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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7장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5)

by 남전 南田 2023. 6. 6.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7장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5)

 

* 편조왕사 청한거사 신돈

 

공민왕의 강권으로 편조가 왕사가 되었을 때 왕은 당장 그의 속세의 성명이 무엇인가 물었다.

왕사의 속명이 무엇이오? 앞으로 조정에서는 승명보다는 속명을 썼으면 하오.”

! 소승의 속성은 영산 신가이고 조부님께서 지어준 이름인데 밝은 돈()이라 합니다.”

신돈이라……? 편조나 돈이나 다 세상을 밝게 해준다는 뜻이로군. 과인이 앞으로 속명을 부르면서 또 법호를 청한거사(淸閑居士)라 부르겠소. 왕사는 탐욕이나 사념(邪念)이 없어 맑고 깨끗하며 한가하니.”

예에. 감사합니다.”

이제 그 허름하고 낡은 승복을 벗고 과인이 새 가사 장삼을 내릴 터이니 갈아입으시오.”

낡은 승복 얘기에 편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소승은 옥천사에서 올라온 후 탁발승으로 거처가 없이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지냅니다.”

재산이 단벌옷에 바리때 밥그릇 하나뿐이라……, 일의일발이라? 허허허. 그런 가난도 없구려?”

스님들이 무슨 재산을 가지겠습니까? 다 그렇게 지냅니다.”

아니요. 과인이 듣기로는 큰 재산을 가진 승려들도 많다고 합디다.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시주를 많이 챙겨 축재한다던데?”

소승은 고아와 부녀자를 구제하려 지은 암자에 머물러서 통 새 승복을 마련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단벌이었지만 저에게는 편하고 행각승으로 탁발하며 거리에서 불도를 전하기 편했습니다.”

앞으로는 탁발 노릇도 그만하시오. 신 내관을 시켜 마땅한 가문의 집을 구해주라 하겠소.”

왕은 신 내관을 시켜 궁 근처에 편조가 머물 집을 찾게 하였다. 그 바람에 편조는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이며 서북면병마사를 지낸 홍건적 퇴치 이등공신이 된 밀직 김란(金蘭:?~1371)의 집에 기숙하게 되었다. )

) 기숙(寄宿) : 남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함.

그때까지 개경의 사찰이나 난민 규휼을 위한 암자인 극락암이나 연화암에서 지냈는데 그제야 버젓한 숙소(하숙집)로 옮긴 셈이었다.

공민왕 14(1365)이었는데 김란에 대한 <고려사>의 평도 썩 좋지 않다. 역시 신돈과 연관된 인물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조롱하고 왜곡 깎아내렸다.

― 十四年, 旽主密直 金蘭家, 蘭有城府, 好毁譽人, 以二處女與之.(고려사 신돈전)

― 신돈이 밀직(密直) 김란의 집에서 기식하고 있었는데, 김란은 의심이 많고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로, 자기 딸 둘을 신돈에게 주었다.”

김란은 신돈의 생활 편의를 돌보기 위해 두 딸을 시중을 들게 하였던 모양인데 후일 시비가 생겼다. 그의 두 딸을 신돈의 처소에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두 딸이 시침(視寢) 했느니 (: 주다)”나 납(: 바치다) 했느니하고 <고려사절요><고려사>에 기록해 신돈의 명예를 깎아내렸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시침(視寢)은 단순하게 시중드는 것으로 방 청소나 침구를 정돈하는 정도로 함께 왕을 모시고 잠을 잔다는 시침(侍寢) 또는 천침(薦枕)과는 전연 다르다. 더더구나 왕도 아닌 신돈에게 시침이란 단어를 써 독자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김란이 딸을 바쳤다거나 신돈이 거두었다는 뜻 ()하였다또는 두 처녀를 ()했다고 슬쩍 고쳐졌으니 참 믿을 게 못될 기록일 뿐이다.

 

왕사를 봉하는 예식 불사가 거행되었다. 그동안 편조를 따르며 도와준 천정, 철관, 능우, 현조 스님을 비롯하여 개경의 여러 사찰 주지들이 초청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백관들이 조복(朝服)을 입고 열을 지어 서서 축하하니 예식은 더한층 돋보였다. 예불이 진행되고 비록 왕이지만 왕의 스님(왕사)을 모셔야 하는 자리인지라 전해 내려오는 관행대로 왕과 높이가 비슷한 상석에 편조를 자리하게 하고 임금이 구배(九拜)를 올리는 예식도 진행되었다.

 

개혁을 준비하면서 편조 왕사 신돈은 길거리에 나가 여전히 탁발승의 일을 계속했다. 등청할 때는 관복을 입었으나 집에 돌아오면 승복을 입고 경문을 읽고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였다. 관청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극락암이나 관음암에 가서 스님들에게 반야심경 등 불경을 가르치며 예불하니 곧 승려 생활을 외면하지 않았다.

 

요승 편조로 사부를 삼아 국정을 자방(咨訪)했다<고려사>의 기록과 함께 탁발승으로 개경을 돌아다닌 일을 헐뜯었다. 편조를 신승이라 소문이 나면서 설법을 들으려고 온 사대부의 여자들을 꾀어 간음했다고 음해 비방하고 있다.

― ……稱爲師傅, 咨訪國政, 言無不從, 人多附之. 士大夫之妻, 以爲神僧, 聽法求福而至, 旽輒私焉.

― 왕은 그에게 ……사부라고 부르면서 국정에 관한 일은 모조리 그의 의견에 따라 처리(자방)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빌붙게 되었다. 사대부의 처들도 그를 신승(神僧)이라 부르면서 설법을 듣고 복을 빌려고 찾아왔는데 신돈은 매번 그 여자들을 간음하곤 했다.

 

신돈의 제일 처음 처결로 사냥으로 물의를 빚은 찬성사 최영(崔瑩)이 월성윤(지금의 경주)으로 격하되어 내려간 기록이 공민왕 14(1365) 6월에 있다. 신돈이 국정을 장악하여 최영 등 훈구세력을 축출하기 시작한 시기이니 왕사가 된 지 1년쯤 지난 때였다.

그때가 왕이 아주 사랑했던 왕비 노국공주가 해산을 하다가 난산으로 아기와 함께 죽고 말았던 2월 이후였다. 그러니 본격적인 신돈의 개혁이 준비단계를 거쳐 그해 6월경에 시행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

<창녕신문> 2023년 5월 29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