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2장 후문(後聞) (1)
* 우왕의 유 신돈당(宥 辛旽黨)
시해 모의 익명 투서 사건이 엉터리임을 뻔히 알았을 수시중(守侍中) 이인임은 신돈과 같은 역당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김속명의 역변 고변을 변호하지 못했다. 좀 야박하지만 몸을 사린 것이다. 대세에 따른 그는 잠시 낮은 자리로 좌천당했으며 모르는 척 방관해 자리를 유지하다 3년 후 공민왕이 죽자 3일 만에 태후에게 왕우가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왕손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왕으로 등극시키고 후견인으로 다시 수시중에 올라 섭정으로 정권을 잡았다.
우왕 등극 20여 일이 지나지 않아 전국에 축하 사면령을 내렸다. 죽은 공민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이었다. 그때 신돈과 당여(黨與:관련자들)의 특사도 함께 단행했다.
아주 빠른 조처였다.
먼저 신돈의 당여(당파)가 사면되었다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록에서 진실의 한 조각을 찾아보고자 한다. 공민왕 생존 당대에 임금이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기란 불가능했다. 역대 어느 임금이나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잠잠하게 넘어가야 했다. 겨우 태후의 강력한 명으로 관비로 전락한 여인들이 사면을 받기는 했었다.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사면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 관노로 전락하였다가 큰 공을 세워 사면받은 일이 딱 한 번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신돈의 최측근으로 처형당한 시중 이춘부의 장자 이옥(李沃)이 그러하였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1년(1372) 6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李春富子沃沒 …… 王賜鞍馬 免其役
― 이춘부 아들 옥 몰입 …… 왕이 안장 달린 말을 하사하고 역을 면제해 주었다.
신돈이 죽은 지 보름 후 이춘부가 처형당했는데 동생 이원부 상장군과 이광부 승선 둘도 신돈 당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그들 처첩은 관비로 그 아들들은 관노로 군노(軍奴)로 각지로 흩어졌다. 이옥은 강릉부 동계 군영에 군노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 간 이듬해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군사들은 연전연패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사 안종원과 안렴사 김구용이 이옥이 명궁에다 용맹하다는 말을 듣고서 군사를 주어 대적하게 하였다.
이옥은 용감하게 싸워서 크게 승리를 거두자 부사가 그 전공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이옥에게 공을 크게 치하하며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고 또 역을 면하게 했다. 군노의 역을 면하게 한 것은 곧 군공이 크면 사면하였던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이옥은 후에 좌상시(左常侍)에 오르고 조선 건국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시호가 정절공이다.
<고려사> 우왕 즉위년 갑인년 10월에,
― 宥辛旽黨. 이어 신돈 당여도 사유했다.
<고려사> 우왕 즉위년(1374) 갑인년. 우왕전 첫머리에 또 <고려사절요> 공민왕조 제일 마지막에 “신돈의 당여를 사면한다”(宥辛旽黨)는 단 네 글자의 짤막한 기록뿐이지만 이인임의 신속한 결단이 돋보인다. 첫머리 기록을 보면 우왕 등극 경축의 관례 따라 특사인 대사면을 단행하였는데 신돈과 그 당파 70여 명의 죄를 사유(赦宥: 사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공민왕 사후 신돈의 죄를 뒤늦게나마 사면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누구나 왕의 유지(宥旨)인 사면 사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도록 단 넉 자뿐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갑인(1374년) 10월에 공민왕의 죽음을 기술하고 곧이어 10살 우를 왕으로 세우고 “신돈의 당파(무리)를 사유(赦宥)했다(宥辛旽黨)”라고 했다. 또 <고려사>는 <우왕전> 첫 줄, 첫머리의 기록은 짤막짤막하다.
• 10월 (<고려사> 우왕 즉위년(1374) 갑인년)
- 十月 癸巳朔 告喪于大廟. 초하루 계사일. 태묘에 전 왕의 초상이 난 것을 고했다.
- 丁未 下書宥境內曰, 정미일. 우왕이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며 교서를 반포했다.
……(교서 내용 생략)
- 宥辛旽黨. 이어 신돈 당파(무리)도 사유했다.
- 庚申 葬玄陵. 경신일. 전 왕을 현릉(玄陵)에 장사지냈다.
죄 사할 유“宥”자는 곧 죄를 용서해 준다는 유죄(宥罪), 사유(赦宥), 사죄(赦罪)로 그 시절 임금이 죄인을 특별히 용서해 주던 명령인 유지(宥旨)를 내린 것으로 요즘의 특사라 하겠다.
훗날 이인임이 간신이라고 <고려사>에 올랐지만 신돈의 역모가 무죄임을 결단 있게 세상에 밝히고 사면했으니 개혁정책과 전민변정도감의 일을 함께하였던 신의와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아마 <고려사> 편찬자들이 신돈을 엮어 조선왕조의 개국을 합리화 정당화하려니 사면 조치를 일반 백성들이 무시하고 간과하도록 “유신돈당(宥辛旽黨)” 단 넉 자로 짧게 기술했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이춘부전>에 우왕 때 고신(告身)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그때 신돈의 당파로 몰렸던 사람들이 모두 사면을 받아 전날의 신분으로 회복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신은 직첩과 같은데 임금이 벼슬을 내린 교지(발령장)라 하겠다. 우왕 때 이춘부가 고신을 받았다 하는 것은 전날의 벼슬과 직위의 신분 회복을 뜻한다. 후대에 와서 고신은 족보와 함께 개인과 가문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국왕으로부터 받은 직첩(교지)이므로 후손들은 선조의 고신을 소중히 보관하였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역신 신돈전>에는 끝까지 사유한 기록을 빼버렸다. 신돈과 관련자들이 사면되었음을 간과하도록 감추어 버린 것이다.
<창녕신문> 2024년 4월 29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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