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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5)

by 남전 南田 2024. 1. 26.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10장 왕의 배신과 좌절(5)

 

* 공민왕의 배신과 신돈의 좌절

 

공민왕은 치밀했다. 아니 김속명이 더 주도면밀하게 신돈을 속였다. 심복들이 사라졌는데도 신돈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캄캄해졌으나 무슨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벽호 스님과 함께 있었는데 한밤중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님! 제가 왔소.”

강성을이었다. 울타리 밖을 지키던 충용위 군사에게 뇌물을 건네고 사정하여 군관 몰래 개구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강성을이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소. 그제 밤중에 기현의 아들 기중수 정랑과 한을송이 순위부에 붙잡혀 들어갔다 합니다. 이어서 기현과 최사원, 고인기 등도 불려 갔답니다.”

뭐야? 언제 그런 일이 생겼다더냐?”

어제 성님이 광명사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 일이 터진 듯합니다. 어제 비밀스럽게 진윤검 장군과 정구한 소윤 등 성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이 붙들려 간 모양입니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다.”

성님이 전하를 시해하려는 역모를 꾸미려 했답니다.”

뭐야?”

신돈은 깜짝 놀라 크게 반문했다. 강성을은 내관 신소봉에게 들었다며 자세하게 일의 경과를 얘기하였다.

어떤 놈이 성님을 시해 변란을 도모한 역적으로 모함하는 투서를 김속명 장군 집에 던졌답니다. 바로 성님이 광명사로 가기 전날 말입니다. 투서를 들고 김속명이 임금님께 달려가 고했습니다만 처음엔 믿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김속명이 기중수와 한을송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다 순군옥에 가두고 순위부로 하여금 추국했다지 뭡니까? 막 뚜드려 패고 고문을 했을 테니 누가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반역을 기도했다는 자백서를 둘에게 받아 김속명이 상감께 올리면서 성님과 친한 사람 진 장군과 정 소윤 등 여럿을 더 엮어 또 잡아들였다 합니다.”

신돈은 망연자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투서를 던진 자가 한림거사라 자칭한 놈이랍니다. 익명 투서 내용을 보면 우리 사랑방에도 왔다 갔다 한 자인 듯합니다. 그중 한 놈이 성님을 모함한 듯합니다. 의심 가는 자가 있는데 이인이라는 놈입니다.”

이인이라니? 누군가?”

! 선부의랑 이인 말입니다. 첨의 대감께 벼슬을 올려달라고 하면서 드나들었는데 성님이 선뜻 그놈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앙심을 품은 게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인(李韌)이란 자가 생각났다. 사관편수관을 지낸 문관이었는데 벼슬 승진을 위해 그의 환심을 사려 애쓰자 만나기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자가 앙심을 품고 일을 저질렀다고 신돈을 생각하였다.

그자가 익명 투서에 쓰기를 기중수와 한을송, 그리고 기현, 최사원, 고인기, 정구한, 진윤겸 장군까지 공모자로 거명하며 얼마 전 시해 변란 역모를 알게 되어 기록한 익명서를 밤중에 김속명 집에 던져넣었답니다.”

내가 시해 변란 역모를 해? 얼토당토않구먼.”

시해 역모 사실을 대강 얘기하자면 전하께서 헌릉(광종릉)과 경릉(문종릉)에 행차했을 때 성님이 진윤겸 장군과 정구한 등의 사병과 자객을 길에 매복했다가 왕을 시해하기로 모의했는데 행차를 호위했던 군사들의 의위(儀衛)가 삼엄하여 거사를 도모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러고 다시 뒷날에 거사를 도모하자고 성님이 말했다고 투서에 적었답니다.”

저런 망할 놈이 있나! 아니! 전하께서 헌릉에 참배한 적이 지난 윤3월이 아닌가?”

지금이 7월이니 넉 달전입니다. 전하께서 요새 너그러움은 없고 조급하고 조바심으로 의심병이 도졌다고 합니다. 역모 투서에 기중수와 한을송의 자백에 더욱 잠도 잘못 주무시고 성님이 군주를 기만했다고 치를 뜬다고 합니다.”

 

최근 역사 연구학자들의 견해는 “그렇게 허술하고 구체성 없이 대사를 일으키려 했다니 믿기 어렵다.”고 했다. (발표자료집 p23)

사실 <고려사절요> 207월 기록에는 “이인이 신돈의 문객이 되어 흉악한 계책을 알고 몰래 명부를 만들어……고변하고는 곧 변장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했으며,

신돈의 반역 이유를,

“왕의 성품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여 심복 대신일지라도 권세가 강성해지면 반드시 꺼려 목 베었다.”

하고는 신돈도 역시 그렇게 당할까 미리 겁을 내 반역을 도모했다고 적시하였다. 왕의 성품이 잔인하여 심복 일지라도 목을 벤다는 말은 조정 중신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도는 말이었는데 이인은 그 말을 신돈이 한 듯 조작하였다.

그러니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견해와 같이 그리 큰일을 도모하는데 너무나 허술하고 구체성이 없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 곧 김속명 집에 던진 이인의 익명 투서는 조잡하게 조작된 허구요 음해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신돈 세력이 자객들을 보내 왕을 시해하는 변란을 만약 계획하였다면 치밀하게 준비해 성공하도록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시해 반역의 성패가 자객이나 사병에게 달렸는데도 그들 숫자는 무시하고 기중수 등 7명만 투서에 적었다. 7명만이 그곳에 가서 매복했을 리가 없다.

평소 왕의 거둥 때 100여 명의 호위 병사가 임금의 수레를 둘러싸고 갔는데 대낮의 습격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니 투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 본다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익명 투서의 조잡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것이다.

강성을이 개구멍으로 들어와 소식을 전했던 이튿날,

공민왕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윤검, 기중수, 고인기, 한을송 등 7명을 전격적으로 처형하라 하였다. 또 신돈의 동생 신순과 신귀, 이운목 셋을 잡아 곧바로 유배 보내라 했다. 왕의 냉엄한 명령은 그대로 곧바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연금 상태인 신돈은 알지 못했다.

신돈의 시해 음모를 확신한 공민왕의 격노와 잔인함을 읽을 수 있다. 왕의 배신은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 <창녕신문> 2024. 1 .15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