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전민변정도감과 민생개혁(1)
* 전민변정도감 쟁송과 처결
신돈은 천명지민본이란 지론을 이루기 위해 공민왕 15년(1365)에 세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야말로 백성을 위한 민생개혁 기관이었다. 전민(田民)은 논밭과 백성을 지칭하고 있으며 변정은 옳고 그름을 참되고 거짓됨을 조사 판정하여 불법과 부정을 바로잡는 기관이란 뜻이니 전민을 불법으로 탈취한 권력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요 백성들에게는 반갑고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도감이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임시기관들의 명칭이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후 개혁에 착수하면서 논밭과 양민의 탈점을 시정하기 위한 도감을 설치하였지요.”
신돈의 말에 찬성사 이인임이 긍정했다. 같이 앉았던 찬성사(나중에는 시중) 이춘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맞아요. 세도를 부리던 자들이 마구 공사전(公私田)을 뺏고 점유하고 횡포로 양민을 잡아서 노비로 삼았지요.”
이춘부 곁에 앉아 있던 전의령 임박(林樸)이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돼 문란했던 농지 탈점과 노비제도에 대한 폐해를 이야기했다. 전의령 임박은 유생으로 과거 급제 출신이었지만 이인임과 함께 신돈의 개혁정책과 신진 사류(士流) 현량 등용 추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신돈이 무겁게 결단하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변정도감을 개설하여 전민의 탈점을 고쳐야겠소. 권세가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갖은 횡포로 수탈하고 양인을 괴롭혀 노비로 삼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바로 잡아야겠소. 그게 백성의 민생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겠소? 나는 앞으로 양인이 되려는 노비는 모두 그들 소원대로 자유를 주어 천민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소.”
“영도첨의께서 거기까지 생각하시군요. 감동입니다.”
신돈을 비롯해 찬성사 이인임, 이춘부, 임박 등이 논의해 임금께 상소문을 올리기로 작정하였다. 신돈은 권세를 잡고 있는 무장이나 문신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달래기 위해 유생 출신 임박과 문신인 이춘부 이인임 등을 내세운 것이기도 하였다.
“압량위천(壓良爲賤) 등의 방법으로 대농장을 일구기 위해 노비를 많이 쓰다니! 그 같은 문란상을 진작 해결하려 했는데 여태까지 해결하지 못하였으니 당장 변정도감을 설치 결행하시오.”
공민왕은 상소문을 보고서 당장 시행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인임과 이춘부가 판사를 맡아 처결하도록 하며 전의령 임박이 도감의 도감사(使)를 맡아 제조(提調) 신돈을 보좌해 도감의 종합적인 사무를 담당하게 하니 세 사람이 많은 쟁송을 판결 처단하도록 하였다. 좀 해결하기 힘든 쟁송이 생기면 제조가 판결하기로 하였다.
당장 방(榜:포고문)을 작성하여 송도(개경)와 전국 요지의 관아에 내걸었다.
<고려사> <신돈전>의 기록은 많이 사실과 다르나 유일하게도 전민변정도감에 대한 기록은 왜곡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당시의 실정을 기술하여 진실에 접근된 방문이었다.
― …… 豪强之家, 奪占幾盡. 或已決仍執, 或認民爲隷 ……,
― …… 권세 있는 가문들이 거의 다 점탈해 버렸다. 반환하라는 결정이 내렸는데도 그대로 붙들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양민을 노예로 만드는 경우로 있다.
― 권세 있는 가문에서 탈취하여 점유하고 있는 토지나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한바 있었으나 상당수가 자작농의 토지를 불법으로 탈취 점유하거나 여러 사유로 양민을 얽매서 강제로 노비를 만들고 있다 …….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 도감을 설치한다는 취지의 방문(공고문)이었다.
개경은 15일 이내, 여러 도에서는 40일 안에 과오를 스스로 알고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이 지나서 이행하지 않은 자가 발각되거나 망령되게 거짓을 호소하는 자는 죄를 물어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조처를 적어서 공고된 것이었다.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자 권세가들은 목을 움츠렸다. 또 불법으로 노비로 삼은 자를 양민으로 방면 놓아주라는 포고령에 억울하게 당한 백성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방문을 읽고 소문이 퍼지자 그간 얼마나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많았는지 도감 앞에는 소장(訴狀)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도감의 설치와 쟁송 처결을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기뻐하였다”고 하였다.
― 전민추정도감을 설치하고 신돈을 판사로 삼았다. 이에 권세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많으니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기뻐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9권, 병오15년(1366) 5월)
억울하게 권문 세력가에게 빼앗긴 토지나 원통하게 노비로 전락하게 된 백성들에게는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모든 노비를 해방해야 한다는 신돈의 지론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세력도 있을 것이 예상되어 개혁의 추진이 만만찮았다.
<고려사> <신돈전>에는 신돈이 ‘스스로’ 판사 자리에 앉았다고 비난했으니 권세가와 부호들의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 旽請置田民辨整都監, 自爲判事,
― 신돈이 왕에게 건의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후 스스로 판사 자리에 앉아……
비록 신돈이 긴 관명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그가 개혁을 밀어붙이자면 그 또한 반대하는 권문세가의 세력을 설득하거나 이겨야 하므로 민심이나 중신들의 여론을 귀담아듣고서 개혁의 추진 속도나 방향을 조절해야 할 일도 있기 때문이었다. 강성을과 사촌인 전의시 시승 강거실(姜巨實)과 감찰대부 손용(孫湧)으로부터 민심과 여론을 들었다.
<고려사>에는 감찰 손용이 신돈에게 “매일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창녕신문 > 2023. 8. 16.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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