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불
소야 신천희
겨울답게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우리 같은 산골에는 한 번 내린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숨이 차서 못 기다린다. 조금 녹는다 싶으면 어느새 또 내려 덧칠을 해대기 때문이다.
이 추운 날씨에 보리가 후사를 본지도 꽤나 되었다.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이 드디어 눈을 뜨고 바깥으로 기어 나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녀석들이 세상을 처음 본 시점이 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을 때다.
녀석들은 세상을 하얗고 깨끗하게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혼탁한 세상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또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본 적이 없고 잘 대해주니 세상에 사람이 귀하고 다 착한 줄 알고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더도 덜도 말고 지금 같이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하얗고 나무에 꽃마저 하얗게 피어 있으니 이보다 더 정갈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정작 눈이 녹고 난 뒤의 세상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라고 하나 있는 게 때 되면 밥 주지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지 얼마나 착하고 인정이 많은가. 이런 나만 보며 살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한 방 걷어차이기라도 하는 날엔 또 얼마나 심한 상실감에 빠지겠는가.
녀석들이 세상을 알게 될 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냥 천진불로 살게 두고 싶다. 괜히 쌓인 눈을 걷어내고 땅의 실체를 보여준다던가, 실없이 걷어차서 동물을 무시하는 사람의 비열함을 미리 보여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지금은 녀석들이 나보다 더 세상의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포유류의 아기머리에는 여섯 개의 천문이 있다. 이 천문이 태어날 때 머리를 변형시켜 산도를 무사히 빠져나오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천문들은 2~3개월이면 닫혀버리지만 정수리에 있는 전방천문은 2년이 되어야 닫힌다. 이 천문을 통하여 아기들은 우주와 교감을 한다. 비가 온다는 것도 아기들이 먼저 안다. 아기들이 침을 퉤퉤하면 비가 오는 날이다.
알긴 알지만 다만 말로 표현을 못할 뿐이다. 그때까지는 어른보다 더 세상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 천문이 닫히면 그때부터 신성한 기운은 사라지고 세상의 때가 묻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강아지들도 마찬가지다. 눈도 안 뜬 것들이 어떻게 알고 어미젖을 찾아 물고 빨겠는가? 때가 되어 어미가 젖을 안주면 스스로 기어 나와서 사료를 먹는다. 추운 날은 자기들끼리 몸을 포개 따뜻하게 지낼 줄도 안다.
천진난만한 시절은 천문이 닫히기 전까지 뿐이다. 천문이 닫히고 나면 서로 물고 뜯고 똥개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 현상이야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니 지금이라도 녀석들과 뒹굴며 같이 놀아야겠다.
천진불들과 함께 놀다보면 나도 조금은 천진스러워 지지 않겠는가. 정 안 되면 녀석들의 천진함을 복사하든 베끼든 해서 눈곱만큼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혹시 아는가! 나도 천진불이 되어 헤헤거리고 다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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