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파국, <空>이로다(3)
* 신돈의 참형과 당여의 처벌
유배를 간 신돈을 뒤따라 가서 죽이라는 왕명을 받은 찰방사 임박과 체복사 김규(金㺩) 등은 수원부로 갔다. 임박은 전에 신돈이 큰 덕을 지녔다고 하며 적극 지지하고 따랐으며 신돈도 그를 좋아하였다. 전민추정도감의 책임을 맡겨 판결하게 했으며 성균관 재건에 함께 힘쓴 신돈을 크게 미워하지 않았으므로 좀 떨떠름한 심정으로 수원부로 내려갔다. 수원부사(水原府使) 박동생(朴東生)은 평소 신돈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었던 인물이라 둘에게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아아! 전하께 충심을 다해 보필했는데 죄를 묻지도 결백을 밝히려 않고 죽이라 하다니요. 그런 법이 어딨소?”
따라갔던 이성림(李成林)이 나무랐다.
“투서에 지목했던 공모자가 다 시해 음모를 실토해서 대역죄가 빤한데 더 물을 것이 어딨소? 부사가 더 주장하면 신돈의 역당으로 몰릴 것이요.”
“임 찰방사나 이성림 당신이나 다 첨의 대감의 당파이었을 텐데 야박하게 조롱하다니! 그리고 목을 베면 그만일 텐데 목은 송도 성문에 걸고 사지는 찢어 5도에 조리돌림을 하라니! 전하의 비정함이 너무 무섭구려.”
“어허! 못하는 말이 없구려.”
“그렇지 않소. 첨의가 반역했다는 증거는 익명 투서뿐이잖소? 모함이란 말이요. 모진 고문과 장형에 몇몇이 자백한 것 외에는 증거가 없잖소?”
“허어! 더 떠들면 함께 부사의 죄를 물을 것이요. 당장 나가시오.”
<고려사> <신돈전>에 박동생의 눈물의 호소를 기록하고 있다.
― 水原府使 朴東生泣旽前, 陳其情款, 成林叱退之.
― 수원부사 박동생이 신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의 깊은 정분을 이야기하자 이성림이 꾸짖어 물리쳤다.
박동생은 시중을 지낸 이제현의 사위로 후궁 혜비의 여형제와 결혼했으니 형부가 되기도 한 인물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혜비는 공민왕 사후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가 되었다.
임박은 박동생 부사의 말을 들으니 마음 무거워졌다. 사실 그랬다. 왕이 친국해 신돈의 변명이라도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맹세문을 불태워 버린 것은 신의를 저버린 왕의 변심이요 배신이었다. 냉혈하고 무정한 왕을 어찌 원망하랴? 이춘부나 김란처럼 첨의의 결백을 변호하려다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테니 그저 왕명을 거역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속으로 한탄했을 뿐이었다.
임박이 수원부에 왔다는 소식을 적소(謫所)에서 들은 신돈은 안도했다.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낸 임박을 보낸 것은 필시 왕이 오해를 풀고 그의 유배를 취소하고 데려가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아기 모니노 때문일 게다. 나를 풀어주시는구나.”
그는 어쩌면 왕자 모니노를 돌보고 있었던 공을 잊지 않고 유배를 풀어주려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신돈은 바로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알지 못하고 왕을 믿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나 그의 충직함이 추잡하고도 비열한 수작에 작살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편 유배 온 신돈을 따라 몰래 수원으로 왔던 일미사의 현조, 혜조와 벽호, 벽계 등은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낙망하고 있었다. 현조와 혜조는 옥천사에서 같이 수계를 받은 스님으로 신돈을 따라 개경에 올라온 이후 구호소인 극락암에서 머물며 천정, 철관 스님들과 함께 천희 국사의 보좌역이나 구휼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미사나 옥천사에서 올라온 스님 외에 구호소 암자에 있었던 스님들도 여럿 따라와 있었다. 그들은 밤이 되자 신돈이 유배된 외딴 적소에 숨어서 들렸다. 수직하는 군사에게 돈을 쥐여주고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나던 길이라며 왕사 혜근도 신돈이 머문 배소(配所)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혜근은 영산현 출신 동향인으로 신돈을 금강산 유점사 가는 길에 만난 이후 중국까지 동행해 수행하고 득도한 인연으로 서로 친밀했다.
그는 천정 왕사에 이어 올해 왕사로 봉해졌다. 신돈이 몇 해 전에 혜근을 왕사로 추천을 하였었다. 왕은 나옹 혜근 스님을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했던 것이다.
현조와 다른 스님들이 인근 주막에 있다가 밤이 되자 신돈을 만나려고 처소에 찾아왔 듯 혜근 왕사도 밤이 되자 찾아온 것이었다.
“첨의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려고 우리들이 왔습니다.”
“노납도 그렇소.”
노납(老衲)이란 늙은 스님이 상대에게 자신을 낮추어서 하는 말이었다.
신돈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기 위해 온 그들은 서로 그사이 밀린 일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수원부의 아전이 밤중에 찾아왔다.
“우리 부사께서 왕사님을 뵙자고 합니다. 임박 대감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혜근 왕사는 박동생과 임박의 부름을 받고 그 날밤에 남모르게 수원부 객사로 가서 만났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왕사를 맞았다.
“왕사를 뵈옵니다. 첨의께서 귀양을 오니 배소에 왕사께서도 들렸구려.”
“우연찮게도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신 첨의와 노납은 동향이고 원경에서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기도 했지요.”
나옹 혜근에게 박동생과 임박은 낮은 목소리로 뭔가 속삭였다. 바깥 누군가 듣지 못하게. 혜근은 두 사람의 말을 조용히 듣고서 고개만 끄덕거리고 그 방을 물러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새벽녘에 현조가 머무는 주막으로 달려가 스님들과 뭐라 숙덕거렸다. 혜근은 현조에게 가사 장삼 한 벌과 삼베 한 필을 바랑에서 꺼내 주었다.
“노납은 이 길로 회암사로 가네. 도문들도 이목을 피하고 무사하기를 비네.”
* <창녕신문> 2024. 2. 28.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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