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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1장 파국, <空>이로다(1)

by 남전 南田 2024. 2. 3.

제11장 파국, <空>이로다(1)

 

* 시해 모의 고변 익명서와 추국(推鞫)

 

사심관 제도의 부활 주장과 19(1370)에 왕의 존엄이 상했다고 생각한 최용소의 일이 생긴 후 직접 정사를 돌보기로 결심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신돈을 정권에서 물러나게 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공민왕은 20(1371) 7, 김속명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바친 익명 투서를 읽자마자 이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고변 익명서(투서)를 읽고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진짜라며 김속명의 부추기는 말에 심란해져 더욱 화가 났다. 익명서를 다시 읽고 분격하면서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옳타! 바로 요때로구나!”

한림거사(이인)의 시해 모의 익명서를 읽자마자 권력을 쥐고 있는 영도첨의를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첨의를 불러라. 과인이 그와 진위를 가리겠다.”

왕은 짐짓 신돈을 불러서 진위 여부를 묻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김속명에게 그런 말을 해 위신을 세우려 했다.

아닙니다. 첨의를 부르거나 전하께서 친히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익명서에 적힌 신돈의 패거리 몇을 잡아 추달해 시해 대역 모의를 자백을 받아내면 됩니다.”

그래? 그러하라.”

모의 자백을 받아내면 그 세력을 단번에 꺾어 버릴 수 있습니다.”

왕과 김속명은 밖으로 소문이 새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일을 비밀리에 처결하었다. 신돈이 알 수 없게 장막을 치고서……. 김속명도 형의 원수를 갚을 기회라 왕에게 추달(推撻)해 강력하게 단죄하여야 한다고 부추겼다.

신돈이 자발적으로 낙향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왕으로서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왕은 김속명의 말에 사구사 아구사맹세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신돈을 철저하게 믿고 어떠한 일이 있든지 간에 서로 구해 주겠다는 맹세는 사라졌다. 점점 신돈이 자기를 죽이려 모의했다는 생각에 앞뒤 분간이 서지 않았다. 왕은 자신이 신돈을 저버리고 배신한다는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판단력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저 눈앞에는 익명 투서의 붓글씨가 어른거렸을 뿐이었다.

 

순위부에 명해 투서에 거명된 자들을 당장 잡아들여 추국하라.”

왕은 김속명에게 곧바로 명령했다.

7월 이른 새벽, 김속명은 가장 먼저 시해에 앞장섰다는 기현의 아들 기중수와 한을송을 재빠르게 조용히 잡아들였다. 김속명은 그들을 잡아 순군옥에 가두고 먼저 몽둥이 찜질 장형부터 시작해 반쯤 죽여 놓고 국문했다. 예전에는 옥에서 죄인을 문초할 때 여러 가지 고문 도구를 사용했으니 고문에 못 이겨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기중수나 한을송이 초인이 아닌 다음에야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모진 고문으로 한나절 만에 둘에게 시해 모의 자백을 받아냈다. 왕에게 죄인들이 죄를 시인했다고 추국 문서를 올려 아뢰었다. 자백서를 읽고 난 왕은 신돈의 시해 음모가 믿을 만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김속명은 왕에게 신돈과 가장 가깝게 지낸 기현과 최사원, 고인기, 정구한, 진윤검 등을 하옥해 죄를 자백받게 하겠다고 고했다. 왕명이 떨어지자 김속명은 기현 등을 잡아들여 장형으로 우선 다룬 후 호된 고문을 가해 국문하며 죄를 물었다. 어찌 피할 것인가? 혹독하고 모진 고문에 못 견뎌 죄를 자백하거나 버티었든 간에 일곱 사람은 대역죄를 자복하였다고 왕에 보고했다.

국문 결과를 들은 왕은 거의 이성을 상실한 상태로 흥분하여 죄인들을 장살(杖殺)하거나 형장에 끌고 가 당장 목을 베라고 고함을 쳤다.

 

신돈은 그렇게 비밀리에 체포와 국문, 처결이 신속하게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김속명이 기현 등을 잡아들여 국문하고 있었던 어제 그는 태평스럽게 궁궐 인근에 있는 광명사로 왕비 혼전이 있는 정릉 두 곳을 다녀왔었다.

왕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든 조처를 했다. 첨의가 광명사와 정릉에 간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일이 벌어져 김현 등을 잡아들여 문초 중임에도 왕은 시치미떼고 신돈의 측근이기도 한 이인임과 염흥방을 보내 수행토록 하며 아무 일도 없는 듯 위장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신돈이 집으로 돌아오면 도망치지 못하게 가택 연금하라고 명했다.

공민왕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아들 왕자 모니노를 낳은 반야를 버린 일과 시해 역모 당사자인 신돈을 당장 잡아들여 친국하여 유죄 여부를 왜 묻지 않았을까? 아마 서로 상면하기 싫었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김속명의 주장대로 강력하고 신속하게 처결을 밀어붙인 것이 아닐까?

 

가택 연금 이틀 만에 집을 둘러쌌던 숙위군 군관과 함께 압송관 이성림과 왕안덕이 신돈에게 와서 알렸다. 왕의 시해 음모 익명서가 날아와 일어난 일을 짧게 얘기했다.

첨의 대감을 즉시 수원으로 유배 보내라는 왕명이 떨어졌소.”

뭐라? 유배? 나를 전하께 데려다주오. 주상을 배알하고 해명할 기회를 주시오.”

전하께서 만나기 싫은지 다른 명령은 없었소!”

그는 꼼짝없이 압송관 군사들의 감시 아래 끌려서 유배길에 올랐다.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 보내자 김속명 등이 당장 죽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여러 해 전 흥왕사의 변란으로 죽을뻔한 일이 있었던 왕은 그 일을 떠올리면서 겁을 먹고서 떨었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최측근 신하에게서 배신당했다는 분노로 앞뒤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돈을 대면해 진위 여부를 묻거나 변명조차 듣지 않은 왕은 유배를 보낸 다음 죽여야 한다는 김속명의 주장을 따르기로 왕은 작정했다.

그러자 일말의 가책이 있었던지 왕은 임박을 불렀다. 왕은 임박 앞에 한 장의 종이를 내보였다.

임박은 변정도감의 수위 판사로 이인임, 이춘부 등과 함께 신돈의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처결했던 3인 중의 하나였다.

신돈을 버리려는 지금 왕에게 일말의 후회나 자책감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면서 왕이 내놓은 문서를 살폈다. 그러면서 감싸거나 변호하는 말도 못 하고 묵묵히 글을 읽었을 뿐이었다.

 

<창녕신문> 2024년 1울 30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