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남전과 함께
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7장 사구아 아구사(3)

by 남전 南田 2023. 5. 3.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7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3)

* 공민왕 편조를 왕사로 청하다

 

공민왕은 세 여인의 잇따른 수태 소식에 너무나 기뻐 당장 편조를 왕사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단순히 수태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그러지 않았다. 왕은 편조가 중국까지 순력하며 불도의 정수(精修) 수행으로 득도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솔직하며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아무런 세력이 없음을 오래전부터 높이 사고 있었다.

<고려사> 신돈 열전에 왕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즉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도를 깨우쳤노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 모두 왕의 뜻에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견으로 조롱 비방하는 말이 섞이긴 하였으나 그 이면을 읽으면 왕을 만난 편조(신돈)의 참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왕이 평소 불교를 신봉한 데다 꿈에 현혹되어 …… 불러들여 함께 불교의 교리를 논하곤 했다.“는 기록은 공민왕과 편조에 대한 진실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편조를 만나 반야심경의 중심인 ()”에 대해 토론하였다는 담공(談空)이란 기록을 보면 불도에 대한 깊은 상식을 갖고 있었던 왕이 편조의 불교 경전에 대한 심도를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왕의 시험이었으며 흡족한 응답으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때 왕과의 토론 담공으로 득도한 높은 경지의 고승임을 인정받아 왕이 편조를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편조의 복색이 남루하고 사시사철 낡은 승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거짓으로 초라한 모습을 꾸며왕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고 비방하기도 하여 편조를 깎아내렸다. 스님들은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서 대체로 장삼 한 벌 검소한 복색으로 지낸다. 떨어지면 기워 입고 때 묻고 낡아도 납의(衲衣)를 그냥 입었다. 그런데 <고려사> 편찬자들의 왜곡 또한 심해 편조의 파납 곧 낡은 장삼도 곱게 넘기지 않고 걸고 넘이지며 조롱했다.

 

왕은 편조에게 국사나 왕사를 맡아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 당시 국사나 왕사 지위에 오르면 주요 사찰의 주지 임명이라든지 불도와 관련된 일을 담당 처리했다. 또 국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정의 정사는 기본적으로 유생이나 무인 출신 관료들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지만 고문 역할도 겸했다.

공민왕은 편조 대사가 국사고 왕사고 맡을 엄두를 내지 못하자 그것이 보우국사 때문이라고 깨달았다. 보우국사와 그 제자들이 편조를 하루 이틀을 멀다 않고 요승이라면서 자주 비방하고 비웃으며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고 왕에게 멀리하라고 계속 진언했다.

일찍부터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보우국사는 임금의 친어머니인 명덕태후와 같은 남양 홍씨 가문 출신으로 권문세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보우는 왕에게 대놓고 몰아붙이기를 편조를 사승(邪僧)이라 비방하고 있었다. 요새 말로 하자면 사기나 치고 돌아다니는 땡중이란 뜻이었다.

전하께서 잘 살피시어 편조를 멀리하시면 종사에 다행함을 얻을까 합니다.”

하고 보우가 공민왕에게 신돈에 대해 혹평했다. 신분 차별을 않고 누구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편조의 주장이 보우에게는 자신이 주장하는 참선 수행만이 옳은 불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것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편조가 주장이 바로 불도(불교)의 대중화였다. 곧 편조의 꿈이었다. 누구나 부처님 앞에서는 평등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불공드리고 예불에 참석할 수 있다고 길거리 권연(포교)에 나서면 줄곧 외치는 말이었다. 길거리에 나서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크게 하면서 권문세가를 옹호하는 보우의 세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니 편조를 요사스럽고 엉터리 중놈이니 가짜 중 사승(詐僧)이라고 몰아세운 것이었다. 보우는 편조를 용납할 수 없었다. 8.5

 

드디어 왕의 내략이 떨어졌다. 새롭게 국사를 임명하겠으니 고승을 추천하라는 명이었다.

장애물이 사라지게 되면 천명지민본(天命之民本)이라는 편조의 꿈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보우와 김속명의 말을 듣고서 편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태후와 왕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고 태후는 편조의 집권 내내 불만을 품고 사사건건 시비를 했다.

공민왕은 단순한 왕사 직만을 고수하려는 편조에게 조정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며 숙정을 단행하고 민생 문제를 처결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제 왕사가 되면 조정의 정사에도 관여해주오.”

권문세족이나 정치세력으로부터 편조가 독립되어 있다는 점을 왕은 높이 샀다. 거기다 대사가 자신의 개혁구상을 실현할 만한 능력을 갖춘 강직한 인물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절대 권력까지 편조에게 맡기겠다고 단언했다.

<고려사> <신돈전>에는 이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 請旽以屈行救世, 旽陽不肯, 以堅王意……

― …… 신돈을 만나게 되자 그가 득도하여 욕심이 적은데다 미천한 출신이라 가까운 무리들이 없으니 큰일을 맡기면 사정(私情)에 얽매이지 않고 반드시 뜻대로 일을 추진할 것으로 믿고서 마침내 승려인 그를 발탁해 주저 없이 국정을 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편조는 사양했다. 강성을이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성님! 성님도 왕사로 정권을 잡으면 참소를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놈이 성님을 올가미에 함정에 빠트릴지 모르지요.”

설마 전하께서 그렇게 몰인정하시겠나? 사리 판단이 분명할 텐데.”

알 수 없습니다. 신 내관의 생각도 저와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이란 말이로구나!”

편조는 신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하가 비열한 모함에 잘 넘어간다고 신소봉 내관이나 이인임 찬성사가 말합디다.”

그러네. 수종했던 최측근 공신들도 죽였지…….”

하여간 조심하이소. 전하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됩니다. 권세를 잡는 것은 좋은데…….”

 

* <창녕신문> 2023. 4.26.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