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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2장 후문後聞

by 남전 南田 2024. 5. 21.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12장 후문(後聞) (2)

 

* 그들의 후문(後聞)

 

시해 모의를 고변한 이인(李靭)은 정당문학까지 올랐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시해 반역 조작의 주도자 김속명은 5년 후(우왕 2;1376)에 불경죄로 이인임의 탄핵으로 죽을뻔하다 10년 귀양살이 끝에 죽었다. 신돈을 처형했던 임박은 4년 후(우왕 1:1375) 유배길에 군사들 발길에 밟혀서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늦게나마 신의를 지킨 이인임은 말년에 유배 가서 귀양지에서 외롭게 죽었다.

 

신돈 사후 자기 욕심을 차린 몰염치한 사람도 등장했다.

이인임의 최측근으로 신돈 송강 집을 간혹 드나들던 자가 있었다. 이성계의 사돈인 문하찬성사 지윤(池奫)으로 그는 무인으로 난폭하고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간사하여 개경 시중에 과부가 생겼다 하면 그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용모가 예쁘지 않아도 갖은 술수를 다 써서 협박 강간해 여인이나 과부를 자신의 첩으로 만들었던 자였다. 기록에는 그의 첩이 서른 명, 따로 문호를 세운 첩이 1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모니노의 유모 장씨가 송강 신돈의 집에 살았을 때 지윤은 야욕을 가지고 접근해 간통하고 신돈의 적몰된 재산을 노렸다. 또 장씨가 우왕을 따라 입궁한 이후에도 사통하며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부동생 강성을이 죽임을 당하자 재산을 노렸다. 미쳐 강성을 부인이 관비로 적몰되기 직전 욕심을 냈다. 밤중에 침입해 부인을 협박 겁탈한 다음 첩으로 삼았다.결국 부인이 관비로 전락되지는 않았으나 강성을의 재산과 보관했던 포목 15백 필 모두 욕심 많은 지윤의 차지가 되었다. 그 당시 포목은 화폐로 통용되었다.

그의 욕심은 끝이 없어 신돈의 동생 신순이 유배되자 재빨리 그의 아들을 신순의 딸과 결혼시켰다. 신순이 참형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는 몰수당했던 신순의 집과 재산을 찾아내어 자기 아들에게 주었다.

 

우왕을 낳은 강반야와 그 유모 장금장(張金莊)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고려사절요> 30. 우왕 2, 병진(1376) 2월에 강반야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신돈의 첩 반야가 밤에 몰래 태후궁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제가 실상 주상을 낳았는데 어째서 한씨를 어머니로 합니까?” 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강반야는 비밀리에 친족 숙부뻘 되는 판사 강거실(姜居實)의 안내로 밤에 태후궁에 잠입해 태후를 만나 호소했다는 기록이다. 태후가 그녀를 외면하고 화를 냈다. 진작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 주장하여 우왕을 등극시킨 이인임이 그냥 가만있지를 않았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 강반야를 하옥시키고 대간과 순위부에서 합동으로 치죄하게 하였다. 추국 끝에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녀를 밧줄로 묶어 임진강에 던져 죽였다.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최후였다.

― 投般若于臨津 斬其族判事姜巨實

―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에 던져 죽이고 그 친족인 판사 강거실을 베었다.

반야를 몰래 입궁시켜 참형을 당한 강거실은 강반야의 아버지 강성을과는 6촌 안의 혈족 동생뻘로 그때 정3품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궁중 무단출입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으나 위험을 감수하고서 꾸민 일이었다. 결국 무단 입궁이 들통나자 강거실을 참수형으로 죽었으며, 궁궐 수비책임자인 연성군 김현(金玄)도 대사성 안종원의 상소로 회덕현으로 유배 보냈다. 이인임은 우왕이 강반야의 소생임을 깊이 묻어버리려 했다.

 

임진강에 수장당한 친모 강반야와는 달리 유모 장금장은 모니노를 따라 궁에 들어가 젖을 먹여 키운 어미로 대접받아 잘 지냈다.

여섯 일곱 살 어릴 때 어머니와 헤어져 궁에 들어온 우왕은 장씨를 어머니처럼 극진히 섬겼다.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며 토지 1백 결과 노비 10명을 주기도 하였다. 또 어느 날에는 쌀과 콩을 합쳐 60석을 내리기도 하였다. 유모 장씨뿐 아니라 태어난 직후 강성을 집에서 잠깐 젖을 먹인 적이 있는 지인주사(知仁州事) 전수(田秀)의 처에게 은혜가 있다 하여 베 7백 필과 쌀 20석을 주기도 했다.

장씨는 점점 지위가 탄탄해지자 방자해져서 우왕을 통해 정사에도 관여했다. 사통하고 있던 지윤을 높은 벼슬을 주도록 우왕에게 추천하기도 해 <고려사절요> ‘우왕전에 세도를 부리는 방자한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지윤은 과도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인임으로부터 신임을 잃자 거병하여 이인임, 최영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잡혀 우왕 3(1377) 3월 참형을 당했다. 그때 사통한 장씨에 대해서는 우왕은 죄를 묻지 않고 11월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 돌이켜 보면, 모후께서 불행하게도 홀연 별세하자 네가 유약한 나를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고 조심스레 보호해준 결과 오늘의 경사를 맞게 했으니 너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에 토지 백결과 노비 열 명을 하사하며 비록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열 번까지는 모두 용서할 것이다. (<고려사> 우왕 3년 11월)

장씨는 우왕 5(1379)에 고향 지평현으로 유배 숙청당했다.

 

우왕은 일찍이 어미와 생이별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풀기 위해 공민왕의 후궁 정비 안씨를 어머니라 부르며 궁으로 자주 찾아갔으며 나중에는 이인임의 부인을 양어머니로 삼아 그 집에도 자주 찾아가 갈증 난 모정을 해소하기도 하였다.

 

  <창녕신문> 2024년 5월 14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