만 여자를 회를 뜨고 요리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장담, 자부하는 고병달이었다. 그러니 고속버스 안에서 만난 여자, 그것도 벌써 가슴도 만지고 배도 만져 봤으니 2/3는 공을 들여 달아나지 못하게 휘어잡았다 낙관하면서 이제 남은 코스는 껍데기를 잘 벗겨 회를 쳐서 맛있게 걸판지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혹시 계속 속이 안 좋으면 저기 안내소에 가서 소화제를 사 올 테니 여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겠소?"

"네 ……."

여자는 거절하지 않고 당연한 제안이라는 듯 받아들였다. 그는 종합안내소에 가서 소화제를 사와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단숨에 약을 먹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정신을 조금 차렸다는 듯,

"아저씨는 커피 안 마셔요? 내가 사다 드릴까?"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 아니. 내가 사 올 테니 가만 앉아 있어요. 복통에 시달려 힘이 없는 부인을 내가 부려먹어서 되겠소?"

고병달은 속으로 '흥! 내가 언제 처음 본 여자를 이렇게 아꼈을까?' 하고 코웃음을 치긴 쳤지만 맨살의 배, 가슴, 그것도 젖가슴까지 만져본 사내로서 미련이 남았으니 쉽게 물러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끌리니 이제 불이든 물이든 길이 아니든 길이든 가고 볼 일이었다.

"저도 커피 마시고 싶은데……."

"커피가 괜찮을까? 딴은 그게 소화제도 된다 하더라만."

여자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고병달은 커피판매대로 달려가 카페라떼 두 잔을 사서 여자에게 돌아갔다.

"뭘 먹었기에 그렇게 체했소?"

"먹긴 뭘 먹어요? 아침부터 기분이 말이 아니라서 굶었는데. 물만 마시고."

"아침부터 굶었다고요? 뭐가 똘똘 뭉쳐진 게 만져지던데? 내가 그 뭉치를 풀려고…… 이젠 좀 풀어졌나? 모르겠네요?"

"이젠 좀 살만해요. 좀 쉬었다 버스를 타면 괜찮을 거예요. 버스 탈 때부터 속이 하도 답답하더니! 갈수록 더하지 뭐예요. 그럴 땐 누가 배를 만져주면 괜찮았거든요."

"허어! 우리 마누라는 아무리 배가 아파도 나보고 주물러달라는 소리는 안 하던데? 남편하고 정이 도타운 모양이로군."

"무슨 소리! 내 그 인간 보기 싫어서……."

여자는 남편과 대판 싸웠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남편 얘기가 나오자 이마에 또 내 '천'자를 그렸다.

"답답해요? 내가 보기에는 아주머니가 잘사는 집 마나님 같은데요? 근심 걱정 없는 사모님."

"아부 그만하세요. 누구든 사정이 있기 마련이라네요. 저 지금 하도 답답해서 훌훌 바람 쐬러 나왔어요. 터미널에 와서 눈에 띄는 대로 표를 샀더니 마산행이데요."

"마산에 연고가 있어요?"

"친정이에요. 친구들도 있고요."

"아하! 그러니까 남편, 자식들 버려두고 친정으로 도망을 치는 게로군요."

남자의 소리에 여자가 빙긋 웃었다.

"정말 저요, 요새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인생이 너무너무 허무하고 기가 막혀요. 비참하게 아등바등 살아온 듯해요. 이때껏 속아 살아온 거예요. 남편도 자식도 다아 싫어졌어요. 우울증이 심하다네요. 병원에서. 조금 전 아저씨가 제 가슴을 쓸어주니 뭔가 풀리는 듯해요."

"그게 인생입니다."

그들은 휴게소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고병달도 친척집 결혼식에 다녀온다고 말했다. 회사를 정년퇴직한 후 경마장으로 골프장으로 다니며 놀고 있는 형편을 이야기 삼아 해주었다. 물론 춤추러 댄스홀을 일주일에 여덟 번쯤 간다는 얘기는 쏙 빼버렸다. 여자들이란 자신은 춤추러 다니고 술 먹고 남자와 재미보러 댄스홀, 나이트클럽에 출입하면서도 그런 곳에 자주 드나드는 남자라면 불신하고 멀리하려 한다는 것을 고병달은 잘 알기에.

