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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1장 파국, <空>이로다(4)

by 남전 南田 2024. 3. 20.

서도순/ 님 가시는 날.1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1장 파국, <空>이로다

 

* 파국, <>이로다

 

이튿날 아침, 임박은 사령을 보내 수원부 외딴곳 적소에 감금되어 있던 신돈을 데려오게 했다. 신돈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임박이 수원부 현청에 와서 그를 부른다기에 이제 살길이 생겼다 하고 안심하고 사령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현청에 당도하자 마당에 형구가 차려져 있고 사형수의 목을 치는 망난이가 크고 무거운 귀두도를 들고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형수가 셋인지 망난이도 세 명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벌써 사형수 두 명은 목을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신돈은 그 광경에 아연해 지고 말았다.

아아! 업보로다. 전하가 나를 버렸구나!”

임박이 대역 죄인 신돈을 참수한다는 교지를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임박은 신돈이 왕을 시해할 음모를 꾸미지 않았음을 알고 참담했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술 한 잔을 따라 내밀었다.

첨의! 마지막 이별주요.”

고맙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정법 화엄을 민본으로 하여 불교 정토를 꿈꾸었소. 원나라에 사로잡혀 쇠약해 가는 나라를 중흥시키고 평양으로 천도하여 전진기지 삼아 북으로 쳐들어가 요동 땅을 평정해 고구려 옛 국토를 회복하고 싶었소. 그뿐만 아니라 권문세족의 권세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자유를 잃고 헤매는 노비나 천민들을 살려주려 했오.”

아아! 첨의께서 정사를 올바르게 하고 온 나라 백성들이 잘살게 하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을 때 소신도 열성을 다했지요. 종살이에서 풀려나고 빼앗긴 전답을 도로 찾은 백성들이 첨의를 성인이라 문수보살 후신이라 칭송했지요.”

민심이 곧 천심이요. 부처님이나 공자님이나 그 가르침은 똑같다고 생각하오. 노납은!”

그러기에 승려이면서도 성균관을 재건하여 유생들을 양성하셨지 않습니까?”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소. 내가 하려던 일이 어떤 것은 성취되고 어떤 것은 실패로 끝난 듯하구려. 전하께 돌아가거든 역천(逆天)하면 왕조가 패망하게 되리라 전해 올리시오.”

…….”

왕조의 멸망을 예견하는 듯한 말에 임박은 아무 대답 없이 술을 한 잔 더 부어 내밀었다. 신돈은 술을 물리쳤다.

업보로다.”

그는 하늘을 보면서 탄식했다. 그리고 목탁을 찾았다.

내 바랑에 목탁이 있소. 마지막으로 염불을 하고 싶소.”

박동생 부사가 사령에게 눈짓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신돈은 목탁을 들자 염불을 시작했다. 그 혼자 터득했던 특유의 가락, 청아하고도 큰소리가 형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난데없이 사형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 사이에서 화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조와 혜조 등 일미사, 옥천사, 극락암 스님들이 따라 염불했다. 절에 다니던 대중들도 따라 했다. 염불이 아니라 목청이 터져라 웨치는 백성의 함성이요 원성이었다. 편조 스님으로 돌아간 신돈은 다시 반야심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현조와 스님들이 목탁을 치며 따라 독송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신돈은 조용히 눈을 감고 형틀 앞에 목을 내밀었다. 모두가 <>이 아니던가? 가고 옴이 없고 여기도 저기도 <>인 것을.

공민왕 20(1371) 더위가 한창인 7(음력) 땡볕이 형장 위에 내리쪼였다.

 

고려사 <신돈전> 끝부분에 신돈과 그 역당들의 참형과 유배, 그들의 자식 처첩까지 관노비로 삼았다고 하면서 시해 사건을 조작해 고변하고 잠적하였던 이인을 은근히 두둔하는 기록이 나온다,

- 旽及逆黨妻妾, 皆沒爲官婢. 韌後以功, 驟遷至政堂文學.

- …… 신돈 및 역적 일당의 처첩들도 모두 적몰해 관비로 삼았다. 이인李靭은 뒤에 공을 세워 벼슬이 뛰어올라 정당문학까지 지냈다.

신돈을 죽음으로 내몬 이인이 우왕 때 정당문학까지 지냈다고 추켜세운 그다음 줄에 신돈의 개인적이며 인격을 모독하는 비방(誹謗)을 또다시 늘어놓으며 끝을 맺었다.

- 旽性畏畋犬, 惡射獵. 且縱淫, 常殺烏雞白馬, 以助陽道, 時人謂旽爲老狐精.

-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하고 활쏘기와 사냥을 싫어했다. 또 여색을 밝혀 늘 검은 닭과 흰말고기를 먹어 양기를 돋우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늙은 여우의 화신이라고들 수군댔다.

신돈의 개인적인 선호까지 폄하와 비방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 참형을 당한 그 이유나 반역 죄목을 자세하게 기술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마지막까지 들먹거려 마치 방자하고 음란한 성품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처럼 오도하였다. 또 그 맨 끝줄 부분 기록은 음담패설이나 다름없는데 밀직제학 이달충이 신돈 주살 이후 지었다는 시를 인용하며 세평이라고 덧붙였다, 간접화법을 사용한 결말로 철저하게 조작된 <고려사> <신돈전>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신돈 실각 이후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비난하는 글이 난무했는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최근 사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 참 한심한 기록이다. 부정적인 관련 기록들은 근거나 증거가 애매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고 추상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된 된 부분이 많다.

    최고 집권자가 되어 변정도감을 열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던 신돈의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관련 기록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의 노예 해방 운동은 우리 역사에, 나아가 세계 역사에서도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주) 신돈의 삶과 역사적 위상(김창현) : 학술대회 자료집 p25

 

<창녕신문> 연재분 (2024.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