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12장 후문(後聞) (3)
* 민심이 곧 천심이다
신돈과 같은 영산사람으로 친밀했던 혜근 왕사는 1376년(우왕 2년)에 주지로 있던 회암사 중수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문수회를 크게 열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불사에 참여했기에 조정이나 보우국사쪽에서도 문제를 삼았다. 천희 국사를 이어 도로 국사가 된 보우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바람에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요승 편조 신돈과 동향이고 친했다는 좀 먼 이유도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혜근은 밀양의 영원사(靈源寺)로 사실상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병이 도졌다. 병이 아니라 누가 밥에 독을 탔다는 소문도 전해 온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탁첨은 혜근 왕사의 부탁에 육로로 갈 것을 그만두고 배를 타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병세가 심해졌다. 그런데도 탁첨이 다시 떠나자고 독촉했다. 그러나 출발할 수가 없었다. 병이 위중하여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밀양으로 가지 못하고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 신돈과 절친했던 나옹 혜근 선사의 최후는 쓸쓸했다.
혜근 왕사의 가송(歌頌) ”청산은 나를 보고‘가 지금도 유명하여 널리 애송되고 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민심이 천심이었다. 백성들이 문수보살의 화신이니 성인이니 하며 존경하던 신돈도,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나옹 선사 혜근도 죽자 민심은 크게 돌아섰다. 공민왕과 우왕의 실정이 이어지자 공공연히 고려 왕조가 곧 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민간에 나돌았다. 그에 힘입어 이성계 세력은 암중모색 새 왕조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왕조에 대한 반감으로 민심이 돌아서니 이성계 세력과 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왕조를 꿈꾸게 된 것이었다.
드디어 고려 왕조가 무너져 이성계의 세상이 되기는 신돈이 죽은 후 20년만인 1392년이었다.
그 원인이나 이성계 세력에게 빌미 잡힌 것은 질정(質定) 없고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 공민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구아 아구사“ 하고 신돈과 한 굳은 맹세를 내팽개치고 반역자로 몰아 죽인 것과 강반야와 모니노 왕우의 출생부터 외면한 두 가지 일이 고려의 쇠락과 왕의 정통성문제로 번져 결국 새 왕조를 세우려는 세력에게 유리한 변수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일곱 살 왕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태후나 어느 중신도 원자가 아니라고 부정이나 부인하지 않았다. 왕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 태후가 그 어미가 천한 궁인이라면서 조금 꺼렸으나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이후 반란을 일으켜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킬 때에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정통성 시비는 1389년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 정득후(鄭得厚)가 우왕의 복위를 꾀하면서 이성계를 죽이려 하다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창왕 원년(1389) 11월에서야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던 것이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면서 이성계 일파가 우왕이나 창왕이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혈통임을 주장하게 된 것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성계 일파가 조작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성계 세력은 폐위시킨 2명의 왕을 죽였다. 12월에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고 말았다. 폐가입진을 내세워 옹립한 공양왕조차 곧 쫓아냈으며 야욕에 가득 찬 그들은 고려 왕조까지 결국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이성계를 창업 군주로 하는 조선 시대 100여 년 후에 <고려사>가 그 신료들에 의해 편찬되어 졌으니 더욱 사실(史實)이 많이 조작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독특한 인물 신돈이 정사에 참여 개혁정책을 펼 때부터 기득권자들은 요승이니 사승이니 하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고려사> 편찬자들처럼 공민왕 때 정치를 망쳤으며 부녀자들과 문란하게 놀아나서 도덕적으로 왕사나 승려로서도 평가절하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신돈은 신승(神僧)이고 성인이라고 극찬하기도 했으니 너무나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아닐 수 없다.
신돈이 승려의 신분으로 임금을 대신한 왕사로 절대 권력을 잡았으나 그처럼 당대에 이미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은 완전히 역신으로 규정 치부되어 긍정적인 논평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상반된 평가는 공존하고 있는데 점점 신돈의 개혁정치에 점수를 주는 비중이 높아가고 있다.
고조선으로부터 물려받은 천명지민본(天命之民本)의 꿈은 최치원 – 묘청 – 신돈 – 허균 – 다산과 남명 – 동학으로 이어졌다고 볼 때 공민왕의 배신으로 신돈의 개혁은 좌초되고 그 바람에 고려 왕조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창녕신문> 2024년 5월 28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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