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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전과 함께
소설

김현우 단편소설 / 우환 덩어리

by 남전 南田 2012. 12. 27.

 

 

 

 

 

   김현우 소설가가

   최근 발간된 2012년 <마산문학>(36집)

   단편소설 <우환 덩어리>를 발표하였다.

 

 

 

단편소설

<우환 덩어리>

김현우

 

 

 

 

“아부지요, 생일잔치를 거하게 하입시더. 제가 뭐 일류 호텔에 예약해서 다 준비해 놓겠습니더. 아부지 어무이는 그냥 제가 오라는 곳으로 행차만 하시문 됩니더. 제가 다 준비해 놓겠습니더. 일흔일곱! 홍싸리 칠땡 아입니껴? 참 좋은 일 아입니껴?”

큰소리치는 큰아들 종섭의 전화에 박군창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야야! 생일잔치가 뭐꼬? 세 살 먹은 아아도 아이고 또 환갑 진갑도 아이고! 그냥 조용히 너희 형제들 불러 모아 밥 한 그릇 묵으면 될 꺼로! 너무 분답스럽게는 하지 말아레이.”

“아이고! 아부지는 가만 계시이소. 이분에는 정 서방 식구들도 오라 칼 겁니더. 그 넘이 장인장모 덕을 많이 봤으면서 통 발걸음을 안 하니 그런 자석이 어디 있어요!”

“씰데 없는 소리 말고 전화 끊어라! 우짜든지 사돈 팔촌까지 불러 모으지 말고 단출하게 우리 식구들만 불러 모아레이. 손주들은 모두 꼭 오라커고……. 내사 손주들 얼굴 보고 싶구마는!”

박군창은 큰아들 종섭의 전화에 짜증을 내지는 못하고 좋은 게 좋다고 덤덤하게 응대를 했다. 요 근간 종섭이가 하는 짓을 보면 생일잔치고 뭐고 딱 거절하고 상종을 않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아들이니 어쩌나? 그리고 이제야 철이 든 듯 아비의 생일을 챙기려드니 세상 살다가 희한한 일도 다 본다 싶어 딱 부러지게 거절하는 말을 못했다.

 

사실 그가 큰아들 종섭을 위해 큰돈을 내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아들의 나이도 쉰을 넘어섰으니 제 앞길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척척해 내련만 여전히 아비에게 기대고 아비의 재산을 축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 딸이 하나였다. 큰 아들 종섭이 밑으로 딸 종희, 아들 종구, 종호이다.

둘째 아들 종구는 재벌계 큰 회사에 취직을 하더니 이제 팀장인가 과장인가 되어 연봉이 몇 천만 원이 되어 아비의 걱정 없이도 살고 있으나 막내 종호는 대학을 나오고 나이 마흔이 가까웠는데도 취직도 결혼도 못하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어 그의 두통거리로 남아 있었다.

딸 종희는 아비의 속을 썩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전연 달랐다. 애물이 된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착실했고 행실도 올발라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통 없었던 딸이었는데.

종희는 연애결혼을 했다. 사위는 김해에서 양반으로 행세하는 집안 아들이었다. 결혼 무렵 대학원을 다니던 사위는 박사가 되어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 했다. 남들은 대학교를 나오면 취직을 하는데 정 서방은 대학원 박사 과정을 거치자 이내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설쳤다.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를 따와야 국내 대학교에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는 그만 사무관공채시험을 쳐 공무원이 되든지 회사원으로 취직을 하라고 은근히 강요를 하였건만 끝내 사위의 의욕을 꺾을 수도 나무날 수도 없었다. 딸은 교수 남편이 최고라고 우겼다. 장인으로서 할 일은 사위가 하루 속히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해서 번듯한 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꿰차도록 뒷바라지에 물심양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여간 종희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결혼 후 종희는 보람이, 빛나 아들 딸 둘을 낳고 사위 정서방은 부산에 있는 국립대학의 교수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면서 가정생활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딸 종희였다. 사실 사위는 미국 유학에 박사 학위 취득, 귀국해서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가(媤家)도 김해에서 토지가 좀 있는 집안이라 했지만 크게 여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간에 생활비나 아파트 구입비 같은 것은 대부분 박군창이 해결해 주었다. 그는 딸이 고생하지 않고 잘 살기를 바랐다. 사위는 학자답게 고집이 세면서도 행실도 올바르고 처신도 잘해 대학교에서 실력 있는 교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던가? 딸이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온다더니 종합검진을 다시 받으러 큰 병원으로 가 봐야 한다고 했다. 암이었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백혈병이라 진단을 받고서 5,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딸은 너무나 급하게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10여 년 전 갑자기 생긴 일이었다. 그의 아내는 딸이 죽자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다. 불면증으로 신경정신과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우울증이라 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면서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멍청하게 지냈다. 정신 차리고 좀 친목계에도 나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닦달을 하였건만 아내는 반응이 통 없었다.

