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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3)

by 남전 南田 2023. 9. 28.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3)

* 용암산 낙산사와 평양 천도

 

관가나 민간에 퍼진 소문대로 노비나 천민 출신이라 알려진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정권 중심부의 우두머리를 차지한 데 대한 반감이 조정에 널리 퍼졌다. 전민변정도감의 과감한 판결과 처결로 많은 사대부나 권세 잡은 호족이 토지를 잃게 되었거나 농사를 지을 노비를 방면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원성이 이존오와 정추 등의 신돈에 대한 탄핵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존오와 정추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로인해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해져서 조정 중신들과 대간들이 모두 신돈에게 아부하는 바람에 언로가 막혀 버렸다고 <고려사>는 기술하고 있다. 여전히 거센 반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풍년이 들었습니다.‘ 하는 말을 공민왕 15(1366) 9월에 왕이 첨의 신돈과 함께 모니노의 복을 빌러 낙산사에 갔을 때,

가뭄이나 수해로 인해 해마다 재해를 당했는데 올가을에는 곡식이 잘 익어 풍작이라 합니다. 전하.”

하고 스님들이 아뢰었다. 대풍이라는 말에 왕은 즉위한 이래 풍년이란 소리를 듣기 어려웠는데 낙산사 스님들의 대풍이란 말에 반기며 기뻐했다.

용암산 낙산사(洛山寺)는 개경 서남쪽 인근으로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에 있었던 신라 때 세운 고찰이었다.

주) 낙산사 : 동해안 양양 낙산사가 아니라 개경 인근 장단의 사찰.(<신증동국여지승람> 권12. 장단도호부 불우).

신돈이 낙산사 주지 화상에게 은밀하게 모니노의 탄생 경위를 말해 왕자의 원찰로 삼았다. 신돈이 그 후에 왕에게도 아뢰어 용인받았으며 왕도 자주 낙산사에 행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정 중신들이 영도첨의 신돈을 비방하면서 음양이 뒤틀려 풍년이 안 들고 재해가 겹쳐 든다면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영도첨의 신돈이 운관사를 맡고 있는데 올해 기후가 불순하여 재해가 드는 것이 음양의 조화를 잃어서 그런 것입니다.”

뭐라고? 음양이 뒤틀려 한해가 들고 홍수가 났다고? 과인이 일전에 낙산사에 갔더니 스님들과 좌우가 다투어 말하기를 올해는 대풍이라 하였다.”

왕은 첨의의 편을 들어 중신들을 반박하니 더 뭐라 주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첨의에 대한 믿음이 여전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날 공민왕이 행차한 것은 모니노 때문이었다. 낙산사에는 의상 대사가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 있었는데 영험이 많다고 소문이 나서 불자들이 많이 찾아와 참배하고 발원하였다. 왕과 신돈은 영이(靈異)하다는 관음상에 왕자의 장래를 빌었다.

그날 예부직랑 오일악(吳一鶚)에게 신돈이 은밀한 부탁을 했다.

오 직랑! 이 말은 직랑과 나만 알아야 하네. 전하께서 몇 년 전에 궁에서 여인을 접해 원자가 태어났었네.”

? 그런 일이 있었나요? 첨의 대감.”

이인임 대감이나 신소봉 내관이나 제조상궁만 알고 있는 일이네. 앞으로 원자가 잘 성장하여 주상의 후사가 되도록 축원을 하고 싶네. 직랑이 발원문을 지어서 영험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올리고 기원해 줌세.”

. 그러합지요. 성심껏 축원문을 지어 발원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주상께서 이곳에 납시고 대감께서 낙산사를 원찰로 정한 뜻이 여기에 있었군요.”

그러네. 주상이나 노부가 자주 오는 것도 거기에 있다네.”
오일악은 신돈의 부탁을 받고서 앞으로 왕의 후사가 될 왕자 모니노의 앞날의 순탄을 축원하는 발원문을 지어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했다. 낙산사의 일을 기록한 끝에 모니노가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라<고려사절요>에 처음으로 기술되어 있다.

― 모니노는 돈의 비첩 반야 소생이니 우(禑)이다. 주) <고려사절요> 권3. 병오 15년(1366) 9월

오일악은 은밀한 왕자의 출생 비밀을 가장 친한 몇 사람에게 속닥거렸는데 알게 모르게 왕자가 궁인에게서 태어나 민가에서 자라고 있다는 소문이 슬슬 퍼져나가 조정 중신들 중 알만한 사람은 알게 되었다. 오일악은 뒷날 신돈의 당여로 몰려 유배되었다.

 

신돈은 개혁정책을 시행하면서 평양 천도에 대해 이인임, 이춘부과 의견을 나누었다.

개경의 기운이 쇠하였소. 찬성사 생각은 어떠시오?”

! 첨의께서도 그 얘기를 들은 모양이구려. 전하께서 홍건적 난리 때 개경이 안전하지 않다고 진작 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몇 해 전에 한양으로 천도할 생각으로 성곽과 궁궐을 지으려다 그만두셨고 또 개경 성 밖 동쪽 백악(백학산)에도 궁을 지으려 하셨지요.”

태고 화상 보우가 그때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했지요.”

신돈과 이춘부는 왕에게 보우의 한양 천도를 들먹이며 이번에는 평양 곧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왕도가 살아날 것이라 상소했다. 왕은 신돈의 말에 처음에는 귀가 솔깃했다.

당장 평양을 둘러보고 성곽과 궁궐터까지 유념하여 살피시오.”

공민왕 16(1367) 4월에 왕의 명이 떨어지자 신돈은 찬성사 이춘부를 앞세우고 김달상, 임박등 수십 명과 함께 답사를 떠났다. <고려사> 신돈전.

한 달여 걸려 평양을 둘러본 다음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진행되고 있었던 왕비 노국공주 영전공사를 강행하면서 왕은 평양 천도에 대해 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결국 평양 천도는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논란 끝에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면서 신돈의 야심찬 구상은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2023년 9월 21일 <창녕신문>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