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2)
*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과 모니노 탄생
공민왕 14년(1365년) 2월,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아이와 함께 타계하였다.
왕비의 죽음은 왕에 큰 좌절을 안겼다.
아들을 낳기 바랐던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 또한 큰 법이라 했던가. 공주의 타계는 왕에게 참을 수 없는 큰 좌절과 슬픔을 안겼다. 비통에 젖어 장례를 지내고 나서도 죽은 공주를 그리워하고 잊지 않으려고 했다.
공민왕의 비탄을 <고려사절요> 제20권, 을사14년. 4월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 먹으면서도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왕의 슬퍼함이 극에 달해 온전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만사를 잊고자 하자 신돈이 그 슬픔을 멈추게 하려고 여러 말로 위로했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왕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두 가지 있었으나 비탄에 빠진 왕에게는 귀에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태기가 있었던 강반야와 궁인 한씨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우왕 모니노가 태어난 때가 난산으로 왕비 노국공주가 타계한 지 다섯 달 후인 7월이었다.
― 주) 우왕 : 공민왕 14년 7월(1365) 출생~ 공양왕 1년(1389) 사망
“상감마마! 궁인 한씨에게서도 또 편조 왕사의 질녀 강반야에게서도 왕손을 보았답니다. 기뻐하십시오.”
환관 신소봉, 제조상궁 엄씨와 신돈이 왕자가 태어났음을 공민왕에게 알렸으나 공민왕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큰 슬픔에 매몰되어 만사가 귀찮아진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반가운 기색 없이 무심하게 말했다.
“유모를 구해 아이들을 키우라.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그들을 입궐시키지도 말고. 태후께는 과인이 천천히 아뢸 것이다. 그때까지 원자를 안가에 머물게 하라.”
“아명이라도 지어주시지요.”
신돈과 이인임이 조심스레 권했다. 이인임이 재차 환기시키자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강반야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모니노라 부르게. 궁인 한씨에게서 난 아이는 율이라 하고.”
그뿐이었다. 우왕의 어릴 적 이름 모니노(牟尼奴)는 '모니'는 석가모니의 모니, '노'는 노비 노(奴)이니 곧 석가모니의 종이란 뜻이었다.
《고려사》 <신돈전>에는 태어난 아이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왜곡하였으나 신돈의 참형을 집행한 찰방사 임박은 궁인의 소생인데 일곱 살이라고 사관들에게 확실하게 말했으니 이인임 외에 임박도 임금과 강반야와의 궁중 시침과 임신 과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신돈의 비첩 반야가 모니노를 낳자 왕이 자기 자식으로 오인했으며, 이 아이가 뒤의 우왕으로, 아지는 모니노를 가리킨 것이다.
위의 기록처럼 《고려사》에 모니노가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였고 또 《고려사절요》 제30 <신우전>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인데, 신돈의 비첩 반야 소생이다…… 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임박의 증언은 위의 기록과 다르게 왕의 소생임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 上幸宮人生子, 今已七歲, 旽潛養之, 不使國人知,
― 주상께서 궁인을 가까이 해 왕자를 낳았는데 지금 일곱 살로 신돈이 몰래 기르면서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으니…….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씨는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곧 저세상으로 갔고 갓난아기도 잇따라 그때 유행했던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모니노는 승려 능우의 어머니가 맡아 길렀다. 능우 스님은 신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고려사절요》에는 임신한 강반야를 “얼치기 중 능우에게 부탁하여 능우 어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낳게 했다.”고 기록해 능우 스님을 얼치기 중이라 깎아내렸으니 한심한 일이다.
태어난 직후 지인주사 전수의 처와 장씨(張金莊)로 유모가 둘이 되었다. 공민왕은 자신의 아들 육아에 통 무관심할 수 없었든지 신 내관에게 명했다.
“강반야에게 매달 쌀 30섬을 내주거라. 아기를 키우려면 필요할 것이니라.”
“예, 명대로 시행하겠나이다.”
― 처음으로 신돈의 첩 반야에게 매월 쌀 30석(石)씩 하사하였다. (《고려사》 41, 세가 41, 공민왕 17년 9월 丁巳)
왕의 무관심과 버림이 후일 모니노가 우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으나 이성계 일파의 조선 왕조 역성혁명 과정에서 시비와 빌미 삼기에 충분하여 우왕이 신돈의 비첩 자식이라는 근거로 써먹었으며 《고려사》에는 끝까지 신돈을 요승이니 간신이니 매도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면 누구의 여종이니 첩이니 하는 기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돈은 옥천사를 떠나서 개경에 와서 공민왕을 만나기 이전부터 집도 일정한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객승(客僧)이었거나 행각승으로 거리를 다니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권연)에 열심이었던 화엄종 고승이었다. 그러다 고아와 부녀자 구제를 하면서 절 인근에 구호소를 차리고 암자라 칭하면서 그곳에 지냈다. 그러다 왕사로 봉해지면서 밀직 김란의 집에 기숙하게 되었는데 재산이라곤 일의일발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일정한 잠자리 없이 떠돌던 승려가 언제 어떻게 여종을 부리며 또 첩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불가능한 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돈이 남의 집에 우거(寓居)하다가 자신의 집을 짓고 살게 된 시기가 모니노 출생 2년 후였다. 그런데 모니노 출생 이전에 여종을 부리고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모함이 아닐 수 없다.
<창녕신문> 2023년 6월 26일 연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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