결국 박군창은 아내를 데리고 바람을 쏘이는 셈치고 경마장을 드나들었다. 경마장에 가면 고향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흔히 만날 수 있어 아내의 대화 상대가 생겨 좋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경마장 가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말 달리는 구경도 볼만 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과 떠드는 소리에 아내는 어느 정도 안정과 활기를 되찾곤 했다. 그가 마권을 만원, 2만 원짜리를 사면 아내는 고작 백 원 아니면 2백 원을 걸었다. 어쩌다 점찍은 말이 1등으로 들어오면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는 아예 딸 종희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집안 누구도 종희 얘기를 말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박군창은 김해 녹산면에서 나고 부산 변두리 명지에서 청춘을 보냈다. 지금도 그 근처에 집도 있었다. 명지란 곳이 예전에는 김해 땅으로 그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정구역이 바뀐 바람에 부산 사람이 되었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고향이 김해요, 경남 사람이라는 뿌리는 여전했다.

그는 명지에서 젊을 때는 땅 파서 농사짓는 농부로 살았다. 주로 파 농사였다. 흔히 대파라 불리는 하얀 줄기가 긴 파를 심었다. 명지 일대는 낙동강의 사질양토 밭이라 배수가 잘되고 땅이 부드러워 파 농사를 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고랑을 깊이 파고 파 모종을 심은 다음 흙을 쳐 올려 계속 북돋움만 해주기만 하면 하얀 줄기가 길게 자라 상품 가치가 최상등품 대파가 되었고 인기 좋게 팔려 나갔다. 그런데 대파농사가 그랬다. 몇 해 농사를 지어보니 해마다 재미나 이익은 장사꾼이 보고 농사꾼은 혀 빠지도록 고생하고 땀을 흘리기만 했지 실속은 없었다. 대파 농사를 잘 지어 놓으면 장사꾼이 와서 밭떼기 채 사 갔다. 흥정을 아무리 잘해도 중간에 흥정을 붙이는 거간이 농군 편을 안 들고 장사꾼과 한 통속이 되고 보니 항상 파값이나 계약을 저쪽에 유리하게 몰아가곤 했다. 또 부르는 게 값이라고 상인이 시세가 어떻고 작황이 저떠고 하면서 값을 낮추어 불러도 채소 가격 동향을 잘 알지 못하는 농사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당해야만 했다.

―― 이래서야 안 되겠다. 씨가 빠지게 농사 지어 장사꾼 잇속만 채우게 만들어서야 되겄나? 무슨 수를 써야지 이래가지고는 안 된데이!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느 해 농사를 지으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농산물을 부산으로 실고 가서 직접 팔아야 보아야겠다고 꿍꿍이를 하면서 자주 명지에 와서 대파를 사 가는 장사꾼들과 친해보려 노력했다. 또 틈이 나면 멀지 않은 부산에 나가서 청과조합이나 시장 채소전을 돌아다니면서 거래가 어떻게 진행되고 경매절차가 어떤지 알아보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러다 고향이 녹산면으로 동향인인 청과조합 경매인과 친해졌다.

