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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3)

by 남전 南田 2023. 12. 9.

양산 통도사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10장 왕의 배신과 좌절(3)

 

* 왕의 의심과 친정(親政) 공포

 

이인임은 <고려사>에는 간신으로 기록될 만치 처세술이 능하고 눈치가 빨라 형세가 변하면 따라 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신돈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따랐으나 출신 배경이 권신 대족의 집안이어서 점점 신돈의 개혁정책을 반신반의해 중신들의 여론과 사세에 따라 약삭빠르게 자신의 이득이 어디에 있는지 따져 처세하고 있었다.

이인임은 왕을 만난 자리에서 슬쩍 사심관 제도 부활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충숙왕이 폐지한 제도임을 은근하게 말했다.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의 의심병을 살짝 도지게 했다.

그렇지. 5도에 사심관을 내려보내면 역시 그자도 도둑이 될 거요. 예전 사심관들이 모두 큰 도둑들이었기에 제도를 없앤 것인데?”

왕은 이인임의 말을 듣고서 신돈의 권력이 비대해짐을 경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시중 이춘부가 주동이 되어 도당(都堂)의 논의를 거쳐 삼사에서 사심관 제도를 부활해 달라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왕은 그것을 화로에 내던져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조당(朝堂)에 나와 정사를 잡아야 한다면서 왕의 친정을 강력하게 주청하였다. 임금도 신하들의 주청을 들으니 정신을 추슬러 신돈에게 내주었던 권력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현과 최사원이 첨의의 심복이 되고 이춘부와 김란은 우익이 되어 그 당파들이 조정을 메우게 되었으니 이는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김속명의 간언에 왕도 적이 불안을 느끼긴 하였으나 당장 어쩔 수 없었다. 곧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럴 즈음 명덕태후의 반발도 더욱 심해졌다. 태후는 왕이 문후를 올리려고 찾아가면 강력하게 친정을 하라고 야단쳤다. 어느 때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신돈의 일을 왕의 실정이라 비난했다.

왕이 나이가 어리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왕권을 다른 자에게 넘겼소? 조정 대사를 위임하니 그자가 죄 없고 공이 큰 자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처결이 많았소.”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힐책하는 태후에게 왕은 불쾌한 기색을 들어내며 반박했다. 막후에서 왕명을 내려 신돈이 거행한 것뿐인데 권력을 위임해서 일어난 일이라 하니 수긍할 수 없었다.

공민왕은 19(1370)에 왕의 존재감이 무시당하고 존엄이 아주 많이 상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겼다.

전라도를 순시하고 돌아온 체복사 최용소가 입궁하여 왕을 먼저 뵙고 순시 결과를 보고하지 않고 신돈부터 앞서 만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에게 장형을 하게 했다.

얼마 후에는 공민왕은 신돈의 승정(僧正, 승려의 최고 지위)인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직위를 무시한 일이 있었다. 왕이 광명사에 친히 나가서 승려 선발 과거인 공부선(功夫選)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신돈에 대한 왕의 신뢰는 빠르게 무너져 친정 선언은 점점 확실해졌다.

공민왕 19(1370) 10, 공민왕은 시중 이춘부 등을 불러 친정(親政)의 뜻을 밝혔다. 더 이상 첨의에게 정권을 전적으로 위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다 직접 보평청(報平廳) 조당에 나가서 정사를 본 시기는 다섯 달 후인 203월이었다. 왕권을 맡긴 지 6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다.

이제 첨의는 자주 등청할 필요가 없다.”

하고 왕은 들어내 놓고 멀리할 것을 중신들에게 알렸다. 신돈이 왕의 처결을 돕고자 궁내 조당(조정)에 나올 필요 없이 궁 밖의 도당에 근무하라는 선언이었다.

 

왕은 신돈을 밀어낼 사건이나 사고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신돈은 왕이 그와 맺은 언약을 조금도 의심치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의 낙향이나 금강산 입산을 고려하지 않고 지냈다.

망설임, 그것이 그게 큰 화근이 될 줄이야! 왕이 친정을 공포했을 때 신돈이 왕의 신뢰를 잃었다는 걸 깨닫고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하거나 금강산 입산을 단행하였더라면…….

동생 강성을과 강거실이 송강 집에 오더니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성님! 이상한 말들이 대신들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더. 이인임 대감이 넌지시 내게 말합니다. 전하께서 성님을 이제는 밀어내고 직접 정사를 처결하겠다니요?”

강성을의 말에 강거실이 거들었다.

이제 상감이 모든 정사를 처결하려고 하니 지난날과 같지 않답니다. 첨의와 사이가 벌어졌다고 사람들이 말하지요.”

그럴 리가 없다.”

신돈의 단호한 엄명에 둘은 입을 다물었지만 조정 안에 떠도는 이상한 기류는 신돈도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궁극적인 정치 운영은 왕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기에 그는 왕의 배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10년 쯤 지나면 내가 꿈꾸어 왔던 일들이 제대로 마무리되리라 생각하고 있어. 그때쯤엔 물러나 산속 깊은 암자에 가서 승려로 수행해야지.”

신돈은 수년 전 왕으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았을 때 이루고자 한 일들이 미진한 부분이 아직도 많으니 더 조정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금강산에 입산하던지 옥천사로 낙향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궁구하고 승려 본연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신돈은 왕을 믿었다. “사구아 아구사그 친필 맹세서가 여전히 효력이 있지 않겠는가?

잠깐 혼선 일으켜 친정을 말한 것이지 결코 그의 충심을 충직함을 왕이 신뢰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사태의 추이를 가늠하느라 그는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며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왕은 십여 일이 지나자 병석에 누운 신돈을 찾아 문병하였으니 어찌 보면 여전히 신임을 거두지 않은 듯 보인다. 그때 왕은 은근히 신돈이 산천으로 물러나 승려로 돌아가려는지 타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신돈은 왕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그 후 몇 달은 전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지나갔으니…….

 

<창녕신문> 2023년 12월4일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