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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4)

by 남전 南田 2023. 8. 4.

낙동강

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4)

 

* 봉선사 송강의 집 화엄종사 천희국사

 

신돈은 드디어 자신의 집을 지었다. 공민왕 16(1367) 왕사가 된 지 2년 후였다.

기현의 집에 기숙(요즘 말로 하면 하숙)하면서 궁을 오갔는데 봉선사 송강(:솔밭언덕)을 지나다녔다. 송강에는 왕이 자주 다니는 격구장이 있었다. 좀 떨어진 서남쪽에 집터로 쓸만한 빈터가 있었다.

전하! 기현의 집에서 다니다 보니 마침 좋은 집터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작은 집을 지으면 노복이 왕래하기에 편할 듯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아! 첨의가 집이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며 몸을 눕혔으니 과인도 마음이 썩 안 좋았소. 당장 과인이 허락할 터이니 집을 지으시오.”

그런데 신돈의 집 짓기에 대해 고려사에는 좀 억지소리가 있다. 집을 짓는데 단 며칠이 걸렸다는 소리는 믿을 수가 없다. 며칠 만에 지은 집이 널찍(크고 넓을 굉)하고 깊숙하다(깊을 수)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굉창(宏敞)하고 심수(深邃)하다고 하였으니 더욱 믿을 게 못 된다.

― 旽分其黨, 督役不日而成, 宏敞深邃.

― 신돈이 자기 패거리들에게 일을 분담시켜 독려한 결과 며칠 안에 완공되었는데 널찍하고도 깊숙하게 지어졌다.”

집터나 집의 규모가 건물이 여러 채인 명문 대갓집처럼 호화롭고 웅장하지는 않고 간소했다. 그저 쓸모 있게 짓게 하였다. 같이 살 식구도 별로 없고 부릴 노비도 없으니 규모가 크지 않아도 되어 안채와 사랑채……. 자그만 선방을 안채 뒤에 지었다.

그 집이 엄청 크고 화려했다면 신돈에 관한 일이라면 악의적으로 과대 포장을 하던 사람들이 아마 더욱 세세하게 묘사하였을 터인데 애매모호한 말로 그쳤다. 새집이 그리 내세울 만큼 고대광실 대궐 같은 집이 아님이 틀림없다.

북원의 별채 선방은 암자처럼 지어서 신돈이 불상을 모시고 예불을 드릴 수 있는 작은 집이었다. 앞으로 거기서 분향하며 숙연히 홀로 앉아 큰소리로 목탁을 치며 염불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예불과 수행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10월에 왕이 집 신축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행차하여 잔치를 벌리기도 했다.

왕은 시중에서 떠도는 말을 생각났던 문수보살을 들먹이며 선방을 文殊庵이라 지어주었다.

기현 내외는 들락날락하며 새집에 소용되는 세간살이를 들였다. 방문객이 끊이지 않아서 최사원과 기현 내외가 문전에서 교통정리(?)를 하기도 하였다.

역시 고려사기록에는 기현 부부가 여종 둘을 바치고 그 후에는 충복처럼 집사 노릇을 해 신돈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뇌물을 주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했으니 이 또한 기현 부부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위세가 대단했던 것처럼 횡포와 권세를 부렸다고 왜곡해 부풀린 것으로 보인다.

 

보우국사와 선종 세력뿐만 아니라 왕의 측근이며 조정 중신들의 비난도 심했었다. 심지어 편조를 잡아 죽이려 하는 세력도 나타나기도 했었다.

보우국사는 편조가 왕사가 되고 정권의 중심에 서자 보기 싫다며 스스로 물러나 전주 보광사로 가버렸다. 그래서 왕은 보우 대신 국사로 모실 고승을 천거하라고 하였다.

그럼 선종의 보우대사보다는 화엄종의 대가를 국사로 모셔야겠소.”

그는 원나라를 다녀와 치악산에 머물고 있는 설산 천희(雪山 千禧 : 1307~1382) 대사를 국사로 추대하였다. 신돈과 같은 화엄종 승려인 천희 대사에 대해 자세히 그의 수행과 득도 과정을 왕에게 아뢰었다.

천희 대사는 일비대사 밑에서 득도하였으며 목암 체원 화상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편조왕사도 체원 화상에게 배웠다고 했지요?”

. 천희 대사는 선지에도 널리 통달하였고 중국에서 성안사의 만봉 시위(萬峯時蔚)를 만나 가사와 선봉(禪棒)을 받고 돌아왔었지요.”

훌륭한 고승이구려. 국사로 모시면 좋겠소.”

신돈은 왕사로 천희 대사의 제자 경남과 선현 대사, 영산현 출신 나옹 혜근 스님 등을 추천하였다.

혜근은 연경 법원사에서 소승과 함께 인도승 지공선사로부터 배웠으며 10여 년 만에 돌아와 여러 해 용문산과 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로 있습니다.”

공민왕은 1367년에 개경 이점의 사찰 불복장(佛腹藏)에 있었던 천희대사를 찾아가 만나보고 국사로 봉하기로 했다.

왕은 천희대사에게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선교도총섭·전불심인·대지무애·성상원융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선현 대사를 불러 강안전(康安殿)에 맞아 왕사로 봉했다.

보우가 권문세족 중심인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었다면 새로 국사로 추대된 천희대사는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지방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신돈의 꿈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혜근은 후에 천희국사와 함께 선교의 공부시관을 맡기기도 했으며 좀 늦게 왕사로 봉해지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천희대사를 국사로 봉한 데 대한 일을 조금 삐딱하게 천희가 스스로 고승이라 왕에게 뽐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돈이 왕을 처음 알현했을 때 스스로 득도했다고 큰소리쳤다는 기록과 대동소이하다.

― 승려 선현과 천희는 둘 다 신돈과 친한 사이로, 천희가 스스로 중국 강절 지방으로 가서 달마의 법을 전수 받아 왔다고 뽐내자 …… 곧이어 국사國師로 봉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

 

이후 문수회(文殊會) 법회가 일곱 번이나 열렸다. 신돈의 꿈 그대로 불도의 대중화가 일단 시작이 된 것이라 보면 된다. 문수회 법회나 연등회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천민이나 노비까지도 참례하도록 하니 수만 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문수법회 등에 남녀를 차별하지 않자 부녀자들이 감동해,

편조 왕사님은 문수보살의 후신이로구나.”

하고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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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신문> 2023. 7. 28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