“걱정 말고 농사지은 것 트럭에다 실고 온나! 와 밭떼기로 넘기노? 무식하게! 그 사람들도 다 명지 파밭에서 사와 이곳 청과조합 경매에 넣는데 농사꾼들은 왜 그걸 못하는지 몰라. 그래서 촌놈 무지렁이란 소릴 듣지! 실고 오기만 하면 밭떼기로 넘기는 것보다 다문 1원이라도 더 받을 끼 아이가!”

“이치야 녹산 아재 말씸대로 그렇지만 작업비 들고 구전 떼고 어짜고 하면서 경비 털고 나면 트럭 대절비도 안 나온다 캅디다. 사람들이…….”

“아따 군창 자네도 뱃장이 그리 없으몬 우짜노? 젊은 사람이! 병가지상사라꼬 일은 벌리 놓고 보능기라. 그라면 길이 보이제! 젊은 사람이 간이 그렇게 작아서 오데 쓰겠노! 이 사람아!”

녹산 아재의 권유에 큰 용기를 내서 몇 고랑의 대파를 뽑아 적당한 크기로 단으로 묶어 청과조합 경매에 참가했다. 밭떼기로 파는 것이 나은지 어땠는지는 그때 결과는 이제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시초가 되어 그는 대파를 수확하면 부산의 청과조합으로 내다 팔게 되었다.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경험과 이력이 붙으니 슬슬 내 농사지은 것만으로는 욕심이 차지 않게 되었고 그의 밭 이웃 대파를 넘어다보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대파 장사꾼으로의 변신이었다.

대파 장사꾼으로의 변신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세란 것이 물 흐르듯 요동을 치며 흐르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밑천을 날리기도 했다. 그때 돈을 융통하자면 은행 융자나 대부는 꿈도 못 꿀 시절이라 대부분 고리대금업자에게 연리 몇 할 이자로 빌렸다. 그러니 까딱 실수하면 빚더미위에 올라앉을 수도 있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대파 장사의 성공 여부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품질이 상등품인지 어떤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파밭을 둘러보면서 파를 뽑아 확인하지 않고 살펴도 대파의 하얀 줄기가 긴가 짜른가, 농사가 잘 되었나 못되었나를 판단해야 했다. 두 번째로는 평당 수확량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 짐작을 해야 한다. 파를 심은 고랑의 넓이나 길이를 살피고 드물게 심겼나 촘촘하도록 배게 심겼나? 어디 병들어 비어 있는 곳은 없는가? 파밭을 일별하고서 곧 평당 수확량이 몇 단이 될지(최근에는 몇 kg가) 족집게 점쟁이처럼 알아맞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하는 기술은 시세 흐름을 한 두서너 수 앞을 내다보며 매입이나 판매 작전을 짜는 것이었다. 올해 파농사가 전국적으로 흉작인지 풍작인지, 언제쯤이면 수요가 급등할 것인지 예견하는 동물적인 촉각이 아니라 경험 축적에서 우러나오는 판단이 필수적이었다.

청과조합의 녹산 아재를 자주 만나면서 그런 요령이나 지혜도 터득하게 되고 또 파 장사꾼으로 몇 해 뛰어 다니다보니 자연히 명지 파밭을 무대로 오가는 상인들을 여러 명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만의 노하우를 전수해 줄 마음씨 좋은 사람이 드물었지만 한 두 마디 흘려주는 요령을 그는 금싸라기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장사에 활용했다. 덕분에 파 장사는 순조로웠다. 물론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순탄하여 재산을 모으게 된 것은 그가 명지에서 파 농사를 짓던 청년이고 주민등록이 명지에 되어있는 주민이란 이점이 크게 작용했고 또 값도 후하게 신용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명지에서 파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들에게 이득을 주는 상인으로 평가와 신용을 얻게 되었다.

 

파장수 일은 나이 일흔을 넘기면서 서서히 그 거래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일은 아들에게 맡겼다. 불알친구로 초등학교 동창으로 절친한 한상교가 공무원으로 지내다 정년하고서 마산에서 살고 있는데,

“야 이놈아! 그만 돈 벌어라. 그 많은 돈 죽을 때 지고 갈 끼가? 이고 갈 끼가? 파 장사는 아들에게 맡기고 너는 이제 나하고 산천경개 유람하며 구경하로 댕기자!”

