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파국, <空>이로다(5)
* 피바람에 스러진 사람들
잘려진 신돈의 목은 개경 동문에 걸렸고 사지는 여러 곳에 조리돌림을 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조가 수계 받았던 비슬산 옥천사는 대역 죄인의 소유라 하며 저택(瀦宅)으로 불 지르고 못을 파서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역당으로 몰린 동생 신순과 신귀, 강성을을 비롯해 도당으로 지목된 수십 명이 한 달 사이에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낙산사에서 왕자의 축원을 지어 관음보살상에 바친 오일악 정방소경은 아부해 벼슬을 얻었다고 유배되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지낸 사람까지 신돈의 당여로 몰려 처형당했으니 대략 62명이 되었다. 공민왕의 잔인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냉혹한 처결이었다.
참수당한 신돈의 목이 개경 동문인 숭인문에 걸렸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시중에 퍼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구경하려고 모여든 것이 아니었다. 높은 성문 문루에 매달린 목을 바라보며 탄식을 하고 애도해 울부짖었다.
<고려사> <신돈전>에 두 살 난 아이까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又斬旽二歲兒及旽異父弟判事 姜成乙, 誅春富·蘭·云牧, 其子沒爲官奴.
― 또 신돈의 두 살 된 아이와 신돈의 이부동생인 판사 강성을의 목을 베고, 이춘부, 김란, 이운목을 처형한 후 그 아들들을 적몰해 관노로 삼았다.
신돈의 두 살 된 아이란(그때 두 살은 우리 세는 나이이니 만1세이다) 극락암에서 포대기에 싸인 채 청상과부가 된 어미에게 안겨 온 아이였다. 송강 집이 준공된 후 철관 스님이 그곳에 있던 부녀자들을 데려와 집안일을 하게 했는데 그때 젖먹이의 어미도 따라 왔었다. 좀 예쁘고 양반집 출신이라 신돈의 처고 아들이라고 이웃에 소문이 퍼졌다. 또 극락암에서 온 부녀자들은 신돈의 첩이라고 동리에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역적으로 몰려 적몰 당하면 보통 재산은 물론 그 처첩도 노비가 되었다.
왕이나 대간, 감찰들이 거론한 썩 넓게 지었다는 갑제(甲第) 일곱 채 고대광실 좋은 집이나 부녀 사통, 금은보화 부정 축재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집 일곱 채는 신돈이 고아나 떠도는 부녀자의 구호소로 사용한 극락암 같은 암자로 절 재산이었다. 김란이나 기현의 집에 기숙(하숙 생활)하며 전전하다가 지어 입주한 송강의 집에는 불경을 펴놓은 단향목 경상(經床), 촛대와 향로 외에는 금은보화는커녕 값진 물건 하나 없는 검소한 곳이어서 관료들이 노비와 재물을 바쳤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재산을 축적했다거나 전민을 빼앗아 점유했다는 말은 <고려사>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시시콜콜 기록했을 것이다. 신돈이 주살된 후 많은 토지나 노비, 보물을 몰수했다는 결과보고도 없다. 요망한 여우를 들먹이며 요승이니 호색한 노호정(老狐精)이니 매도하면서도 관노비로 적몰했다는 처첩들 또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자세한 명세나 기록이 없이 두루뭉술 넘어갔다.
깨끗했다. 후대에 평가되기를 청빈하다고 한 최영 장군보다 훨씬 더 깨끗하였다고 했다.
주) 발표자료집 p25 참조
그저 무능하고 욕심을 차린 무관이나 문관, 명문 세족을 축출한 일과 정사를 제 마음대로 처결했다는 비난과 반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신돈의 목이 개경 성문에 걸린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해가 뉘엿뉘엿 질 때,
현조와 스님 대여섯이 뭔가 들것에 담아 들고 비슬산 옥천사 아래 계성 일미사에 나타났다. 그들은 7, 8월 무더위에 지쳐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이 일미사 마당에 들어서자 스님들이 여럿 달려 나왔다.
현조가 왔다고 알리자 머리가 허연 주지 각조가 지팡이를 짚고 조실에서 나왔다. 현조는 인사고 뭐고 할 새 없이 달려가 각조의 소매를 이끌고 구석으로 갔다. 현조의 말을 들은 각조는 깜짝 놀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편조가 돌아왔단 말인가?”
“그렇네. 천 리 먼 길을 혜조와 함께 우리들이 들것에 모시고 왔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느라 큰 마을은 피하고 산길로 산길로 돌고 돌아서 왔다네.”
“고생 했구먼.”
각조는 개경에서 온 스님들을 승방으로 모셔 쉬도록 하고 들것은 조심스레 헛간으로 옮기라 했다.
“혜근 왕사가 임박 대감과 박동생 수원부사를 만났는데 은밀하게 편조 왕사의 시신을 온전하게 우리들에게 돌려주기로 하였지. 혜근 왕사가 가사 장삼 한 벌과 삼베 한 필을 준비해 주셔서 염을 하고 운구하게 되었지.”
“정말 고생하였네. 이제 다비해서 부도에 안장하세.”
이튿날, 다비를 위해 시신을 염했던 삼베를 펼쳤을 때 기이한 일이 있었다. 7, 8월 무더위 염천에 10여 일 지났음에도 시신은 조금도 부패하거나 냄새가 나지 않았고 얼굴도 생전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얼굴을 깨끗한 물로 닦고서 삼베를 덮었다.
지체하지 않고 대웅전 뒤 예전에 편조가 새벽이면 수도 정진했던 너럭바위 근처에 다비장을 마련해 십여 명 스님만 모여 다비 예불을 올렸다. 편조왕사 신돈은 한 줌 재가 되어 스승 진묵대사 부도 옆에 자그맣고 둥근 부도에 모셔졌다. 일미사 스님들의 천도를 비는 염불과 독송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편조왕사 신돈이 자란 비슬산 옥천사는 저택으로 훼철 파괴되었고 그가 세웠던 일미사도 사라졌지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과 치열한 삶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신돈을 처형한 후 공민왕은 원자 모니노를 궁으로 불러들여 태후의 궁전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시해 모함 투서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7월에서 8월 사이였다. 제법 빠른 시기에 왕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송강 집에서 신돈이 강반야와 왕자를 돌봐 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신돈을 잡아 참형에 처했고 처첩이라 소문난 여자들은 관비로 모두 몰아내 모니노가 그 집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려 하였다. 물론 남자 종들도 달아났으니 송강의 집은 빈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왕자를 속히 보호 조치해야 했다.
<창녕신문> 2024년 3월 26일 자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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