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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10장 왕의 배신과 좌절

by 남전 南田 2023. 11. 24.

(사진 : 운주사 와불)

 

10장 왕의 배신과 좌절(2)

 

* 국학 재건과 왕자 모니노 상면

 

공민왕 17년 영전을 다른 터인 마암에 짓고 있었을 때 신돈과 임박이 공사 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 태후의 명으로 공사를 중단한 마암은 개경 동북쪽으로 그 근처에 퇴락한 국학(성균관)이 있었다.

) 국학: 고려 초기, ‘국자감을 고친 이름으로 성균관이라고도 함.

 

신돈을 따라 그곳에 간 임박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곳이 성균관인데 너무 퇴락하였습니다. 고쳐 지어서 유생들을 모아 교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첨의에 대한 유생들의 민심도 얻을 것입니다.”

그 말에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개혁 세력이 미미하였는데 국학을 일으켜 유학자 출신 신진사대부 조정 중신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끌어들인다면 더욱 좋은 일이란 판단이 섰다.

신돈이 어느 날 왕에게 임박의 의견을 그대로 아뢰었다.

영전 공사를 살피려고 가서 보니 그 옆에 국학(성균관)이 있는데 너무 퇴락하였습니다. 좌사 이색의 상소도 올라와 있습니다. 마땅한 조처가 있었으면 합니다.”

신돈은 영전 건축 때문에 마음이 상한 유학 출신 중신들의 마음을 수습하고자 왕에게 아뢰었다. 왕도 유학자의 편을 드는 듯한 신돈의 말에 언뜻 그 의도를 곧 알게 되었다.

성균관이 몹시 퇴락하였다니 그냥 버려두어서야 되겠소?”

공민왕은 조정 중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성균관이 퇴락하여 고쳐 지어야 한다는 임박의 건의와 이색의 상소가 있자 받아드려 신돈에게 명했다. 영전공사도 한창인데 국학을 재건하도록 명하자 신돈은 수시중 유탁과 이색 등과 함께 숭문관(崇文館)에 모여 옛터를 둘러 보았다. 같이 간 유자들이 공자 등 선성(先聖)들의 위패를 향해 절을 올리자 신돈도 따라 했다. 그러면서 국학 재건에 큰 힘을 기울이자고 제안했다.

정성을 다해 다시 짓도록 합시다.”

예전과 같은 규모를 지으려면 어려울 거요.”

이색과 유탁은 전보다 더 큰 집을 짓겠다는 신돈의 주장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문선왕(文宣王 : 공자)은 온 천하가 영원토록 모실 스승인데 비용을 아끼려고 예전의 규모를 줄일 수는 없지요.”

신돈은 유생들의 마음이 흡족하도록 성균관을 재건하자 신진 사대부들은 좋아했다.

 

신돈의 국학 중흥책은 공민왕의 찬성으로 추진되어 성균관 좨주에 이색을, 그 후에 추정도감의 사(판사)를 지낸 임박을 좨주로 임명해 100여 명의 생원 양성에 힘을 쏟게 하였다. 또 학문에 정통하는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등 최근 과거급제 출신 젊은 신진들이 교관을 맡게 하였다. 성균관은 점차 예전의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영도첨의 신돈이 성균관 재건과 교육에 관심을 크게 보였으나 일부 유생들은 승려 출신인 신돈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거나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곧 신돈이 승려이니 유학과는 이질감이 생겨 그리된 것이었다.

 

공민왕은 영전건설로 인한 중신의 반발 등에 충격을 받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신돈의 새집이 완공되고 별채 <문수암>이 꾸며지자 자주 찾아갔다. 영전 건축 때문에 이견이 있어 첨의와 간극이 생기기도 했으나 점점 누그러져서 지난날처럼 만나고 있었다.

왕은 신돈의 별채 문수암에 들러 함께 예불을 드리면 아늑하면서도 향불이 타는 향기에 위안이 되어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신돈의 독특한 염불 소리와 반야심경의 독경은 왕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므로 자주 찾게 되었다.

어느 날 왕은 집에 들어서다 마당에 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같이 따르던 신 내관이 넌지시 암시를 주었다.

전하를 영판 닮았습니다. 원자 아기씨께서. 신 첨의께서 집을 짓고 나서 모자를 데려와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때 신돈이 마중을 나왔을 때까지 왕은 말없이 모니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름이 모니노냐?”

…….”

왕은 말없이 절을 하는 아이를 향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니노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어른을 올려다보며 절을 하고 웃었다. 왕은 따라왔던 내관에게서 뭔가 받아 왕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노란색이 빛나는 금화였다. 그때 안채에서 반야가 달려 나와 왕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왕 뒤에 섰던 이인임이 왕에게 낮게 모니노의 어미임을 알렸다.

왕은 잠깐 반야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별로 반가운 눈치가 아니었다. 왕은 아이 에게 내밀어 조그만 손에 잡아 흔들어 준 다음 뒤편 문수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과 왕자와의 첫 대면은 좀 싱겁게 별일 아니게 끝났다. 다만 왕이 금돈을 모니노에게 쥐어주면서 상면한 일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환궁하면서 신 내관이 모니노를 입궁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태후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니노의 일을 아뢸 시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자주 송강의 집에 들렸다고 한다. 집을 짓고 나서 낙성 잔치를 할 때 행차한 이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를,

“12월에 왕이 신돈의 집에 행차하였는데 이후로는 자주 행차하였다.” (<고려사절요> 18년(1367. 12월)

<고려사절요> 기록을 보면 왕이 그저 송강의 신하 집을 자주 찾았을 리가 없다. 아마 그 집에서 성장하고 있는 왕자 모니노를 만나기 위해서인 듯하다.

 

신돈은 어느 날 좌시중 이인임에게 의논 삼아 말했다. 충숙왕 때(1318)에 폐지되었던 사심관제를 부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심관은 고려 개국 처음에는 지방 호족을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는 제도였으나 점점 관료화하여 중앙의 관료가 연고지에 내려가는 형식으로 변했는데 폐단이 많아지자 결국 폐지되고 말았다.

이인임은 신돈이 사심관제를 꺼내자 알아듣고 찬성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민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폐지한 제도를 되살리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공론을 거쳐 사심관제 부활을 상소했으나 왕은 신돈이 권력이 커짐을 의심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창녕신문> 11월 15일 자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