하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주판알(요즘은 계산기) 튕기면서 이곳저곳 거래처에 밤낮 구분 없이 전화질을 해대고 갑자기 차를 몰고 부산으로 서울로, 대파를 사러 인근 경남 땅은 물론 전라도까지 다녀야 하니 일흔 살이나 된 사내가 하기에는 힘겨울 때가 많았다.

“사실 그렇지! 한 국장 말이 맞아! 그래서 종섭이에게 일을 물려주려고 훈련을 시켜도 영 성적이 안 올라 고민 중이다. 우짜든지 적당한 도로변에 주유소나 하나 차릴까 궁냥중이다. 파 장사는 이제 버겁고 실증이 나는구나.”

얼마 전부터 구상해오던 주유소 사업계획을 친구에게 털어 놓았고 일단 입 밖에 나온 일을 그는 곧바로 추진했다. 거래를 하던 서울 부산 상인들이 파를 사 달라는 주문이 오면 다른 상인에게 밀어버리든가 아니면 큰아들 종섭에게 시키면서 서서히 파장수 일을 줄여 나갔다. 박군창이 파 장사를 않으려 한다는 소문이 상인들 사이에 퍼지면서 일감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2년전 주유소를 대로변에 지었다. 주유소를 개업하면서 아침이면 주유소에 들리기도 하였지만 그곳을 큰 며느리보고 지키라고 맡겼다. 그러면서 주유소 명의를 종섭이 앞으로 해 놓았다. 며느리는 부산에 있는 빌딩도 관리하고 있었는데 아들보다 계산이 빠르고 재산관리에 능력이 있는 편이었다.

 

하여간 큰아들 종섭이가 문제였다. 아들 종섭이가 아니라 그에게는 종기(腫氣)였다. 사실 그의 속내는 큰아들 종섭이를 훈련시켜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려고 진작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부산 청과조합이나 명지 파밭, 서울 농산물시장 등등 거래가 있을 때마다 종섭을 데리고 다니며 장사 요령이나 수단을 가르쳤다. 그런데 아들은 좀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인지 통 관심이 없어서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비서 역할을 한다든지 자가용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아니면 아버지 돈 심부름꾼 정도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야! 이놈아! 니가 썩 나서서 흥정 좀 해 봐라! 젊은 놈이, 나보다 많이 배웠으니 세상 이치나 장사 물미도 나보다 빨리 깨칠 것인데 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흐리멍텅해 있노?”

하고 좀 답답해하면 아들은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아 아부지가 다 알아서 척척해 내는데 지가 어디 입 댈 데가 어디 있습니껴? 저야 아부지 따라 댕기면서 도와드리는 게 최고 아입니껴?”

“그래도 그렇지! 내가 100원 달라꼬 흥정을 붙이면 너는 110원은 받아야 한다꼬 은근슬쩍 부추겨야 흥정이 내 마음 묵은 대로 진행이 되제. 오뉴월 황소 뭐 맨치로 늘어져 옆에서 아무 소리도 않고 있으문 저쪽 마음대로 되어 뿌리지.”

“아따! 아부지가 이때껏 한 푼이라도 손해 보면서 거래를 했던교? 다 아부지 마음 묵은 대로 거래가 성사됐으면서요. 저는 하나도 걱정이 안 됩니더. 그래서 마음 편하게 지켜 보지예. 만약 아부지가 허투루 실수도 하고 손해를 보면 그때는 제가 나설 겁니더.”

“말은 뻔드르르 하다. 앞으로 내가 뒷전에 설 테니 니가 한번 거래를 해 봐라, 책임지고!”

박군창은 말을 아들에게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도 다시 실전에 나서면 그만 믿음직하지 않은 아들을 제쳐놓고 거래를 하곤 했다. 그러니 아들은 만년 그의 비서요 운전기사요 돈 가방이나 들고 다니는 심부름꾼이었다.