"글쎄! 다문화가정이라니! 신부가 우즈베키스탄 여자라지 뭡니까? 그 언니가 몇 년 전에 한국으로 시집와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동생까지 데려온 거랍니다. 이러다가 우리 한국 여자들 짝을 못 찾으면 어쩝니까?"

"혼자 사는 게 편해요. 남자 없으면 얼마나 편한지 아세요?"

"어어, 남자 없으면 죽고 못사는 여자들도 많다던데?"

"남자들이 죄다 그렇죠.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다아 어찌나 여자를 밝히는지."

"허어! 남편도 그렇다는 말씀인데, 어디 얘기나 들어봅시다."

"우리 그 양반은 물러터졌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답답한 거죠. 남자란 강단도 있어야 하고 여자를 후려쳐야 할 때는 후려쳐야 하는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 그냥 집의 여자는 무관심에 '내 몰라라' 하고 그냥 공장, 공장! 그러고 살아요."

"오오, 남편이 공장을 운영하는고만."

"중소기업체 사장이죠. 일에 몰두해서 집에 들어오는 날이 가물에 콩 나듯 해요. 오더라도 어디 그걸 해요? 폭 꼬꾸라져서……. 부부간 재미는 벌써 사라졌고요, 당장 이혼을 하고 싶어도 아이들 때문에……그러니까 내가 답답한 거죠."

"하아! 비아그라 필요하신 분 거기 또 한 분 있구만!"

"에이! 농담도!"

다시 버스가 휴게소를 출발했다. 이번에는 스스럼없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도 버스 안의 승객 눈을 피해 갖는 은밀한 애무에 빠져드는 듯했다.

*

여름날 해가 길다 하지만 버스가 마산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웠다. 미련이 잔뜩 남은 고병달은 여자를 쉽게 놓치기 싫었다. 뭐라 구실을 붙여 그녀와 하룻밤을 보낼까 궁리를 했다. 그런데 여자가 한 발 앞섰다.

"나, 기분도 엉망이고 말예요. 기운이 없어 친정이고 친구고 찾아가기 힘들겠어요."

"그러면?"

부모는 돌아가셨고 친정 식구라곤 오라비 둘이 있는데 하나는 마산에 살고 하나는 창원에 사는데 둘 다 나이도 들고 사는데 여유가 없어 친정 갈 재미가 영 없다고 버스 안에서 말했었다.

"어떡해요? 우선 날 호텔에 데려다주고 할마씨에게 가면 될 것을!"

"아아!"

"안 될 것 뭐 있어요? 남자들 불알 하나만 달랑 차고 있으면 큰 밑천이라서 걱정 없다고 큰소리치던데?"

"여자가 그렇다던데?"

여자는 남자가 미적거리는 줄 알고 그의 팔을 낚아채며 선수를 쳤다. 고병달은 집에 전화를 걸어 적당한 핑계를 대며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는 호텔 객실에 들어가서야 해끔한 여자 얼굴과 별로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아직도 젊음을 지닌 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볼 수 있었다. 50대 여자치고는 얼굴이나 피부가 하얗고 윤기가 있으며 탱탱해 군살이나 주름이 없는 편이었다. 눈동자가 예쁘게 빛나고 매혹적인 입술과 턱이 선정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는 귀여운 여인네이고 몸은 약간 살이 쪘지만 여전히 젊었을 때 몸매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몸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곡선이라 달고 잘 익은 복숭아 같아 남자를 끌어들이는 농염한 자태였다.

"나 어때요? 아직도 쓸 만하죠?"

샤워를 하고 나와 남자 앞에 알몸으로 선 여자는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낮고 축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도 탱탱한 청춘이나 다름없어."

"정말 내 이팔청춘, 참 멋졌는데! 첫사랑은 얼마나 멋졌는지 아세요? 뭐가 뭔지 모르고 옷을 홀랑 벗기고 알몸으로 발발 떨면서 누웠는데 내 첫사랑이 하늘이 무너지듯 내 몸을 덮쳐왔어요. 사랑! 그게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호호호. 나중에 친구 애들에게 듣고 알았다니까. 정말 나 순진했어요. 믿어져요?"

