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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1)

by 남전 南田 2023. 6. 24.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 / 

제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1)

관룡사 석문

*** <창녕신문> 2023년 6월 12일 연재분

8장 편조왕사 신돈의 개혁(1)

 

* 개혁과제와 현량 등용

 

왕사로 정식 임명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불러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숨김없이 풀어 놓았다. 그 자리에는 앞으로 신돈의 개혁정책을 맡아 추진할 찬성사 이인임과 전 도첨의평리 이춘부가 있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왕명이니 차질이 없도록 추진하라고 했다. 곧 왕은 배후에서 조종하며 신돈의 개혁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신뢰할 것이니 과감하게 실천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두 가지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하나는 끼리끼리 작당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기득권 세력인 조정 중신을 걸러내는 인적 쇄신이었는데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새로운 관료들의 발탁으로 혁신하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민심을 얻는 정책을 펴라는 것이었다. 현량 등용으로 신진 세력 양성과 민생안정을 도모하는 민심 수습은 모두 어려운 난제였다.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과 달리 신돈의 개혁을 지지하여 조정 관원으로 많이 등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치는 권신들이 움켜쥐어 사회 전반에 정의로움은 파탄이 나 있었다. 내정은 국정을 농단하며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크게 독점하고 백성들을 그들의 노비로 만들었으며 사찰 등 종교 세력들 역시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평민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었다. 오늘날 말로 하자면 갑질의 시대라 할 것이었다.

 

왕과 신돈 둘은 며칠을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이인임과 이춘부가 배석해 신돈의 정사 참여를 적극 지지하고 도왔다. 왕은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말했다.

과인의 정사를 방해하는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인 벌족과 친당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는 세신들을 뿌리 뽑아야 하오.”

세신 대족들의 낡은 인습의 폐를 과감하게 혁파하기 바라오.”

왕은 중신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추며 충신 여하를 가리며 처결하기를 명했다. 이춘부가 왕이 거명하는 자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즉 요즘 말로 하면 혁명적인 개각을 단행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신돈은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춘부와 이인임이 신돈과 논의한 후 왕에게 아뢰었다.

옥에 갇힌 죄수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추정도감을 설치하여 형부에서 처결하면 좋을 듯 하나이다.”

그리하시오.”

왕은 왕비의 순산을 위해 추정도감을 설치해서 기존 형옥의 판결을 심사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주청에 왕은 곧 그것이 선정이라 생각해 허락했다.

억울하게 처벌당한 죄인들을 심사해 무죄이면 사면 방면 처결해 민심을 수습하고자 설치한 임시 기관이 형인추정도감이었다. 추정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 이듬해(1366) 설치되는 전민변정도감과 비슷하였다.

 

이인임, 이춘부와 더욱 친밀하게 상의해 그간 밀려나 한직에 있는 자와 신진 사대부를 대거 기용하게 되었다.

그는 찬성사 이인임과 전 도첨의평리 이춘부를 도첨의찬성사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공신이며 도첨의시중 류탁(柳濯) 등에게 모든 정사를 의논하면서 시중으로서 도당 처리를 먼저 맡겼다.

주) 도당(都堂): 궁 밖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의정부

 

그리고 신돈이 기숙하고 있었던 집 주인 김란과 유배당하고 면직되어 초야에 있던 임군보를 밀직부사에 복직시키고, 왕이 연경에 있을 때 호위로 있었던 공신이었으나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하여 향리 부처되었던 목인길을 첨의평리로 불러올려서 세 명을 궁 안의 각종 사무를 처리하도록 왕과 의론해 정했다.

이춘부를 도첨의찬성사로 임명하여서 신돈 곁에서 정사에 관한 모든 일을 논의하도록 하였으며 도당의 이인임, 궐 안의 김란 둘에게 전하여 처결하도록 했다. 곧 이춘부는 왕에게 신돈의 뜻을 전달 거중 조정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이춘부는 도당에서 논의되는 일이나 궁 안의 일들을 신돈과 논의하기 위해 아침 일찍 기숙하고 있는 김란의 집에 들렸다. 자연히 세 사람이 조반을 같이 들며 조정 대사를 거론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신돈 집권기 동안 계속되었다.

또 과거에 급제한 전의부령 임박(林樸)에게 신뢰를 보내면서 차자방 지인 중임을 맡겼다. 임박은 얼마 후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을 때 도감사를 맡기도 하였다. 임박은 신돈의 숙정과 개혁정책을 적극 찬성하여 동참하였는데 지인이 된 후 퇴청하면 자주 신돈 찾아가 개혁정책 추진을 논의하여 큰 도움을 주었다.

왕은 신돈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도첨의부의 최고관직인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임명했다.

또 왕에게 신돈을 천거하였던 김원명을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에 제수하여 경주부윤으로 좌천된 최영을 대신해 842도부의 병권과 군부를 장악하게 하였다.

고려사<신돈전>에는 신돈에 의한 최초의 개각을 비하하고 왜곡하고 있다. 신돈에 의해 좌천되거나 파면된 인물들을 먼저 열거하며 부당한 인사처리인 듯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중상모략하면서 살기등등하게 구니 대신 이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기록한 다음에…….

― 旽當注擬, 自稱擧賢良, 及除目下, 所擢授者, 皆其所善也.

― 신돈이 관원을 선발하면서 늘 어질고 훌륭한 이(현량)를 뽑는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막상 명단이 나오고 보면 발탁된 자들은 모조리 그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하고 기술하였으나 그때 금방 정권을 잡은 신돈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으므로 그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별반 없었다. 그러니 시비의 꼬투리를 잡기에 열심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