사실 아들을 붙들고 다니는 것이 남의 이목도 있고 해서 종섭이가 원하는 사업을 하도록 여러 번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종섭은 파 장사를 하는 애비를 돕기 위해 따라 다니면서도 항상 번듯한 사업체를 차려 사장 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했다. 파장수란 소리를 듣기에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듣다못해 아들의 소원대로 제 하고 싶은 것 싫건 해보라고, 밑천은 적당한 선까지는 주겠다고 했더니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전자대리점이었다. 그런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거들을 냈다. 개업하는 호텔이나 여관, 유흥업소 같은데다 대량으로 납품하기도 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소매보다는 도매 위주로 큰 규모의 장사를 한다면서 큰소리쳤는데 주로 경남 여러 지역 대리점에다 제품을 공급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 거래처의 수금도 안 되고 돈을 떼먹고 달아난 업자도 있어 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부도난 것까지 합해 총정리를 하려니까 억대가 넘었는데 그걸 박군창이 갚아줘야 했다. 그 다음에는 무슨 건설업체 상무로 들어가면서 몇 억을 내고 합자하여 회사를 차렸는데 그 역시 1년을 조금 넘기더니 본전도 못 받고 밀려나 버렸다. 또 한 번은 레미콘 회사를 차린다고 난리를 치더니 밑천만 털어 넣고 본격적인 가동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회사 설립을 책임진 사람이 배신을 하면서 자금을 들고 도망친 것이었다. 부지, 건물, 기계, 레미콘도 여러 대를 구입했었는데 나중에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어수룩하게도 속은 부분이 더 많았다. 아비를 따라 다니면서 종섭은 이런 사업 저런 사업 하고 하고 싶은 사업을 생각해 내고는 아버지에게 밑천을 대 달라고 조르기를 여러 번 했다. 시달리다 못해 하는 수 없이 밑천을 대 주면서 ‘이번에는 꼭 성공하라’고 다짐을 했건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손 벌리기를 여러 번 했다.

2년 전에 주유소 문을 열고서 파장수를 그만 두려고 결심하면서 아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려고 달레고 구슬려서 다시 파 장사 일을 시켰지만 역시 잘 풀리지 않았다. 일부러 그가 나서지 않고 아들에게 파밭으로 나가서 흥정도 하고 청과조합도 혼자 가도록 했다. 결과는 완전 실패였다. 파 장사의 3대 이치인 품질 상등품 여부 판단, 평당 수확량 예상, 시세 예견에서 낙제점을 줄 정도로 형편없이 저조했다. 상등품이라고 샀던 파를 파보니 줄기가 짧고 색깔도 하얗지 않았고, 또 평당 몇 kg이 될 거라고 짐작했는데 실제 수확해 보니 수량이 영 모자랐으며 단기간 이었지만 시세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세가 떨어지는 날 물건이 출하되어 손해를 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계속 코치를 해줘야 되지, 안 그러면 저이는 떠먹기만 할 거예요. 저이는 마음씨가 워낙 좋아서 다른 사람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거든요. 장사란 게 어디 그래요? 손해 본다면서, 본전이라면서 팔아도 꼭 이문을 남기는 게 장사가 아닌가요? 그런데 저이는 너무 순진해서 아버님 처럼 큰 거래를 하는 상인은 못돼요.”

“내가 데리고 다닌 지 십여 년이 넘었다. 제 나름대로 궁냥[局量]이 생길 때도 되었는데! 참!”

며느리의 항변에 일리가 있다 싶으면서도 여러 해를 데리고 다니면서 파장수의 요령을 가르쳤지만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하는 아들의 무능을 누구에게 탓을 돌릴 수도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어느 날 주유소에 나가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아들이 그에게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아부지! 저는 파 장사는 영 맞지 않나 봅니더. 우리 그만 파 장사는 그만 두입시더. 아부지 연세도 있고 저도 쫓아다니면서 해 보았지만 판판이 본전을 까먹으니 면목도 없고 말입니더. 글쎄 사람들이 아부지께는 속이지도 않고 깎지도 않고 하더니만 막상 제가 나서고 나서는 사람들이 절 깔보고 사사건건 속이려 들고 깐죽거리며 거래를 할라카는데 제가 영 미치겠습니더.”