"첫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요. 꿈처럼 솜털처럼 가볍게 흔적도 없게 사라지는 거……. 허무한 거지."

그는 여자의 장단에 박자를 맞추며 두 팔을 벌려 포옹했다. 버스안의 은밀한 애무에 진작부터 한껏 달아올라 있을 여자를 번쩍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내동이쳤다.

"아아! 이 박력!"

여자는 비명을 쳤다. 그때 여자의 휴대폰이 울었다.

"싫어! 싫어!"

여자는 두 손을 내저었고 남자는 여자의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빼서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이 중대한 시간에 웬 놈이 방해해?

"아저씨 첫사랑은 어땠어?"

여자는 고백하라며 어리광부리듯 졸랐다. 고병달은 '난데없이 첫사랑 타령이야'?하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구태여 고집을 부려 그 좋은 분위기를 망가트릴 위인은 아니었다. 아마 여자는 서방 모르게 피우는 바람을 첫사랑 타령으로 위안 삼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나도 뭐, 당신과 비슷한 거야. 이웃집 처녀였는데 우리 집은 못살아서 나는 고향 동네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애는 도시 학교에 진학했었지. 여름방학 때였는데 우리 둘이서 동네 뒤 무덤가로 놀러 갔지. 밤에 말이요. 어찌어찌 하다 보니 치마 밑에 손이 들어갔는데 애가 날 꽉 껴안고 자빠지는 거 아니겠어? 정신이 없었어. 순식간에 일을 치렀지. 내가 뭐 요령이 있었어야지. 그애 기분도 맞춰주면서 그래야 되는데 말이요. 뭐 그런 거지."

"재미있었겠네. 우리도 오늘 밤 그때처럼 해요."

"그런데 그애가 뭐랬는지 알아?"

"알겠다! 처음이 아니라고 했겠지."

"아아,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난 처음이고 뭐고 분간할 줄도 몰랐는데 그애가 순진하게도 고백한 거야. 도시에서 어떤 놈에게 강제로 당한 적이 있다고. 그래서 그만 첫사랑이 사라진 거요."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거보다 진득하게 여유만만한 게 좋지."

*

아침,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 여자는 언제 일어났는지 어제 보지 못했던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말끔하게 하고 해끔한 얼굴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지난밤 그를 껴안고 격정을 나누던 화냥기는 싹 사라지고 보통 여자, 애들 낳고 키우고 돈만 세며 살림 사는 여자, 남편이 펄펄 살아 있는 아줌마, 지금이라도 내가 언제 바람피웠느냐며 당당하게 호텔방을 걸어 나갈 철판 낯짝을 지닌 여인의 표정으로.

아마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 보통 여자들은 남자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인정사정, 소리소문없이 미련이고 뭐고 내던지고 먼저 사라지는 게 흔한데 그녀는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차 있지? 나 좀 싣고 바닷가로 나가요."

여자는 다분히 명령조로 말했다.

"차?"

그는 반문하면서 고개를 꺄우뚱했다. 여자는 얼른 냉랭하게 말했다.

"싫어? 그러면 그만두지 뭐. 이 이른 아침에 친정에 가는 것도 친구 만나는 것도 다 뭐 하잖아? 당신은 마누라 옆에 빨리 가고 싶지? 흥!"

사실 그는 차가 없었다. 대우자동차에서 나온 소형차를 갖고 있었는데 일 년 전에 취직을 한 아들 놈이 제가 탄다면서 끌고 다니므로 차를 뺏기고 그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신세였다.

"아, 아니야! 집에 가서 차 가져오지. 어디로 가고 싶어요?"

"진해 용원 바닷가나 구산면 콰이강의 다리나. 하여간 바닷가로 갈 거야."

"알았어."

그는 여자 모르게 화장실에 들어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놈은 첫마디에 ?오늘 거래처에 나가게 돼 있어 안 돼요.?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어 차를 빌려 달라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오늘 차 좀 빌려도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귀한 손님 모시고 어딜 가야 하는데 차가 있어야지."

"이놈! 고가야! 이실직고 해! 또 여자 생겨 외도하제?"

