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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제7장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4)

by 남전 南田 2023. 5. 19.

옥천사지에 남아 있는 석축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7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4)

 

* 사구아(師救我) 아구사(我救師)

 

공민왕은 10여 년 정사를 처결해 오면서 매사 왕의 뜻을 무시하거나 명을 받들지 않는 조정의 무관과 문신들에게 크게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당파를 지어 서로 밀고 끌어당기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그것을 편조가 왕사가 되어 말끔히 처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공민왕은 편조를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공리(空理)를 논하였다. 왕의 탄식에 편조도 동의했다.

한미한 편조가 왕의 마음에 꼭 들었다.

공신이나 측근도 아니요, 병권을 쥔 무장도 아니요, 조정안에 어떠한 세력에 예속되지 않은 개경이 아닌 시골 가문의 스님이니 그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 틀림없었다. 무능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중신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왕의 명에 충성 순종하고 과감하게 처결해 줄 신하를 옆에 두고 싶었다.

과거에 같은 해 급제하면 동방(同榜)이라 무리를 짓기 시작해 서로 좌주니 문생이니 하면서 상호 관직 청탁을 일삼고 있다오. 중신들의 문생이 생기니 마침내 온 나라가 그들 도적 떼로 가득 차게 되었오.”

공신이나 측근도 아니요, 병권을 쥔 무장도 아니요, 조정안에 어떠한 세력에 예속되지 않은 스님이니 그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 틀림없었다. 무능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중신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왕의 명에 충성 순종하고 과감하게 처결해 줄 신하를 옆에 두고 싶었다.

 

편조는 자꾸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전하가 의심과 시기가 많아 화를 입을까 염려됩니다.”

하는 강성을의 걱정이 자꾸 상기되었다. 어쩌면 그도 어느 날엔가 왕의 존엄을 해쳤다는 오해나 조그만 일로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누구처럼 해명도 변명도 사실 조사조차 하지 않고 처형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니 단단히 다짐을 받고 싶었다.

우짜든지 친필 서약서나 각서 같은 것 받아 놓으이소.’ 하던 강성을의 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으니!

후일! 김속명과 반대파들의 모략과 계략으로 그가 반역에 몰려 참형을 당할 줄 편조는 꿈에도 몰랐다. 당사자에게 한마디 변명할 기회조차 왕은 주지 않았고 비정하게도 반역자로 몰아버릴 줄 편조는 이때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성을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는데……. 그에게 그ㄹ런 일이 닥칠 줄이야. 편조는 왕에게 청했다.

전하! 소승이 듣기로는 대신들이나 임금께서 참소와 이간질하는 소리를 잘 듣는다 합니다. 앞으로 소승이 조정일을 맡으면 반발과 모함, 비난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전하께서 이를 막아 주셔야 합니다.”

왕이 보호를 하겠다는 다짐과 약조를 하여야 조정일을 맡겠다고 하자 왕은 물끄러미 편조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앞으로 편조의 오른팔 왼팔 역할을 할 찬성사 이인임과 전 도첨의평리 이춘부(李春富)가 있었다.

왕에게 약조를 받겠다는 좀 불손한 스님의 언사에 둘은 조마조마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침묵하던 왕은 흔쾌히 편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연하오. 과인이 부처님께 맹세하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왕은 그러면서 붓을 들어 맹사(盟辭)를 다음과 같이 썼다.

師求我 我求師

대사는 과인을 구하고 과인은 대사를 구할 것이다.

왕은 숨을 가다듬고 다음 글을 이어 썼다.

生死以之 無惑人民 佛天證明

사생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것으로 남의 말에 현혹되지 않겠노라. 부처님께 증명하노라.)

) “는 곧 師僧으로 스승이라기보다 고려 때는 스님의 존칭 대사(大師). 佛天 : 석가모니 존칭

<고려사> <신돈전>에 조금 삐딱하지만 왕이 신돈에게 수행을 그만두고 세상을 구하라고 요청하자 신돈은 거짓 사양하는 체 함으로써 왕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하고 신돈의 머뭇거림과 공민왕이 서약하게 된 경위를 어느 정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왕이 억지로 떠맡기자 신돈은,

일찍이 듣자오니 임금과 대신들은 참소와 이간질을 잘 믿는다던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셔야 세상이 복되고 이롭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넘어간 왕은 손수,

사구아 아구아…… 부처님 앞에 맹세하노라.”라는 글을 썼으며 이후 그와 함께 모든 국정을 의논했다.

 

왕의 측근에 있던 이인임과 이춘부는 마주 보며 의미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민왕은 즉위한 이후 몇 번이나 반원, 숙청 등 개혁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려왔는데 이제 편조를 만났으니 좋은 기회라 여겨 전폭적인 권력을 맡기기로 작정했다. 이때가 공민왕 14(1365)이었다.

왕사가 되면서도 거리에 나서서 탁발해서 고아와 떠돌이 부녀자를 구휼한다는 소문이 더 널리 퍼지자 많은 독지가가 나서서 보시하였다. 그 덕분에 극락암과 연화암 외에 은적암, 관음암 등 암자 두 곳이 더 늘어나 구호소인 암자가 4곳이 되었다. 모두 절 인근에 자리 잡은 암자들로 근처 사찰의 소속이 되도록 조처해 현조, 능우와 천정과 철관 스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신돈의 불도 전파와 구제를 비딱하게 기록했다.

― 旽目不知書, 常遊京都, 勸緣誑誘諸寡婦, 售其奸淫. (고려사 신돈전)

― 신돈은 글도 모르는 주제에 늘 도성을 오가면서 불법을 전파하는(권연) 척하며 과부들을 허황한 말로 꾀어 정을 통했다.

 

2023년 5월 10일자 창녕신문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