“원래 세상사란 게 어려운 것이데이. 그거를 잘 해결해 내는 것이 네 실력이란 말이다.”

“아무래도 저는 아버지 사업을 이어 받기는 힘들 것 같습니더.”

“허어! 야가 뭐라 카노? 애비를 따라 십 수 년을 댕겼으면 독립을 해도 될 터인데!”

종섭이의 힘 빠지는 소리에 박군창은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사실 파장수를 40여년하면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땅을 사거나 집을 샀다. 부동산 투자야말로 투기라 하든 뭐라 비난을 하던 간에 돈을 묻어두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땅이나 건물을 살 때는 꼭 종섭을 데리고 다녔다. 파장수도 그렇고 부동산 매입이나 거래에 있어서도 아들에게 직접 경험으로 가르쳐 주고 싶어 그랬다. 그런데 아들은 파 장사는 싫다고 염증 섞인 소리를 하며 엉뚱한 사업만 할 생각을 하니 그만 울화가 치밀어 올라 골치가 아팠으니 아들은 그에게 등창(-瘡)이나 마찬가지인 종기가 아닐 수 없었다.

 

큰며느리의 하소연도 있고 해서 주유소 경영을 그만 아들에게 맡기고 난 후 박군창은 파 장사에서도 완전히 손을 뗐다. 이제 아내와 경마장에나 다니며 소일하려했다. 친구 한상교와 자주 만나 술도 한 잔 하고 김해의 고향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만나면 으레 밥을 샀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어디 헐하면서도 전망 좋은 토지가 있다고 연락이 오면 한상교와 함께 땅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주유소를 맡겨 놓으면 잘 경영할까 싶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눈치도 없이 또 다른 속내를 들어 내 보였다. 지난해 그의 생일이 두어 달 남은 더위가 점점 더해가는 보릿가을에 집에 오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를 보였다. 주유소 말고 뭔가 또 다른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빙빙 돌리며 얼른 꺼내지 않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걸 보아서.

“아부지요, 인자 파 장사 안하고 편하게 살아도 안 됩니껴? 이분에 녹산면 쪽에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8차선 도로가 뚫리면서 우리 땅이 수천 평 수용되고 그때 받은 보상금만 해도 사오 십억이 넘는데…….”

“야가 무슨 소리를 하노? 정신 좀 채리라. 곶감 빼 묵듯이 가만히 놀면서 지내봐라. 금방 빈손 털털이가 되고 만데이. 몇 십억 되는 로또 복권 당첨된 놈이 2, 3년 만에 당첨금 다 털어먹었다는 소문 못 들었나?”

종섭이가 집에 와서 그에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가 돌아간 지 한 2주나 지났을까? 큰며느리가 다급한 음성으로 전화를 해 왔다.

“아, 아버님! 아버님께서 허락하셨어요? 다른 사업해도 좋다고요?”

“무슨 허락? 다른 사업은 또 뭐꼬?”

“아이고! 사고 쳤네요. 끝내!”

며느리의 뜬금없는 소리에 몇 주 전 종섭이가 말을 빙빙 돌리며 뭔가 얘기를 할듯 말듯 하다가 그만 제 집으로 가버린 일이 언뜻 떠올랐다. 또 일냈구나!

“아아! 누가 사고를 쳤단 말이고? 퍼뜩 말해봐라. 설마 종섭이가 또 무슨 엉뚱한 일 벌렸나?”

“아버님 허락도 없이 그걸 팔았네요. 주유소 말예요. 요즘 같이 어울려 다니던 사람이 뭐라 속살거렸는지 얼마 전부터 어디 공장부지 보러 다닌다더니!”

“얘야! 알아듣게 얘기 좀 해 봐라. 종섭이가 주유소를 팔아?”

“사업을 한데요. 집에 있는 돈 다 긁어모아 갔어요. 명품 신발공장을 차린 데요.”