"야야! 외도外道가 아니고 비도非道다. 내게는. 내가 언제 오입하더나? 약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일 뿐이지."

"흥!"

"여자에게 홍콩여행 시키는 게 뭐가 '흥!' 이야! 좋은 일이지."

그의 형편을 잘 아는 친구는 두말 않고 '차를 가져가라.' 했다. '마누라를 빌려 주었으면 빌려 주었지, 차는 안 빌려 준다던데.' 하면서도. 그래서 고병달은 여자에게 코가 꿰여 운전사 역할을 아침부터 해야 했다. 진해 용원으로 가는 길은 바다를 끼고 있어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았고 용원 횟집의 매운탕은 여자가 너무 좋아했다. '요새 여자들 자가용 안 가진 남자는 싫어한다더니만 딱 그렇네.' 그는 친구 영감들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요새 여자들은 점심을 먹더라도 고급 승용차에 태워 멀리 교외에 나가 그림 같은 식당에 들러 값비싼 별미 같은 진수성찬을 먹게 해야 겨우 모텔로 동행한다고. 그러니 차 없는 놈은 여자와 연애하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아이! 꽉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이네요. 아저씨 덕분에. 저 바다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서울 간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바다구경하며 드라이브해 본 적이 없는 걸요."

"집에 갈 때 바닷바람 치마 속에 양껏 넣어가요. 몇 달은 비린내 나는 바다 냄새가 풀풀 나게 말이요."

"지난밤에 아저씨가 넣어준 바람만 해도 몇 달은 걱정 없는데요? 소화가 너무 잘돼 답답한 게 싹 사라졌어요. 십년 묵은 체증이 하루아침에 고쳐졌네. 아저씨 덕분에."

"아직도 아저씨?"

"그럼 뭐라고 불러요?"

"첫사랑!"

"아직도 첫사랑이 그리워요?"

"첫사랑 타령 처음 시작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요."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제 처음 만났으니 첫사랑이네요. 우리 나이 들었어도 이렇게 마음이 통하니 천생연분인가 봐."

"암! 첫사랑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아? 곧 우리 헤어질 것이니. 세월 지나 잊혀도 하나도 아깝지 않지."

"안 돼요. 오늘내일은 안 돼요. 난 3일은 첫사랑과 흔전만전 놀며 버티다 집에 갈 거예요."

"그래야 답답한 심정이 풀릴 것 같구먼?"

고병달은 길 아닌 길을 달려 그 끝 어디쯤에 있는 모텔 차양막遮陽幕 안으로 차를 몰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고병달은 여자와 모텔에서 나왔다. 여자가 이제 친정 오빠에게 가 봐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황혼의 바다는 역시 아름다웠다. 창문을 열고 바다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고병달은 차를 몰았다. 언뜻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좀 무리한 듯했다. '나이가 있는데, 지난밤도 그러고 좀 전에도 그러고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드는 여자를 감당해 내기에 이제는 좀 버겁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바닷가 언덕길 커브를 도는데 여자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덮쳐오며 손으로 핸들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어허! 운전 중이요!"

고병달은 아직도 몸 풀기에 미련이 남은 여자가 그를 안으려고 달려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다. 핸들을 움켜쥔 여자가 있는 힘을 다해 바다 쪽으로 획! 돌렸다. 차가 바다로 돌진했다. 브레이크를 밟을 여유조차 없었다. 차는 날아서 물속으로 처박혔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러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병달은 죽을힘을 다해 허우적거리며 탈출을 시도했다. 마침 차의 창문을 열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곳은 길이 아니었다.

'도道가 아니면…… 하고 공자께서 가르쳤는데.'

 

 

김현우│1939년 경남 창녕 출생. 1964년 《학원》 장편소설 당선. 1966년 《경남신문》에 장편소설 연재. 경남아동문학상, 경남도문화상, 황우문학상 등 수상. 경남문학관 사무국장 역임. 장편소설 〈하늘에 기를 올려라〉 창작소설집 《욱개명물전》 《먼 산 아지랑이》 《완벽한 실종》 등, 동화집 《산메아리》 외 다수. 한국문협,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경남문협 소설분과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