박군창은 그만 전화를 끊어버렸다. 또 아들의 병이 도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 명의로 된 주유소를 팔아 신발공장을 차린다니 기가 막혔다. 주유소에 딸린 땅이 몇 백 평은 되니 땅값을 수 십억은 받았을 것이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허락도 의논도 필요 없다는 생각인 모양이니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흔들며 뺨이라도 때려 혼쭐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아들 나이도 오십 줄에 드니 어찌 애 다루듯 할 수야 있나? 박군창은 ‘그만 될 대로 되라지.’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그럴 때 마음이 상하는 것을 누구에게 호소나 할까? 우울증으로 정신이 없는 아내에게 호소를 할 것인가? 아니면 경마장에서 자주 만나는 한상교나 김해 고향친구들에게 그가 겪고 있는 고충을 털어 놓을 것인가? 자식 흠을 타인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고 잘못하다간 자식이 겉물에 씻겨 나온 놈이라는 비웃음만 살터이라 혼자 속을 썩이고 말아야 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종섭을 만났을 때 그는 태평스런 표정의 아들에게,

“야 이놈아! 주유소 사장이면 되었지 신발공장 사장이 그렇게 부럽더냐?"

한 마디 던지고 말았다.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그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유소를 팔아 차린 신발공장은 잘 돌아 가는지 삐꺽거리는지 그는 관심을 일부러 가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큰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영업 상황을 중계방송 하는데 새로 벌린 사업도 조만간 결단날 것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신발공장은 1년이 지나자 문을 닫았다. 중국제 바람에 통 팔리지 않았고 홈쇼핑인가 뭔가에 대대적으로 선전을 펼쳤지만 광고비만 축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일흔일곱 맞는 생일잔치는 아들 며느리 손주까지 다 모여 저녁 한 끼 먹는 것으로 끝났다. 물론 정 서방은 대학교에 바쁜 일이 있다면서 처음에는 못 올 듯 하다고 빼드니 참석을 했는데 재혼을 한 여자까지 데리고 나타났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아버지 생일을 최고급 호텔에서 거룩하게 차리겠다고 생색을 내던 종섭은 거의 식사를 끝냈을 때쯤 헐레벌떡 나타났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이 호텔 음식이 아주 최고이거든요. 아버지 맛있게 많이 드셨어요? 하필 오늘 사업관계로 저쪽에서 만나자꼬 하지 뭡니까?”

주유소 팔아서 신발공장 하다가 말아먹고서 몇 달 동안 조용하던 아들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애비의 생일파티에 지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와? 니나 내나 실업자가 아이가? 놀고 묵는 넘이 뭐가 바빠서 늦게 오노?”

“아아, 그렇게 되었습니더. 죄송합니더.”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사고는 무슨 사고예! 그냥 놀고 지낼 수 없으니까 전망 확실한 사업 한번 해 볼라꼬 구상중입니더.”

아들 며느리 손주 사위 까지 있는 자리에서 시시콜콜 물을 수도 없고 또 종섭이가 쉽게 얘기 할 것 같지 않아서 박군창은 그만 묻지도 못하고 말았다. 다음 한번 불러서 무슨 일을 또 꾸미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서 달포쯤 시간이 흘렀다. 진작 종섭을 불러서 무슨 사업을 새로 시작하려는지 추궁을 했더라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을 큰 사고가 터지지 않았을는지 몰랐다.

진주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땅을 사려고 자주 다니던 부동산 사무실 사장이 기절할만한 소리를 했다.

“아니! 박 사장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소문 들으니 내가 소개해서 산 땅을 처분했다면서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언뜻 못 알아들었다. 무슨 산업단지가 곧 들어설 예정지라고 하기에 사 놓은 진주의 땅을 판 적이 없으니.

“무슨 말씀이요? 누가 어디 땅을 팔아요?"

“아이고! 시치미 떼지 마이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우리 부동산을 돌려놓고 다른 부동산과 거래한 것 내 귀에 안 들어오겠어요? 박 사장님과 거래한 거 한 두해입니까? 내가 사장님께 대파 거래 중개를 해 준 것까지 치자면 몇 십 년은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면 싹 바꾸고 내가 소개해 준 과수원과 임야를 다른 부동산에 맡겨 팔다니! 내 박 사장이 그런 줄 예전에 미처 몰랐소이다.”

“가, 가만! 뭐? 과수원과 임야를 처분했어?”

“와요? 인자 감이 잡히는 갑네요. 과수원은 14억에 작은 것은 8억에 넘겼다꼬 내 귀에 들어옵디다. 내가 그걸 소개했으니 팔 때도 그래야지요. 이익을 크게 남기며 팔 때는 나를 돌리놓고! 정말 박 사장님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

“이, 이보소! 다시 천천히 말해보소. 우째 14억, 8억? 그기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그랬단 말이고?”

“정말 발 빼는 소리만 하네요. 대명천치 숨길 것이 따로 있지. 땅 거래하는 거 금방 소문나는데 긴가민가 하다가 박 사장께 확인 전화하는 깁니다.”

“아이고! 낭패났네! 내가 땅 팔아먹은 적이 통 없데이!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고?”

그때서야 저쪽에서 언성을 낮추며 물었다.

“정말 그런 일이 없었어요? 이상하네? 벌써 잔금도 다 치고 등기서류를 다 만들어서 등기까지 넘어갔다 하는데? 그 땅을 조금만 붙잡고 있으면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몇 배 이익이 남을 텐데? 참 이상하다 했지.”

그의 생일날 늦게 나타났던 종섭이가 언뜻 떠올랐다. 무슨 새 사업을 준비 중이란 말을 들었던 것도.

― 하아! 종섭이가 또 사고를 쳤구나!

진주 부동산의 전화를 종합해 보니 사 두었던 땅이 큰 덩치는 14억 원에 작은 면적은 8억에 팔려 어찌된 셈인지 등기까지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부동산 이전에 필요한 인감증명을 떼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등기까지 넘어갔다니!”

“허어! 나도 소문을 들고서 전화를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요? 부산 사람이 매입했다는데요?”

그는 기가 막혀 전화를 끊자마자 종섭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러 번 신호가 길게 갔으나 받지 않았다. 애비의 전화번호가 뜨니까 아예 받지 않을 모양이었다. 큰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큰며느리는 전연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한통속이 분명했다.

“요새 해운대 어딘가 문화주택을 짓는다고 쫓아 다녀요. 사업자금이 어디서 나오는지, 누구와 일을 하는지 통 얘기를 안 하네요. 고급문화주택 단지를 개발해서요, 최고급 현대식 집을 지으면 인기가 아주 좋아서 금방 분양된데요. 아버님께 말씀 드리지 않았어요? 저는 아버님께서도 아시고 계시는 줄 알았죠. 저이가 사업자금 없이 시작하겠어요?”

종섭이를 만나서 일의 진상을 알아보려 했으나 피해 다녔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 한상교와 함께 진주에 달려가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종섭이가 전부터 거래하던 부동산 사무실을 피해 다른 곳에서 매매계약을 하고 등기서류를 넘겨주었다고 했다. 등기소까지 찾아가 등기서류를 열람하니 매매계약서에 찍힌 도장이 그의 인감도장이 분명했다. 그런데 임감증명이 위임장에 의해 발행된 것이었다. 종섭이가 그의 인감도장을 훔쳐 동사무소에서 증명서를 발급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 이놈을 우째해야 겠노? 매입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땅을 도로 찾을 수가 있다는데! 그 대신 종섭이가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데…….”

“고발을 하고 재판을 하면 되겠지만 범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데……”

“그래 말이다. 이 우환덩어리를 우째 해야겠노?”

한상교와 함께 당장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증명은 본인 외에 발급해 줄 수 없도록 위임금지 신청을 해 놓고 나오면서 가슴을 치니까 친구는 웃으며 허허실실 한 마디 했다.

“이제 자네 재산을 동가리 동가리 내서 자슥들한테 나눠주고 말아 레이.” ****

 

 

 

 

 김현우

경남 창녕 출생. <학원> 장편소설 당선(1964년). 장편소설 <하늘에 기를 올려라> 창작소설집 <욱개명물전>. 동화집 <산메아리> 외 다수. 경남아동문학상, 경남도문화상, 황우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협,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경남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 경남문학관 사무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